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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야 하는 이유 (102/270)
  • 이겨야 하는 이유

    “이게 다음 경기인 수원 블루 데빌즈와의 결승전 전술입니다.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동민은 평소처럼 보고서를 두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주안이 이제 와서 뭔가 이야기하려고 들 리도 없으니, 말없이 뚱한 주안의 얼굴을 보는 대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방에 돌아가고 싶었다.

    “…잠깐 기다려.”

    “네?”

    생각지 못한 주안의 목소리에 동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동민과 크게 충돌한 이후 그가 입을 여는 것은 꼭 필요한 때뿐이었기 때문이다. 동민은 밖으로 향하던 몸을 돌려 다시 주안을 보았다.

    “…아니, 아니야. 그냥 나가봐.”

    그러나 주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평소 주안의 모습에서는 볼 수 없는 애매한 태도에 동민은 의문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입을 닫아버린 주안의 태도에 방 밖으로 나섰다.

    ‘결승전이라고 그런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방 밖으로 나선 동민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주안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는 주안이 결승전이라는 사실에 뭔가 심경의 변화가 온 것이 아닌지 추측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주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주안의 그 변화가 뜻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잘될 거 같냐?”

    “확신이야 못 하겠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있지.”

    경태의 질문에 동민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에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었다.

    “얌마, 그렇게 애매하게 말하면 안 되지. 말이라도 무조건 이긴다고 해야 할 거 아냐.”

    종환은 짐짓 날 선 목소리로 동민을 몰아세웠다.

    “그렇게 말하면 그건 그거대로 내가 너무 풀어지는 느낌이잖아.”

    “어이구, 저거 요즘 일 힘들다더니 어린 꼰대 다 되셨네. 말 하나하나에 참견하고 있는 거봐.”

    “이 인간이, 말이 너무 너무하네, 어린 꼰대라니.”

    동민은 그런 종환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고, 경태는 농담으로 대꾸했다. 세 사람은 FA컵 결승전을 앞두고 오랜만에 셋이 함께 만나서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무튼 말뿐이라도 응원해 줘서 고마워. 잘되겠지 뭐.”

    “말뿐이라니? 뭔 소리야? 이미 표 예약까지 끝냈는데.”

    “어?”

    경태의 말에 동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동민을 보면서 종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주말인데 따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네가 있는 팀이 결승에 간 건데 보러가야지.”

    “…고마워.”

    자신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의 존재에 새삼스럽게 감사하며 동민이 조용히 대답했다.

    “너 그런데 어차피 같이 갈 거면서 왜 일단 내 표 하나만 예약하라고 한 거야? 그날 일 있을지 없을지 헷갈려서 그랬냐?”

    동민이 두 사람의 행동에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동안 경태가 종환에게 물었다.

    “아니. 그날 일 없는 거야 한참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지. 우리 회사, 웬만하면 쉬는 날 하나는 잘 안 건드리니까.”

    “그래? 그러면 왜?”

    “여자 친구랑 같이 가니까 형이랑 같이 표를 예약 못 하지. 데이트 코스 준비를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사람이 어디 있어?”

    “뭐? 야, 너 대체 언제부터?!”

    종환은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는 듯 말했다. 종환의 대답에 경태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종환의 멱살을 잡고 소란을 피웠지만 동민의 눈에는 그 광경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런 응원에 보답하고 싶어.’

    그는 다시금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며 다짐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것도, 감독님에게 내가 올바르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그 인간한테 한 방 먹이는 것도 모두 이제 단 한 경기에 달려 있어.’

    “긴장돼요?”

    경기를 앞두고 동민은 벤치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지금쯤 주안은 동민이 주문한 대로 라커 룸에서 선수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을 테지만 그는 평소처럼 먼저 벤치로 나와 있었다.

    “조금이요. 결국 이거 한 번으로 결정 나는 거니까요.”

    동민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수연에게 대답하고 눈길을 그라운드로 돌렸다.

    ‘걱정보다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경기가 시작되고 바로 컨디션 상승이 필요한 선수들을 찾아서 올려두어야 하고.’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경기가 지나고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포인트는 4 포인트. 이 경기에서 두 명의 컨디션을 올리기에는 충분한 포인트였다. 지금껏 포인트를 쓰지 않고 모아둔 보람이 있던 것이다.

    ‘한동안 포인트는 쓸 일도, 얻을 일도 없을 테니까. 여기서 굳이 아낄 필요도 없지. 괜히 아끼다가 처음부터 개인 기량에서 크게 밀려 버리면 그걸 뒤집는 게 훨씬 더 어려우니까 지금 써둬야 해.’

    동민은 최대한 냉정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제 곧 펼쳐질 경기는 그가 남아 있는 모든 포인트를 거의 다 써서 컨디션을 올린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경기였다. 그만큼 그에게 나중을 위해 아낀다는 선택지는 고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동민이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수연은 어느새 그의 옆에 다가와 말을 고르고 있었다.

    “예?”

    뒤늦게 옆에 서 있는 수연을 깨닫고 그가 고개를 들자 수연은 잠시 우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제 상황에 대해서 같이 화내준 것도, 이렇게 도와준 것도요. 오늘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잘 안 된다고 해도 고마운 건 똑같아요. 사실 전부터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야 이야기하게 됐네요.”

