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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인 후반전 (105/270)
  • 절망적인 후반전

    “정말로 이길 수 있어 보여요! 진짜 대단해요.”

    주안과 선수들이 라커 룸으로 들어간 사이, 수연이 말했다.

    “말했잖아요.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아직 경기는 안 끝났지만요. 후반전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죠.”

    동민은 침착한 태도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가에 차는 웃음이 가려지지 않았다. 자신이 옳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남은 건 지금 전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대가 나오는 것을 보고 빠르게 대응하면 되는 거야.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파악하는 건 자신 있으니까 분명 이 점수 차를 유지하거나 잘만 하면 더 늘릴 수도 있다.’

    동민의 가장 큰 장점은 스테이터스를 보는 능력을 통해서 상대가 어떤 선수들로 교체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노리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점이지만 그가 가진 가장 큰 차이점은 알아채는 속도였다. 실제로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스테이터스를 보고 미리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점은 동민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동민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드디어 선수들과 주안이 라커 룸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어?’

    그 모습을 기분 좋게 보고 있던 동민의 눈에 뭔가 이상한 점이 들어왔다. 그것은 전반전 동안 오명진과 이정호와 함께 스리백을 구성하던 유민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뭐지? 좀 늦게 나오는 건가?’

    동민의 의문은 곧 통로에서 등장하는 유민성을 보면서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곧 다른 의문이 그의 정신을 후려쳤다.

    ‘응? 왜 트레이닝복을 걸쳐 입고 있어? 그리고 벤치에 있던 교체 맴버인 이주성은 왜 저기서 몸을 푸는 거지?’

    그리고 곧 그의 의문은 충격이 되어 그의 혼란에 빠뜨렸다. 자신이 교체 사인을 보낸 적도 없는 유민성이 교체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놀라 주안에게 향했다.

    “감독님, 지금 저 교체는…….”

    “앉아요.”

    “네?”

    그의 말을 듣고 멍하니 바라보는 동민을 향해 주안은 차갑게 말을 반복했다.

    “앉으라고 말했어요. 감독 결정에 일개 스태프이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죠?”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말에 동민은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지? FA컵 결승까지는 내가 정하는 대로 하기로 했는데? 약속은? 갑자기 무슨 일이지?’

    동민의 머릿속은 마치 소용돌이에 빠진 듯 혼란이 가득했다. 질문이 되지 못한 말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토막토막 잘려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분명히…….”

    “가서, 앉아요. 경기 시작 때까지 내 앞에서 서성거리면서 방해할 생각인가요? 앉을 생각이 없다면 지금 당장 여기서 떠나든가.”

    주안의 말은 차가운 칼날처럼 동민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건가요?”

    어느새 동민의 옆에 서 있던 수연도 분노에 찬 얼굴로 말했지만 주안은 그저 차갑게 답할 뿐이었다.

    “두 사람 다 벤치에서 나가요. 감독으로서 말합니다.”

    “이게 무슨……!”

    그 말에 혼란스러웠던 동민의 머릿속에 빠르게 이성이 돌아왔다. 그러나 당장 따져 묻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들이 그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갑자기 험악해진 분위기에 의문스러워 하는 선수들, 근래에 들어서 사이가 멀어졌던 주안과 동민의 충돌을 보며 결국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의 스태프들.

    결국 동민은 여기서 꺼낼 이야기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 일에 대한 설명은 이따가 제대로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동민은 그 말을 남기고 이를 악물고 벤치를 떴다. 벤치에 있는 다른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아니었다면 당장 주안의 멱살을 잡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주안은 통로로 걸어가는 동민과 수연을 보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뭔가 상황이 확 뒤바뀌었단 건데…….”

    동민은 수연의 질문에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상황이 뒤바뀌었다. 그것 말고는 지금 상황에서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경기도… 저대로 뒀다간 전반전에 쌓아뒀던 것이 모두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동민은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모르는 심판의 휘슬 소리만이 무심하게 후반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침착하자. 말려들지 말자. 저놈들이 무슨 소리를 해도 무시하자.’

    후반전이 시작되고 심형만은 이를 갈면서 심중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수원 블루 데빌즈의 감독인 오선준이 하프타임 내내 그를 붙잡고 상대에게 휘말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것이다. 형만 또한 전반전 동안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휘둘려 왔는지 알고 있었다.

    ‘전반전에 받았던 옐로카드는 잊어버리자. 상대에게 휘말리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내가 압도할 수 있어. 신경 쓰지 말자.’

    형만은 그렇게 이를 악물고 다짐하고는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5분 뒤, 그는 상대가 전반전과는 달라진 것을 느꼈다. 전반전 동안은 조철민과 자리를 바꿔 우측으로 이동해도 강력한 피지컬과 태클로 자신을 짓누르는 수비수가 있었지만 교체를 당한 듯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새로 들어온 수비수도 경계하던 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상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쪽 녀석은 뭔가 이상해. 아까 있던 놈하고는 다르게 수비가 묘하게 서툴러. 마치 자기한테 안 맞는 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연기인가? 아니, 이런 걸로 연기를 해서 득 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면 지금 이건……’

    형만은 다시 한번 공을 잡고 상대의 좌측 중앙 수비수를 공략했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 상대는 빠르게 달려들지도 않고 어색하게 지역 방어를 하려 할 뿐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상대 수비를 제쳐낸 형만의 슈팅은 골대 위를 향했지만 그에게는 확신이 생겼다.

