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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싸움 (106/270)
  • 두 명의 싸움

    ‘아직, 아직이야. 이제야 겨우 동점이다. 저따위 놈들하고 승부차기까지 가서 우승하는 건 굴욕 중에 굴욕이야. 아니, 연장전만 간다고 해도 참을 수 없어. 무조건 그전에 이기고 말아야 해.’

    동점 골이 터지고 분위기가 수원 블루 데빌즈 쪽으로 완전히 넘어온 상황에서도 형만은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했다.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2부 리그 팀 주제에 전반전 내내 자신을 휘둘렀던 상대와 비기고 승부차기까지 가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박박 긁는 일이었다.

    ‘남은 시간은 10분, 아니, 추가시간까지 합한다면 아마 13분에서 길면 15분까지 있겠지. 그 안에 반드시 한 골을 더 만들고 저놈들의 얼굴이 구겨지는 걸 봐야겠어. 그리고 내가 왜 K리그 최고의 선수라는 말을 듣는지 그 이유를 똑똑히 보여주겠어.’

    형만은 이를 악물고 발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모습은 수원 블루 데빌즈의 다른 선수들과 팬들에게도 전염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슈퍼스타가 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는 직접 보여주고 있는 중이었다.

    ‘기회가 오질 않아.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기회만 생긴다면…….’

    한편 진운은 입술을 씹으며 그라운드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몸도 가벼워서 기회만 온다면 상대 수비 틈 사이로 예리한 패스를 찔러 넣거나, 직접 수비를 헤치고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계속된 수원 블루 데빌즈의 공세로 공격의 시작점을 맡은 진운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심지어 공을 터치할 일조차 현저히 줄어들어 버린 것이다.

    ‘…아니야, 가만히 서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릴 순 없어. 이러다간 끝도 없잖아. 기회가 없다면 만들어야지. 아까 전술분석관이 그랬잖아. 감독님이 나를 깊이 신뢰하고 계신다고. 그래, 내가 찬스를 만들지 않으면 누가 만들겠어.’

    거기서 진운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마음을 정한 이상 서서 생각을 계속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그는 주성과 함께 전방을 오가며 패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는 상대의 공격이 오가는 수비 진영으로 빠르게 향했다.

    ‘내가 직접 골을 만들어내겠어.’

    ‘내가 아래쪽에서부터 기회를 만들어 나가겠어.’

    그렇게 경기의 마지막을 불태우려 두 팀의 에이스는 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낸 것은 수원 블루 데빌즈의 에이스인 심형만이었다.

    형만은 또다시 측면에서부터 현란한 개인기로 성남 페가수스의 수비를 흐트러트리며 중앙으로 낮게 패스를 날렸고, 이는 조철민의 발끝에 걸려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이어졌다. 후반 39분에 만들어진 수원 블루 데빌즈의 역전 골이었다.

    골을 넣은 조철민도, 두 번째 어시스트를 기록한 심형만도 모두 기쁨에 빠져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함성을 질러댔다. 올드 데빌 스타디움 내의 열기도 그와 같았다. 전반전에 2골을 먼저 내주고, 후반전에만 3골을 몰아넣으며 역전을 기록한 것에 대한 팬들의 흥분과 기쁨이 한 덩어리가 되어 춤추고 있었다.

    반대로 성남 페가수스의 선수들과 팬들은 모두 망연자실해 있었다.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손에 잡힐 듯 가까웠던 FA컵 우승이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팬들은 모두 ‘그’ 수원 블루 데빌즈를 상대로 전반전에만 두 골을 몰아넣으며 위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럽다며 자신들을 위로했지만 그들의 축 처진 어깨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자기 위로로는 채울 수 없는 실망감이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선수들은 분명히 코앞까지 왔던 우승컵이 떠나갔다는 사실에 아무 말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멍하니 기뻐하는 수원 블루 데빌즈 선수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단 두 명만 빼고.

    “정신 차려! 아직 경기 안 끝났잖아!”

    명진의 일갈이 성남 페가수스 선수들을 강타했다. 평소에 그를 감싸고 있던 장난스러운 태도가 싹 사라진 그의 고함은 멍하니 있던 선수들을 제정신으로 돌리기 충분했다.

    “골 먹히고 그렇게 멍 때리고 있을 거야!? 아직 시간 남았는데 예, 가져가십쇼, 하면서 그냥 우승컵 내줄 거냐고! 저기 공들고 뛰고 있는 진운이는 니들처럼 안 허탈해서 저러는 줄 알아!”

    명진이 가리키는 곳에는 어느새 골대에서 공을 주워 센터서클로 달리고 있는 진운의 모습이 보였다. 단 1초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었다.

    “마지막까지 해봐야 하잖아!”

    명진의 그 말은 허탈감과 상실감에 침울해지던 성남 페가수스를 다시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선수들과는 반대로 팬들의 반응은 체념이었다. 남은 정규 시간 5분, 후반전 내내 상대 진영으로 나가는 일 거의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던 상대에게 5분 안에 골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야 꿈 중에서도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질 순 없어. 반드시 찬스를 만들어내겠어, 반드시. 이렇게 끝나는 건 너무 허탈하잖아.’

    진운에게는 그 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언제나 부상과 함께했던 그에게 이번 시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없었던 시즌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이번 시즌은 소중했다. 다음 시즌이 되면 또 이 결승이라는 자리에 올라올 수 있을지, 올라온다고 해도 자신이 뛰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지금이 소중했다.

