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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으로 가는 동아줄 (99/270)
  • 결승으로 가는 동아줄

    “2부 리그라고 쉽게 생각했는데 한 대 맞은 느낌이네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감독님도 놀랍다는 반응이었잖아. 원래 저런 팀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형진은 낭패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에 동점골을 허용한 것은 부산 히어로즈의 모두에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주었다. 지금껏 비어 있는 양 측면을 이용한 역습은 많이 당했고, 대비해 왔지만 일부터 상민까지 내린 중앙을 통한 역습 시도는 생각지 못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우리가 하는 것도 달라지는 게 아니잖아. 감독님도 치킨 레이스나 다름없다고. 저쪽이 역습 전술이라지만 위험 부담이 큰 이상, 결국 누가 실수하고 골을 먹히느냐, 거기서 갈리는 거야. 정신 차려.”

    형진의 말은 비단 경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성남 페가수스가 그들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한 방을 통해 보여준 만큼, 팀원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가 한번 당했지만 동요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가 매 경기마다 무실점으로 끝내는 팀도 아니었고 우리 최대의 무기인 공격력이 떨어진 상황도 아니야. 감독님이 항상 말씀 하셨잖아. ‘수비 라인에서 세 골은 먹으면 네 골을 넣으면 된다’, 허용한 만큼 넣으면 되니까 주눅 들지 마. 정신은 차리되, 주눅 들진 말자. 알았지?”

    형진은 그렇게 말은 끝내면서 팀원들을 이끌고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경기의 양상은 전반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산 히어로즈가 중앙에서 짧게 공을 돌리다가 양 측면으로 길게 이어주면서 공격을 주도해 나가면, 성남 페가수스는 양 측면을 내주면서 중앙에서 수비하며 장진운을 통한 롱패스로 역습을 시도했다.

    양 팀은 모두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상대의 골문을 노렸고, 여러 번의 슈팅이 골키퍼에게 막히거나 골대를 넘어가며 관중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그런 긴장감 넘치는 상황에서 먼저 웃음을 지은 것은 전반전과 마찬가지로 부산 히어로즈였다.

    후반 18분, 우측면에서 침투하던 김경원이 스트라이커인 주민제와의 2 대 1 패스로 수비를 허물자, 주민제가 결국 마무리를 짓고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지금껏 김경원과 정형진을 주로 신경 쓰던 성남 수비진에게 자신도 부산 히어로즈의 공격력을 담당하는 선수라는 것을 알리는 듯한 포효였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동민의 표정은 살짝 구겨졌다. 그 감정의 정체는 그토록 상대에 대한 조사를 하고 맞춤 전술을 들고 나와도 두 골이나 허용할 수밖에 없는 상대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가장 무섭고 신경 쓰이는 점은 두 골 모두 우리 팀 수비진이 한 실수 탓이라기보단 상대 팀이 잘해서 수비를 뚫어낸 거라는 거지.’

    부산 히어로즈의 첫 골에서 성남 수비진이 당황해 잠깐 멈춘 것은 그 전까지 내내 주민제의 머리를 노리거나 아예 길게 넘겨서 김경원에게 이어지던 크로스가 갑자기 낮고 빠르게 흘러간 탓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골은 미리 파고들 위치를 선점하고 있던 이정호를 놀리듯 돌파 대신 패스를 선택한 김경원의 센스, 그리고 오명진과의 몸싸움을 버텨내고 슈팅까지 시도한 주민제의 집념이 만들어낸 골이었다.

    두 골 모두 그들을 상대한 수비진의 실수 탓이라기보다는 그 상황을 만들어낸 부산 히어로즈 선수들의 능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실수에서 이어진 거라면 우리 탓을 해야겠지만 그게 아니라 그냥 저쪽이 잘한 거니 더 문제야. 곧바로 따라잡지 않으면 이대로 분위기에서 무너지고 말 수도 있어.’

    동민은 침착하려 애썼지만 점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따라 잡아야 해. 그렇다고 마재호 대신 이주성을 넣거나 아예 황세진은 측면으로 빼고 한영수를 투입하면서 공격에 더 힘을 쏟으면 수비가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으니……. 여기선 장진운을 믿는 수밖에 없어.’

    동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운의 패스가 만들어낼 마법 같은 순간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처럼 쉽게 동점골은 나오지 않았다. 주민제의 골로 다시 앞서나가기 시작한 부산 히어로즈는 계속해서 성남 페가수스를 압박했고, 고작 몇 센티미터 차이로 골대를 맞는 슈팅마저 나오는 상황에서 성남의 역습이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어느새 시간이 후반전 30분을 지나자 동민은 입술을 씹으며 이주성이나 한영수라는 교체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수비적으로 훨씬 더 불안해지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도박이라도 해봐야 하나…….’

    그렇게 동민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무렵, 결국 장진운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또 한 번의 제대로 된 기회를 만들어냈다.

    후반전이 시작된 후, 전반전과는 달리 부산 히어로즈 선수들에게 1차적인 견제 목표로 손꼽힌 진운은 전반전처럼 전방에 머물면서 공을 기다릴 수 없었고 결국 후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몇 번의 패스로 부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그는 점점 더 패색이 짙어지자 스스로 위치를 바꾸었다. 압박은 거세도 확실한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전방으로 움직인 것이다.

    동민이 짠 전술에도 없었고 주안의 지시도 없었던 행동이지만 그것이 동점골을 만드는 변화가 되었다.

