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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지는 전말 (107/270)

밝혀지는 전말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방 안을 울리는 동민의 성난 고함에도 주안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오히려 할 테면 더 해보라는 듯 비웃음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이번 경기까지 제가 맡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멋대로 전술을 바꾸다니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당신이 맡다니요? 갑자기 억지를 부리면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

오히려 그는 동민의 말을 모른 체하면서 그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긴 당신이 나랑……!”

거기까지 말하던 동민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말을 멈추었다. 그전까지 자신과 약속한대로 움직이던 주안이 결승전에서 이렇게 급격하게 변한 것은 뭔가가 크게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가 당신과 뭘요?”

“…이제 와서 없었던 걸로 돌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좋아요, 그러면 저는 당장 제가 아는 모든 곳을 다 통해서라도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전부 이야기하겠습니다. 먼저 약속을 깬 건 감독님이니까요.”

동민은 이를 갈면서도 최대한 억눌러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화를 내봐야 소용이 없었다.

‘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렇게 되면 결국 터뜨리는 수밖에.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별수 없어. 단장인 정광호에게 이야기하고 감독님이 아는 쪽으로도 손을 뻗어야지.’

동민은 주안의 갑작스러운 변심에 뒤통수를 맞아 이를 갈면서도 침착하게 생각하려 했다.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은 그의 예상과는 크게 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주안은 그런 동민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듯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약속을 깨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억지 부리면서 당신을 특별 취급해 주던 정광호 그 사람한테 연락이라도 해보게요? 그런데 동민 씨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 거 같은데…….”

동민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좋지 않은 예감에 아무 말 없이 주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안은 그런 동민의 팽팽하게 굳은 표정을 바라보며 선고하듯 입을 열었다.

“정광호, 그 사람은 이미 단장자리에서 물러났거든요. 대략 두 시간쯤 전에 자기 발로 구단을 떠난다고 했고 구단에서는 받아들였죠. 연락해 봐야 아무 소용없을걸요?”

“뭐?”

“흠… 감독한테 말하는 태도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지만 뭐, 지금이야 자비롭게 넘어가죠. 어쨌든 못 믿겠다면 확인해 보지 그래요?”

동민은 주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의심하면서 되물었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주안의 비웃음뿐이었다. 그제야 동민은 어째서 주안이 이런 짓을 벌였는지, 왜 역전패를 하고도 그리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구태여 나랑 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던 거지. 정광호 단장이 팀에서 나간 이상 내가 무슨 소리를 하든 구단에서의 영향력은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감독한테 말했던 것처럼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일을 터뜨리면서 압박이고 뭐고 할 수가 없게 된 거라고.’

동민은 눈앞이 새하얗게 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확실하게 주안과의 내기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무너지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에 생각해 보면 오늘 이 일이 우연일 리가 없어.’

경기 시작 직전 갑자기 발표된 광호가 물러난다는 소식, 그리고 이를 알고 있기라도 하듯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생각대로 팀을 이끈 주안. 동민은 이것들이 모두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번 경기부터 묘하게 아무 말 없이 협조하려던 것이나 이번 경기를 앞두고 보였던 행동들, 만약 저 인간이 미리 정광호가 물러날 거라고 알고 있었다면…….’

결승전 전에 정광호가 물러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결승전에서 자신이 팀을 이끌어도 된다고, 동민과의 내기가 전부 아무 의미가 없게 변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민이 어떻게 팀을 이끌든 그와의 약속이 의미가 없다면 주안은 그를 견제할 필요도 없던 것이다.

‘거기다가 이번 경기 전에도 마지막이니 뭐니 놀리듯 이야기하려다가 일부러 이렇게 하는 게 더 마음에 든 거겠지. 이 빌어먹을 인간이…….’

머릿속에서 가지고 있었던 작은 의문들이 퍼즐이 맞춰지듯 들어맞는 것을 느끼며 동민은 이를 갈았다. 속으로 저주하듯 욕을 내뱉었지만 이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동민을 보면서 주안은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아, 그리고 조금 전에 이번 경기는 자신이 맡느니 어쩌니 했던 것, 그리고 경기 중에 팀 분위기를 흐린 책임을 물어 이 시간부로 해고할 것을 구단에 요청하겠습니다. 당신도, 그리고 한수연 씨도 마찬가지예요. 어디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혼자 망상하는 거라면 모를까 팀에 그렇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죠. 그것도 가장 중요한 결승전 중간에 그런 것을 구단 측에 알리면 당장 책임지라고 달려들 수도 있겠네요.”

주안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빛냈다.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먹이를 발견해 낸 독수리처럼 그의 눈에는 어두운 기쁨과 달성감이 엿보였다.

“그게 무슨……!”

“뭐, 그래도 아까도 말했듯이 내 개인적인 자비도 있고 큰 문제를 만들기는 웬만하면 피하고 싶거든요. 두 사람이 조용히 나가기로 한다면 위에 알리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할래요? 나로서는 가능하면 수락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서로 안 좋아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안 그래요? 오히려 동민 씨랑 수연 씨한테는 이점밖에 없죠.”