    “여기!”

    역전 골 이후, 지금껏 공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수원 블루 데빌즈의 밸런스는 자연스럽게 수비로 옮겨졌다. 남은 짧은 시간 내에 혹시라도 실점을 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성남 페가수스에게는 지금껏 좁았던 중후방의 공간이 확 늘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원과 후방에서 바쁘게 공을 쫓고 차내는 대신 생각을 정리하고 상대 진영을 노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하늘이 주신 기회와도 같았다.

    “받아!”

    진운은 정호로부터 이어진 패스를 받아 좌측면으로 파고들어 갔다. 평소라면 돌파를 해도 중앙을 노리다가 패스를 선택했을 그지만 지금은 중앙에 몰려든 상대 선수들의 수 때문에 부득이하게 측면으로 빠진 것이다.

    측면으로 빠진 상대 플레이 메이커를 보고 수원 블루 데빌즈의 수비는 각자 담당 공격수의 마크에 나섰고, 이윽고 진운의 크로스는 오른발로 깊게 감겨 올라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크로스라 하기엔 너무 빠르고, 높았다.

    ‘어?’

    수원 블루 데빌즈의 골키퍼가 날아오는 공을 향해 손을 뻗쳐 보았지만, 공은 마치 간절한 진운의 마음을 알아채듯 골키퍼의 손끝을 스치고 예술적인 곡선을 그리며 골대 구석으로 빨려들어 갔다.

    3 : 3

    후반 42분 터진 성남 페가수스의 동점 골이었다.

    성남 페가수스의 팬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모두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진운의 아름다운 중거리 슛이 다시 승부의 균형을 맞춘 것이다. 믿겨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다시 승부는 다시 팽팽한 무승부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뒤로 물러났던 수원 블루 데빌즈도 다시 공격적으로 나섰다. 이대로 연장전에 들어설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남은 시간은 정규 시간과 인저리 타임을 합해 5분가량, 두 팀은 마지막 열정을 태우고 있었다.

    “이쪽!”

    형만이 측면에서 공을 받고 드리블 돌파를 시도했지만 점점 지쳐가는지 수비의 태클을 받고 골라인을 넘어 코너킥이 되었다.

    ‘여기가 마지막이 될 거야. 벌써 정규 시간은 끝난 지 오래, 심판도 슬슬 시계를 흘끗거리니까. 여기서 넣어야 한다. 아니, 어떻게든 넣고 만다.’

    형만은 이를 악물고 조철민이 코너킥을 준비하는 것을 보았다.

    반대로 진운의 생각은 달랐다.

    ‘여기서 막아야 해. 그래야 연장전이든 승부차기든 노릴 수 있어. 막아야 해. 꼭 막아야 해.’

    두 사람은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함께 몸을 날렸고, 조철민이 찬 코너킥은 두 사람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막으려는 진운과 넣으려는 형만의 몸은 공중에서 겹쳐졌고 그 공은 빠른 속도로 튕겨 날아갔다.

    골대가 출렁거렸고, 이내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스코어 4 대 3

    수원 블루 데빌즈가 접전 끝에 성남 페가수스를 꺾고 FA컵 우승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직접 보니까 어떠셨어요? 대단했죠? 나이는 좀 있지만 얼마 후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 진출할 예정인 친구라니까요.”

    남자는 썩 유창한 외국어로 웃으며 말했다. 비록 눈앞의 사람은 자신의 협상 대상이 아니지만, 자신의 고객을 누군가한테 자랑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축구 에이전트 일을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확실히 혼자 힘으로 경기를 바꾸는 선수더군요. 당신이 그렇게 극찬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어릴 때 유럽 진출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요.”

    남자는 상대가 자신의 말에 공감해 준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의 고객이 단순히 그에게 돈벌이가 된다는 점을 빼고서 생각해도, 충분한 재능이 약간의 악운 때문에 더 큰 빛을 보지 못한 케이스라 느꼈기 때문이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상대와 이야기하는 일은 역시 즐거웠지만 그에게는 이제 할 일이 많았다. 자신의 고객이 맹활약을 하면서 수원 블루 데빌즈가 FA컵을 든 이상, 협상에 내밀 카드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어, 미스터 최?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서둘러 자리를 뜨려던 남자는 상대의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죠?”

    “혹시 상대 팀에 대해서도 좀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팀 관계자라던가. 성남, 페가수스, 라고 하는 것 같던데.”

    상대의 말에 남자는 조용히 눈알을 굴렸다. 그가 갑자기 저 준우승 팀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고객과 마지막까지 명승부를 만들어낸 장진운이란 선수 때문인가? 그렇지 않아도, 남자도 그 2부 리그 팀의 미드필더에게 관심이 생기던 터였다.

    “아, 그 미드필더 때문인가요? 안 그래도 저도 궁금해져서 알아보려고 하는데 뭔가 소스를 찾게 되면 따로 메일이라도 드리죠.”

    “아, 그 선수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그 선수도 훌륭했고 조금 관심이 생기긴 하지만 제가 궁금한 건 선수가 아니거든요.”

    선수가 아니라는 말에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수가 아니라면 저 구단의 무엇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인가? 남자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어깨를 치켜 올리고 말했다.

    “어… 미스터 볼든, 그러면 정확히 어떤 쪽을 말씀하고 싶으신 거죠?”

    남자의 물음에 상대, 레이미 볼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팀의 스태프가 궁금해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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