    상대의 크로스를 먼저 끊어낸 정호가 앞으로 나서면서 찔러준 스루패스가 부산의 미드필더진들의 사이를 뚫고 진운에게 연결되자마자 볼을 끌고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껏 패스에 집중하던 진운의 중앙 돌파에 중앙 미드필더인 상민을 제외한 부산의 두 수비들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파하고 있는 상대를 막아낼 것인가, 아니면 뒤쪽으로 침투하고 있는 두 명의 공격수에게 이어질지 모르는 패스를 차단할 것인가.

    그들의 선택은 후자였고 이는 곧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진운은 상민의 태클을 피해내면서 중거리 슈팅을 날렸고, 이는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골문을 관통했다. 지금껏 패스에 집중하던 진운에게 드물던 중거리 골이었다.

    ‘후반전 41분, 이제는 진짜 정신력 싸움이야.’

    동민은 손에 땀을 쥐고 진운의 골을 보고 있었다. 지난 8강전 동점골의 주인공인 진운이 이번에도 팀을 구해낸 상황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점점 더 조급해지던 위험한 상황을 뒤집는 것이 에이스의 역할이라면, 진운은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것이다.

    ‘남은 건 다른 선수들, 그리고 그 선수들이 활약할 수 있게 만드는 내 역할이지. 분명히 곧 효과가 있을 텐데…….’

    그의 간절한 바람은 그라운드 위에서 땀을 흘리는 선수들을 향해 있었다.

    ‘진짜 끝까지 따라오려고 하네. 승부차기라도 노리려고 하나.’

    김경원은 속으로 으르렁거렸다.

    민제의 골로 결정 나는 줄 알았던 경기의 행방이 진운의 중거리 골로 다시 평형을 이루자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신경을 긁어대는 가장 큰 문제점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정호였다.

    ‘제쳐질듯, 제쳐질듯 막아내는 이놈의 수비가 진짜 사람 속 터지게 하네.’

    경원은 자신이 뛰어들어 갈 침투 루트를 이미 교묘하게 먼저 막아내는 정호를 보면서 이를 갈았다. 상대는 지금껏 자신을 막는 수비수들처럼 1 대 1로 공을 뺏으려 들지도 않았고, 다른 수비수들과 함께 에워싸서 그를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먼저 자신이 빠져 들어갈 공간을 교묘하게 막아내거나 패스 루트를 막아 패스를 가로채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공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패스를 받을 때가 더 위협적인 경원을 위해 동민이 생각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한 또 하나의 문제점이 있었다.

    ‘또?’

    자신에게 날아오는 패스가 또다시 정호에게 끊어지고 공이 진운에게 이어지자 그의 발걸음은 후방으로 향했다. 진운의 패스는 우형에게 막혔지만, 이미 후방으로 물러난 경원과 형진 탓에 빠른 재역습의 기회는 날아가 버렸다.

    진운의 역습에 두 번이나 골을 허용한 것은 경원을 비롯한 부산 히어로즈 선수들의 머릿속에 불안감으로 남았고, 이는 그들의 공격이 전반만큼 매끄럽고 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었다. 부산 히어로즈의 강점은 물 흐르듯이 계속되는 공격과 상대 수비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방향 전환이었지만, 지금 그들은 자신들에게 두 번이나 비수를 꽂은 장진운이라는 존재에 그들도 모르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제야 좀 신경이 쓰이나 보네.’

    동민은 후반 막판 미세하게 합이 맞지 않는 부산의 공격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전반전부터 시작해서 경기 내내 중앙으로 역습을 집중시켰던 효과가 늦지만 발휘되는 듯했다.

    ‘부산의 최대 강점은 정신없이 계속되는 공격이지. 상대가 골을 넣든 말든 두 골을 먹히면 세 골을 넣고, 세 골을 먹히면 네 골 이상을 넣어서 이기겠다는 의지. 근데 그런 팀이라도 생각 못한 방법으로 두 번이나 찔리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같은 상대에게 생각지 못한 곳을 두 번이나 뚫렸다는 사실은 그들도 모르게 한 가지 생각을 심어두었다. 장진운이 공을 받을 때마다 자신들의 중앙 수비가 불안하다는 생각이 그들의 발걸음을 조금씩 늦추고 있는 것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 차이 안 나겠지. 해봐야 잠깐 발걸음이 멈추거나, 아니면 수비 커버를 위해서 몇 걸음 움직이는 정도. 그래도 그 약간의 차이가 부산이 자랑하는 공격이 안 굴러가게 만드는 쐐기랑 같아. 거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 저하도 있을 테니까. 아무리 K리그 선수들이라도 경기 막판이 되면 체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현상이지.’

    동민이 믿고 있는 또 한 가지는 부산의 체력 저하였다. 성남 최전방의 세진과 명우, 진운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움직이는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자신들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공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이번 경기 그들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공격을 해나가야 하는 부산은 그만큼 자신들도 큰 폭을 쉬지 않고 움직여야했다. 마치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상어처럼 그들은 뛰고 또 뛰어야만 공격을 이어갈 수 있던 것이다.

    동민의 생각처럼 그 약간의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체력 저하와 더불어 점점 더 그들의 발목을 잡았고, 그들의 패스는 점점 더 활력을 잃고 정체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후반 추가시간이 되자 동민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이정호가 장진운을 거치지 않고 최전방으로 직접 내준 패스는 이미 지친 부산의 수비진을 뚫고 명우에게 연결되었고, 이는 곧 성남의 역전골이 되었다. 그것은 줄기차게 경원의 수비에만 집중하던 정호가 만든 단 한 번의 기회이자 성남을 결승으로 이끄는 동아줄이기도 했다.

    동민은 그 광경을 보면서 힘차게 포효를 내질렀다.

    주안에게 말했던 대로, 그리고 병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대로 그는 팀을 FA컵 결승에 올려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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