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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전반전 (104/270)
  • 희망의 전반전

    ‘생각대로 흘러가네. 저 정도로 잘 먹힐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동민은 명진과 험악하게 말을 주고받는 심형만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명진이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들까지 하면서 형만을 도발하는 것은 그가 짜놓은 계책의 일부였던 것이다.

    ‘경기장에 있는 것 자체로 문제를 불러오는 선수라면, 경기장 밖으로 내보내거나 적어도 자기 몫을 다하지 못하게 만들면 되니까.’

    동민은 예리한 미소를 지으며 형만의 스테이터스를 떠올렸다.

    [심형만]

    27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4.9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3.8 / 20

    선호하는 플레이: 좌측면에서 안쪽으로 드리블 선호, 우측면에서 안쪽으로 드리블 선호, 정확한 슈팅 선호

    특성:

    장점 - 정확한 패스, 왼발의 마법사

    단점 - 불같은 성격

    현재 컨디션: 7/10

    동민이 형만의 약점으로 꼽은 것은 스테이터스에 나와 있던 불같은 성격이었다. 그의 열정적인 성격은 그가 속한 수원 블루 데빌즈의 사기를 올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팀에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상대 수비수의 도발에 넘어가 흥분하게 되면 자신의 플레이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심형만이 제대로 플레이를 펼치지 못한 경기들을 보면 대체로 상대 수비가 매우 거칠었던 적이 많았다. 거친 태클이랑 반칙들을 당하다 보면 본인도 본인 성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슬슬 삐걱대기 쉬운 선수 같으니까.’

    그 점을 동민은 파고들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심형만을 상대로 거친 태클과 반칙을 이어나가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나도 컸다. 위험 지역에서의 세트 피스는 물론, 그 정도를 제대로 맞추지 못할 경우에는 수적인 패널티까지 짊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개인 기량에서 밀리는 성남 페가수스에게 그런 일은 패배로 가는 지름길과도 같았다.

    결국 그는 지금까지 있던 경기들을 토대로 경험 많은 오명진에게 최대한 반칙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를 도발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조금 전에 있었던 심형만과 오명진의 충돌이었다. 명진은 그 역할에 자신을 선택한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보여주듯 계속해서 심형만의 심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걸 위해서 오명진의 위치까지 바꿔놨으니까.’

    심형만을 상대하기 위한 동민의 계략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심형만과 오명진을 최대한 충돌시키기 위해서 수비진의 자리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평소라면 유민성-오명진-이정호라는 좌측에서 유민성이 피지컬로 자르고, 우측에서는 이정호가 위치를 선점하며 마지막 커버를 오명진이 하도록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보통 좌측에서 나서는 심형만을 위해 오명진을 우측 센터백으로 출전시킨 것이다.

    ‘거기에 우측 윙인 조철민과 스위칭을 한다고 해도 그쪽 또한 피지컬이 장점인 유민성이 있으니까 어느 방향이든 심형만을 도발하고 굴리기는 좋지. 이정호가 커버가 안 되는 선수도 아니니까 이 방법이 심형만을 계속 정신적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길이야.’

    동민의 생각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결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적당히 좀 하라고. 이 빌어먹을 놈이 진짜.”

    “어이구, 입은 걸걸한데 실력은 영 아니신가 보지? 능력은 안 되고, 열은 받고. K리그 최고의 선수니 뭐니 거품도 심하네.”

    명진이 입을 열수록 형만의 머릿속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의 마음속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경기력도 삐걱대고 있었다. 평소라면 여유 있게 수비를 제치고 직접 슈팅을 노리거나 자로 잰 듯한 패스로 동료들의 골을 도왔을 테지만 오늘 형만의 플레이는 급하기 그지없었다.

    치고 들어가야 할 타이밍에는 빨리 공을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에 성급한 패스를 했고, 뚫고 들어가기엔 수비가 단단해 보이는 때에는 억지로 뚫으려 하다가 공을 뺏기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생길수록 명진의 말은 더더욱 형만을 자극했고, 이는 형만의 마음이 더욱 급해지게 만드는 악순환을 반복시켰다. 그리고 결국 전반 22분, 동민이 노리고 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악!”

    명진의 짧은 비명이 그라운드를 가로질렀다. 골키퍼의 패스를 받고 이정호에게 전달해 주는 과정에서 심형만의 거친 태클이 들어온 것이다. 명진은 우측 다리를 잡고 그라운드를 굴렀고, 양 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그 상황을 정리하던 심판이 숨을 씩씩거리는 형만에게 옐로카드를 높이 들었을 때, 동민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걸로 심형만은 위축될 수밖에 없어.’

    동민은 자신의 계략이 걸려 들어간 것에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그것은 명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몸을 미끼로 삼아 상대의 반칙을 이끌어낸 것이다.

    ‘아…….’

    반대로 형만은 심판이 들어 올린 카드를 보자 차가운 얼음에 머리를 담근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 머리에 피가 올라 상대에게 무모한 태클을 했지만 심판이 꺼내든 옐로카드를 보자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깨달은 것이다.

    ‘저놈들은 처음부터 이런 걸 노리고 했을 텐데.’

    그는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말려든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후회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자신이 한 일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이후, 형만의 페이스는 눈에 띄도록 더 떨어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계략에 속아 엉망진창으로 당해 버렸다는 자괴감, 스스로에 대한 짜증, 이 상황을 만든 상대에 대한 분노가 섞여 그의 발을 무겁게 붙잡고 있는 듯했다.