주안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동민에게 어딘가 낯이 익은 말이 분명했다. 그 말은 예전에 동민이 주안에게 했던 말 그대로였으니까.

그때와는 칼을 쥐고 있는 쪽이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동민은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자신이 옭아매어 두었다고 생각했던 주안에게 반대로 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정신을 아득하게 하고 있었다.

“…흠, 대답이 없나요? 이 자리에서 당장 정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한수연 씨 생각은 어떤가요?”

주안의 눈은 지금까지 동민의 옆에서 말없이 서 있던 수연을 향했다. 이를 강하게 가는 소리와 함께 수연이 조용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옳지, 저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요. 강동민 씨도 동의하시나요?”

주안의 말에 동민은 부서져라 자신의 주먹을 꼭 쥐었다. 그의 안에는 이런 일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웃고 있는 주안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알, 겠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참, 딱 한 가지 조건만 추가하고 싶은데요.”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주안을 보면서 동민의 분노는 더욱 커졌지만 그저 주먹을 꾹 쥐면서 참는 것 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뭡니까?”

동민은 억누르듯 대꾸했다. 조금이라도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가는 지금 당장이라도 주안을 향해서 욕설을 내뱉을 것만 같았다. 그러자 주안은 먹이를 움켜쥐는 독수리처럼 동민에게 다가가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네깟 놈이 뭐라도 되는 것 처럼 나대지 말란 거다. 세상만사가 네 예상처럼 흘러가는 건 아니거든. 앞으로는 그 머리를 굴리려면 상대를 더 잘 봐야 할 거다.”

지금까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던 것과는 달리, 주안은 동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꾸밈없이 드러내듯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지금껏 자신의 성격을 마음껏 건드리던 동민의 목줄을 손에 쥔 것이 퍽 기쁘다는 듯 말이다.

“아, 앞으로가 존재한다면 말이지. 저년은 몰라도 네놈이 이 바닥에서 제대로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는 반드시 앞으로 여기서 제대로 발도 못 붙이고 살게 해줄 테니까.”

주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얼굴을 뗐다. 말을 끝낸 주안은 이제 시원하다는 듯 뒤로 돌면서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다 지금까지 수고했어요. 두 사람의 의사는 제가 확실히 구단에 전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빠르게 짐들을 정리해 줬으면 좋겠군요. 가능하면 내일 당장. 그럼 앞으로 마주치지 않길 바라죠.”

말을 마친 주안은 먼저 문을 열고 빠른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남겨진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흐른 뒤, 먼저 입을 연 것은 수연이었다.

“저기, 동민 씨…….”

“미안해요.”

동민은 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아니, 저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수연 씨.”

동민은 그 말 직후 발걸음을 옮겨 빠른 속도로 방을 떠났다. 수연의 규탄을 받아낼 만한 정신은 이미 그에게 없었다. 그녀에게 말한 것이 거짓이 되어버렸다는 죄책감,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 무너져 버렸다는 허탈감, 그리고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겼다는 자책이 그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수연의 목소리도 지금은 그를 쫓는 사형집행인처럼 느껴졌다. 언제든 그의 목을 죄고서 책임을 물어올 것만 같았다.

그는 결국 뒤에서 그를 부르는 수연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떠나갔다.

결승전이 끝난 경기장 근처는 아직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신들의 홈 경기장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 기쁨과 흥분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 하는 수원 블루 데빌즈 팬들과 그들의 축제 분위기에 전염된 일반 관객들, 그리고 어서 그 분위기에서 벗어나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성남 페가수스 팬들로 발 디디기도 힘들 정도의 인파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을 빠르게 지나치는 동민의 귀에는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저 사람이 멋대로 자기만 믿니 뭐니 하고서는 일을 다 망쳐 버린 사람이라면서?”

“아니, 처음으로 우리 팀이 FA 우승컵을 쥘 기회를 날려먹은 사람인데. 자기가 하니 어쩌니 해도 결국 결과를 봐. 남은 건 그저 역전패뿐이잖아?”

“그냥 아무것도 안 되는 사람 아니야? 말만 앞서고 아무것도 없잖아? 이제는 어느 팀에도 들어가지 못할 패배자인데.”

수원 블루 데빌즈의 팬들은 마치 수연처럼 그를 규탄했고, 성남 페가수스의 팬들은 역전패의 원흉으로 그를 꼽았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이젠 어느 팀에도 가지 못하는 신세라며 그를 비웃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환청이라는 것이 지금 동민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속을 갈기갈기 찢으며 파고드는 말들이라는 것만이 지금 혼란에 빠진 그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아니야, 나는……!’

동민은 뭔가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으나, 결국 그의 입 밖으로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인파 사이를 밀치고 뛰며 그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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