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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뒤틀림 (108/270)

스스로의 뒤틀림

집에 돌아온 동민은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져두고 침대에 앉아 떨고 있었다. 부모님의 일이 바빠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책상 위에서 진동 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화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전화를 받는 순간 그를 책망하는 수연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혹은 그를 조롱하는 주안의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질 것만 같았다.

결국 몇 번이나 이어지던 진동 소리가 그치고서야 그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전화가 멈추는 지금 아예 전화를 꺼두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핸드폰을 끄려 손을 대는 순간, 전화기는 다시 한번 강하게 진동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놀란 그의 손가락은 종료 버튼 대신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뭐 하는데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거냐?”

전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수연의 것이 아닌, 그렇다고 주안의 것도 아닌 친숙한 굵은 목소리였다.

“…감독님?”

“그래,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안 받던데 대체 뭘 하느라 그러고 있는 거냐.”

“아, 아뇨, 그게…….”

동민은 예상치 못한 병렬의 전화에 당황해서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사이 병렬의 말이 이어졌다.

“…너 오늘 무슨 일이 있던 거냐?”

병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몇 배나 딱딱했다. 그가 이 시간에 동민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건 이유는 하나였다.

‘무슨 일이 있긴 있던 것 같은데. 단순히 경기에 졌거나 황주안 그 사람이 뭐라고 한 정도가 아니었어.’

병렬의 추측은 아무 근거 없는 생각이 아니었다.

오늘, 병렬은 동민에게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경기장을 찾았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이후 천천히 경기장을 나서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불안한 걸음걸이로 허둥지둥 자리를 뜨는 동민의 모습이었다.

‘내가 저놈을 다 안다고 하긴 뭐하지만 그런 표정은 아예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어. 우승이 좌절됐다고 그런 표정을 지을 놈은 아니야. 차라리 다음번에는 이기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면 갈았지 그 정도로 흔들리고 휘청대는 놈은 아닌데…….’

그리고 병렬의 생각은 얼마 전 만났을 때 동민의 모습에 닿았다. 예전보다 오히려 어려진 듯, 고집스러워진 그의 변화가 만약 오늘 동민의 상태와 관련이 있는 거라면…….

확실한 증거는 없는 단순한 추측이지만 동민을 봐왔던 경험과 오랜 직감은 그것이 단순한 헛다리 짚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 아뇨, 그냥 경기에 져서 잠깐 분석을 좀 하느라고요.”

“네놈이 거짓말 못한다는 사실은 나 포함해서 너랑 좀 안다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울리지도 않는 연기 하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해 봐.”

동민의 얼버무리는 말은 곧바로 들어오는 병렬의 추격에 무의미해졌다.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병렬의 말에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 감독님도 다 알고 계신 게 아닐까? 내가 한 일도, 내 탓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팀에서 나오게 됐다는 것도. 차라리 그냥 이대로 다 털어놓고 욕먹는 게 더 편해지는 게 아닐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 동민의 머릿속을 채우고, 결국 동민은 입을 열었다.

“…사실은…….”

동민은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병렬에게 털어놓았다. 일방적으로 수연을 무시하고 능력을 선보일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분노로 주안과의 내기를 시작했다는 것, 그것을 토대로 결승전까지 주안과의 기묘한 관계를 이어나갔다는 것, 그리고 결승전에서 생각지 못한 상황으로 자신은 물론 수연까지 팀을 나가게 되었다는 것까지.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병렬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말했다. 동민의 말을 모두 들은 병렬의 대답은 짧았다.

“…머저리 같은 자식.”

“…죄송합니다.”

병렬의 목소리는 분노를 넘어 허탈감마저 느껴졌다. 병렬에게 당연히 들을 거라 생각한 말이지만, 그 말을 들은 동민은 가슴에 가시가 박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털어놓으면 편해질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 상황이 되자 병렬의 말을 듣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그의 마음을 찔러왔다.

“너는… 그런 일 때문에…….”

“그런 일이 아니라…….”

병렬이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에 동민은 자신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을 내뱉었다. 병렬마저 자신의 동기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것만 같아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성난 병렬의 목소리에 묻혔다.

“입 다물고 들어, 이 멍청한 자식아. 네가 무슨 생각으로 했는지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네 생각이 무섭도록 어리고 유치하다는 거지.”

병렬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능력을 펼칠 기회조차 안 줬다고? 그래서 그런 일을 했는데 지금 결과는 어떻지? 오히려 그 사람까지 같이 팀에서 나가게 됐는데 동기가 무슨 소용이냐, 내가 말하는 건 네가 생각한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이냐는 거지!”