    ‘역시 생각대로 수원 블루 데빌즈의 가장 큰 장점은 공수의 밸런스 같은 게 아니라 심형만의 존재 자체였고, 단점 또한 심형만이었어. 심형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수원 블루 데빌즈의 공격은 휘청거리고, 수비도 마찬가지다.’

    동민은 어느새 손발도 제대로 맞지 않는 졸전을 펼치고 있는 수원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수원 블루 데빌즈의 공격이 흔들린다는 것은 반대로 성남 페가수스의 역습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

    진운은 우측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이영준에게 정확한 롱패스를 찔러 넣었다. 이영준에게 전달된 패스는 이내 상대 수비수의 육탄 수비로 막혔지만 그의 패스는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확실히 평소보다도 공이 발에 착착 달라붙는 느낌인데.’

    진운은 아쉽다는 듯 영준에게 박수를 치면서 생각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주안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기분 탓인지 몸이 굉장히 가볍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FA컵 결승이라는 커다란 무대에 조금이나마 움츠러들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재빠른 몸놀림과 패스로 수원 블루 데빌즈의 미드필더진과 수비진을 잘게 썰어내고 있는 것이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몸이 가벼워.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정말로 저 수원 블루 데빌즈를 꺾고 우승을 하게 될지도 몰라.’

    진운에게 연결된 공은 또다시 상대 수비의 빈 곳을 찾아 날카롭게 쏘아졌다.

    ‘아니, 우승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확실히 이길 수 있어.’

    K리그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는 심형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수비도, 자신의 발끝에서 시작되어 다른 동료들에게 이어지는 공격도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위력적이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가능하다는 생각이 점점 더 그의 마음속을 채웠고, 이는 오래 지나지 않아 현실에 가까워졌다.

    전반 34분, 수원 블루 데빌즈의 공세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틈을 타고 성남 페가수스의 선제골이 터진 것이다.

    성남 공격의 시발점은 이번에도 심형만의 턴 오버(공격 중 볼을 뺏겨 역습이 시작되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형만이 무리한 드리블로 볼을 끌다가 명진의 태클에 무기력하게 공을 내줬고, 이는 곧바로 장진운에게 향했다.

    진운은 곧바로 상대 진영을 달려 들어갔고, 공격을 위해 앞쪽으로 나와 있던 미드필더진은 그에게 붙을 수밖에 없었다. 전반전 내내 날카로운 패스들을 선보이던 진운의 존재는 수원 블루 데빌즈에게도 큰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진운은 달려드는 두 명의 수비 사이로 여유롭게 스루패스를 찔러 넣었다. 마치 바늘귀를 통과하듯 좁은 공간이었지만 오늘의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진운의 스루패스는 세진의 논스톱 슈팅으로 마무리 지어지면서 성남의 선제골이 되었다.

    성남의 첫 골이 터진 순간, 경기장은 충격이라는 글자가 형상화된 듯 보였다. 경기장에 가득 들어찬 관객들, 심지어 성남 페가수스의 팬들 중 대부분도 그들이 수원 블루 데빌즈를 상대로 먼저 골을 뽑아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성남 페가수스 팬들의 함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전주 드래곤즈, 부산 히어로즈를 연속으로 꺾고 결승전에 온 것만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K리그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수원 블루 데빌즈를 상대로 한다면 대패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상황이 반대로 된 것이다.

    K리그 최고의 선수라 손꼽히는 심형만을 꽁꽁 묶어냈고, 오히려 선제골을 넣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사기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성남 페가수스 팬들의 환호성이 다시 한번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선제골이 들어간 지 채 5분도 되지 않고 추가골이 터진 것이다. 추가골의 주인공은 성남 페가수스의 캡틴인 오명진이었다. 상대의 실책이 만들어낸 코너킥에서 깔끔한 헤딩골로 성남의 두 번째 골을 만들어낸 것이다.

    ‘좋아 이렇게만 된다면 승리는 거의 넘어온 거나 다름없어.’

    오명진의 이름을 소리 높이 외치는 팬들의 함성 소리를 들으며 동민은 웃었다. 생각보다 너무도 손쉽게 수원 블루 데빌즈 라는 거함을 격침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상대 감독이 하프타임이 되면 어떻게든 심형만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추격 골을 노리려 들 테지만 저쪽이 급할수록 우리도 방법이 있으니까.’

    동민은 전반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후반전에 어떻게 나설지 예측하며 대응 방법을 강구했다.

    ‘확실히 정신을 차린 심형만이 이끄는 공격은 매섭지만 그만큼 억지로 공격을 하다 보면 수비적인 허점들도 드러나기 마련이야. 상대는 부산 히어로즈처럼 모든 전력을 전부 때려 넣는 공격에 익숙한 팀이 아니니까 분명히 흔들리는 면이 생길 테고, 그 부분을 파고들 병기가 우리한테는 있으니까.’

    동민의 눈은 장진운을 향했다. 평소에도 뛰어난 패스를 선보이던 그는 동민의 컨디션 강화까지 겹치자 K리그에서 웬만한 톱클래스 선수들보다 뛰어난 패스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쪽이 급할수록 우리는 뒤를 칠 수 있어. 전반전에 만들어진 두 골은 수원 블루 데빌즈에겐 치명적이다. 이 경기, 분명히 이길 수 있어.’

    동민은 자신감과 기대로 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보여주듯 청아한 심판의 휘슬 소리가 전반전 종료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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