    ‘하프타임에 교체로 나온 상대 수비수, 저놈이 구멍이다.’

    형만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그 이후, 후반전은 전반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전반전 내내 상대에게 휘둘리면서 자멸하던 형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경기력을 되찾았고, 이는 곧 수원 블루 데빌즈의 공격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게다가 전반전 동안 하부 리그 팀에게 두 번이나 일격을 허용한 것을 뒤집기 위한 수원의 용병술은 공격적으로 일변했고, 이는 그들의 공격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

    이를 막아야 하는 성남 페가수스의 수비진은 반대로 전반전과는 다르게 고전 중이었다. 오명진의 대인 수비와 이정호의 커버는 여전히 안정적이었지만 심형만이 자리를 옮긴 좌측 수비는 그렇지 못했다.

    ‘이런 썅, 전반전 내내 쥐 죽은 것처럼 얌전하던 놈이 뭐 이렇게…….’

    이주성은 다시 개인기로 자신을 돌파하는 심형만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지난 전주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센터백으로의 변화를 보여줬던 그였지만, 본래 미드필더 자리에서 뛰고 있던 만큼 수비력 자체는 본직 중앙 수비수인 민성이나 명진, 심지어 정호에 비할 바도 아니었다.

    단지 뒤로 물러나 역습에 치중하는 전주 드래곤즈의 상대를 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수비가 가능하고 패스가 뛰어난 센터백이 필요했던 동민의 기행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그만큼 모자란 이주성의 수비는 심형만에게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고, 형만은 전반전 동안 당한 굴욕을 되갚기라도 하듯 성남 페가수스의 좌측 수비진을 완전히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건 예상 밖인데.’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진땀을 흘리는 것은 다름 아닌 성남 페가수스의 감독인 주안이었다. 그는 상대의 에이스인 심형만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상대의 뒤 공간을 노리는 패스를 해줄 자원을 늘리기 위해 이주성을 센터백으로 삼은 것이지만 지금 그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만 것이다.

    ‘저놈이 저렇게 다시 살아나 버리면 예상한 것이 전부 망가져 버린다.’

    주안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 중이었지만 그런 주안의 마음을 더욱 급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후반 21분, 수원 블루 데빌즈의 추격 골이 터지고 만 것이다.

    골의 주인공은 수원 블루 데빌즈의 명실상부한 에이스인 심형만이었다. 형만은 후방에서 측면을 따라 이어진 패스를 받고 성남의 좌측 풀백과 센터백을 모두 농락하듯 휘저은 뒤에 슛을 날렸다. 형만이 찬 공은 마치 빨려들 듯 골대 구석을 향하고는 부드럽게 골 망을 흔들었다.

    형만의 전매특허라 할 만한 정확한 슈팅이었다. 골이 골 망을 흔드는 것을 본 형만은 전반전 내내 자신을 도발하던 명진의 앞에서 포효하며 공을 들고 하프라인을 향했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세리머니는 낭비라고 말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드디어 터진 형만의 골은 수원 블루 데빌즈 팬들에게는 다시 희망을, 그리고 성남 페가수스의 팬들에게는 먹구름을 몰고 왔다.

    ‘이거 영 안 좋게 흘러가는데… 설마…….’

    주안의 입안에서는 점차 침이 말라가고 있었다. 지금은 감독이지만 그는 자신이 언제나 말하듯 국가대표에서도 잔뼈가 굵을 정도로 오랜 선수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지금의 분위기는 오랜 선수 생활을 지내던 자신의 예감을 시험하듯 불안함이 가득했다.

    ‘이런 망할…….’

    주안은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듯 욕을 내뱉었지만 이미 분위기는 2 대 1로 성남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뒤지고 있는 상황인 것처럼 역전되어 있었다.

    수원 블루 데빌즈의 팬들은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이 고작 2부 리그 팀에게 질 리가 없다는 듯 열정적으로 응원했고, 이는 이기고 있는 스코어조차 사실 뒤집힌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주안은 부랴부랴 주성을 위쪽으로 올리고 황석우를 투입했지만 이미 분위기를 타버린 수원의 공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명진이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분전했지만 형만은 그가 없는 반대쪽 공간으로 움직이면서 계속해서 공격을 이끌어 나갔고, 이를 명진 혼자 막아낼 수는 없었다.

    결국 후반 33분, 수원의 동점 골이 터졌다. 이번에도 골의 시작점은 심형만이었다. 측면에서 파고드는 형만을 막기 위해 명진이 달려들면서 중앙 수비 라인에 구멍이 생겼고, 이를 조성훈이 놓치지 않고 강한 슈팅으로 마무리 지었다.

    결국 전반전 동안 동민이 벌어놓은 두 골 분량의 여유는 다 따라잡히고 만 것이다. 올드 데빌 스타디움은 마치 축제의 현장인 것처럼 달아올랐다.

    ‘이걸 대체…….’

    주안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지만 이미 허용한 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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