병렬의 목소리에서는 그의 분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멍청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정말 그 사람을 위해서 움직여야 했다면 그런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게 아니냐. 너하고 그 사람 외의 다른 사람들과 선을 긋는 그런 방법 대신 그들을 끌어들일 만한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지! 정말로 네가 그걸 다 해내면 그 사람이 팀에 잘 어울리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동민은 병렬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이 그를 덮쳤다. 그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이미 주안과의 내기를 시작한 때부터 수연이 남아서 팀에 어울리는 것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동민과 수연, 그리고 주안과 다른 스태프들로 나눠진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대답 없는 동민에게 병렬은 분노가 조금 누그러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전부터 생각한 네 최대의 장점은 신중하다는 점이었다. 자기 자신한테 자신감은 적어도 오히려 그 신중한 점이 네가 이 길을 가는 데 충분한 자산이 되어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너는 오히려 그 점을 잃어버렸구나.”

병렬의 말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동민의 가슴을 찔러왔다. 그제야 동민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수연을 돕는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그 이면에선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심이 어느새 그를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동민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저는…….”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어봤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변명은 없었다. 병렬은 정확하게 그의 마음속을 짚어낸 것이다.

“네가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젊을 때에는 없는 것보다 무모할 정도로 많은… 편이 차라리 나을 수 있어. 하지만 네 목적을 잃거나 신중함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잊지 마라. 이제야 깨달은 것 같지만 넌 정말로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을 한 거야.”

병렬의 말에 동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행동에 강하게 입술을 깨물며 자괴감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한참의 침묵 후, 동민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독님, 그러면 그 사람은 왜…….”

“왜 그걸 받아들였냐고?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냐? 난 신중해지라고 했지 미련해지라고 한 적 없다. 그걸 알고 있었든 몰랐든, 질문할 상대를 착각하지 마라.”

병렬은 지친 목소리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동민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다시 연락할 테니 바쁘든 말든 그때는 빠르게 받아라. 아니, 어차피 팀에서 나가면 바쁘다는 핑계도 못 대겠구먼.”

“네? 그게…….”

동민은 무슨 말이냐는 듯 의문을 표했다. 조금 전까지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듯 그를 몰아치던 병렬이었기에 실망한 나머지 이대로 연을 끊겠다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렬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뭘 어쩌니 해도 네놈이 팀에서 나간 뒤에 어떻게 할지 생각은 해뒀을 거 아니냐? 설마 그런 최소한의 생각도 없이 저지른 거라고 말하는 거냐?”

“아,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럼 조만간 이야기해 봐. 이상.”

병렬은 그 말만 남기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해하던 동민은 잠시 뒤에야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감독님……’

그가 저지른 일에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내치지 않겠다는 병렬의 뜻에 동민은 주먹을 꼭 쥐고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다음 날, 동민은 쭈뼛거리며 수연 앞에 서 있었다.

“죄송해요. 어제 일도 그렇고 전부요. 저만 믿으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동민은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사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아니다, 자신이 사과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아니라…….

“어제도 말했잖아요. 전 괜찮아요. 결승까지 올라가면서 함께했던 것도, 그때까지 할 수 있을 거라 믿을 수 있던 것도 동민 씨 덕인걸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수연의 얼굴을 보면서 동민은 결국 마음속에 남아 있는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평생 동안 용서받지 못하고 원망받는다고 해도, 지금 이것을 말하지 않고 숨기는 것은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위한다는 말 아래에서 내 욕심을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말해야만 해. 마지막까지 속일 수는 없어.’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뇨, 수연 씨. 제가 말하려고 하는 건…….”

“괜찮아요.”

수연은 조금 전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아까와 다르게 더 이상의 말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동민 씨가 처음에 말했잖아요.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도와달라고. 저는 그걸 도왔을 뿐이니까 동민 씨가 어떤 생각으로 했는지는 저한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수연은 그렇게 딱 잘라 말했다. 그녀의 말에 동민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때 화낸 게 저 때문인 것도 있잖아요. 아닌가요?”

“그건…….”

“그거 봐요.”

동민은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그리고 그걸 보며 수연은 웃었다.

“내가 할 말은 어제랑 같아요. 고마워하면 고마워했지, 제가 원망할 건 없으니까요. 게다가 그 전부터 그만둘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까 상관없어요. 오히려 그전이었다면 제가 이 길을 계속 가도 될지 고민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제가 축구 코치라는 길을 계속 가고 싶다는 생각은 확실하니까요. 그거면 됐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수연의 미소는 지금까지 동민이 본 그녀의 표정 중 가장 밝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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