    “어…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지야… 감독한테 개인적으로 감정이 있는 것도 있고, 솔직히 능력을 펼칠 기회도 얻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요. 아, 아무튼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일단 이번 경기부터 제대로 마무리 지어야… 아, 물론 그런 말이 필요 없으니 집중이나 하자는 말은 아니고요, 그 뭐냐…….”

    수연의 말에 동민은 부끄러움으로 말을 얼버무리며 얼굴을 붉혔다.

    “알았어요. 일단 이번 경기가 끝난 이후에 다시 한번 이야기할게요. 일단 경기에 집중부터 해야죠.”

    그리고 그런 동민을 보면서 수연은 작게 미소 지었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던가?’

    수연의 미소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지만 동민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결승이라… 참, 정신 차리면 휙 바뀌는 느낌 들지 않아요?”

    정호의 말에 명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FA컵 결승이라는 큰 무대에서도 흰소리부터 하는 정호의 행동에 자신의 긴장까지 풀리는 느낌이었다.

    “너답다, 너다워. 이런 상황에도 긴장하는 거보다 헛소리하는 게 먼저냐? 참 이놈이 요상한 의미에서는 물건이라니까.”

    “저야 뭐, 저번 시즌까지만 해도 주전으로 뛴 적도 없으니까 긴장을 할 거면 매 경기마다 그랬어야죠. 하도 긴장하다 보니까 지금은 오히려 평소 경기랑 큰 차이가 없는 느낌 같아요.”

    정호는 그렇게 말하며 도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명진은 그의 대답에 쓴웃음이 더 깊어졌지만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지난 시즌까지 태클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탓에 주전 스리백의 일원이라기에는 애매한 위치였던 그였지만, 이번 시즌부터는 자신의 장점인 패스와 위치 선정을 토대로 황석우 대신에 경기에 나오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이 녀석도 그렇지만 주성이도 그렇지. 진운이한테 집중되는 부담을 줄이는 것도 있지만 확실히 본인들의 발전도 있어 보여.’

    명진은 정호를 보면서 오늘은 후보 선수인 주성을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프리시즌에 있던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경기 이후로 주안의 선택을 받는 경우가 늘어난 것이다.

    ‘태클은 밀리지만 후방에서 볼 배급이나 직접 찔러주는 패스가 나나 석우, 민성이보다 훨씬 나은 정호. 그리고 진운이의 공백을 못 채우던 전과는 다르게 다른 플레이 스타일로 본인의 자리를 확립한 주성이. 확실히 바뀌었어. 그리고 이 두 명의 변화가 생겨난 건……’

    명진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두 사람을 변화시킨 게 분명한 사람, 그리고 어쩌면 전주 드래곤즈와의 FA컵 8강전에서도 관련되어 있던 사람.

    ‘강동민 그 어린 친구가 저 둘한테 뭔가 했던 건 분명해.’

    시즌이 지날수록 동민에 대한 명진의 생각은 확고해져 가고 있었다. 그전까지 정호의 장점인 패스보다도 불안정한 태클과 대인 수비력에 집중하던 주안조차도 갈수록 그의 장점을 보는 이유가 결국 따지고 보면 그 경기 이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뤄진 동민에 대한 고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마음속에 조금씩 더 쌓이는 중이었다.

    ‘이렇다 할 증거가 없긴 하지만……. 과연 저 친구가 얼마나 더 능력을 보여줄 것인가. 아직 남아 있는 이번 시즌도, 그리고 다음 시즌에도 얼마나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오려나.’

    명진은 이번 FA컵 결승이라는 큰 무대보다도 다음 시즌 승격이 유력한 K리그에서 얼마나 더 좋은 성적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었다. 벌써 31살인 그가 앞으로 정상적인 경기력으로 뛸 수 있는 시간은 3년에서 4년 정도, 그는 그 안에 얼마나 더 많은 변화를 볼 수 있을지 기대하는 중이었다.

    “형 또 멈춰 서서 뭐 해요? 정호 니가 또 무슨 헛소리했냐? 저 형 왜 멍 때리고 있어?”

    “예? 아니, 평소같이 그냥 말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멈춰 서서 저러시던데요. 명진이 형? 명진이 형!”

    명진은 그를 부르는 두 명의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또 골똘히 하고 있어요? 난 또 노망이라도 든 줄 알았네.”

    “이놈의 자식이 경기 전부터 못 하는 말이 없어.”

    “악!”

    자신을 보면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진운의 등짝을 약간의 진심을 담아서 후려치고 명진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생각에 빠진 줄 알았는데 꽤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야. 이번 FA컵 결승도 그렇지만 승격하게 되면 내년부터 이런 팀들하고 경기가 늘어날 거 아니냐. 그래서 잠깐 생각하던 거뿐이야. 가자.”

    등을 붙잡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진운을 두고 명진은 그라운드를 향했다.

    “이번 경기도 아직인데 벌써 다음 시즌 생각이에요? 주장은 생각할 거리도 많네.”

    진운을 닮아 요즘 말이 늘은 정호를 보면서 명진은 웃었다.

    “눈앞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건 나이 먹어가는 증거라던데 젊은 놈이 벌써부터 그런 거냐? 뭐, 네 말도 맞네. 일단 지금 경기부터 집중해야지.”

    명진의 눈은 그라운드를 향했다.

    ‘상대가 아무리 강팀이라도 목표는 우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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