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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겨야 하는 이유 (97/270)
  • 그들이 이겨야 하는 이유

    “준결승전 상대가 2부 리그 팀이라니 운도 좋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되려 지게 되면 그거만큼 창피한 일도 없어. 집중해.”

    부산 히어로즈의 주장인 정형진은 가벼운 태도의 김경원에게 주의를 주며 그라운드를 향했다.

    “에이, 형. 그래도 결승 진출이 훨씬 수월한 상황인 건 형도 아시잖아요. 감독님 이야기 들어보니까 K2 리그에서 1위 팀도 아니라던데. 지금껏 저쪽이 만난 것도 죄다 비교적 약팀뿐이었던 거 같고, 그냥 지금껏 운 좋게 올라오다가 이제 툭 떨어지는 거죠 뭐.”

    “또, 또 아주 매번 풀어지는 너 나사 조여주는 것도 일이다, 일. 이건 무슨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달라지는 게 없어.”

    형진은 경원의 등판을 가볍게 치고는 짐짓 투덜거렸지만, 그의 입가에는 자신 있는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껏 몇 년을 함께 한 그들답게 경기 전에 언제나 있는 대화였다.

    “이것도 다 형이 있으니까 믿고 이러는 거죠. 어쨌든 그리 부담 가질 것도 없다는 이야기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경원의 너스레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경원이 말은 저렇게 해도 언제나 경기에 집중한다는 사실은 오래 보았던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건 아닌가. 감독님도 계시니.’

    지금은 리그 내에서 최고의 공격력을 가진 국가 대표 급 양 풀백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들이었지만, 3년 전까지만 해도 부실한 수비력과 몸싸움이라는 단점이 부각된 반쪽짜리 선수였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재작년부터 확 바꾸어놓은 것이 지금의 부산 히어로즈 감독, 정영원이었다.

    ‘수비 라인에서 세 골은 먹으면 네 골을 넣으면 된다’라는 그의 말처럼 극도로 공격적인 전술을 신봉하는 그의 전술은 수비가 안 되는 구멍투성이 선수 취급을 받던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맨 마킹이 서툴러도 좋다. 그들이 맨 마킹을 하지 않고 다른 팀이 그들을 마킹하도록 만들면 된다.

    측면 역습에 취약해도 상관없다. 그들이 측면 역습을 당하기 전에 상대 수비를 공략하면 된다.

    수비를 못해도 좋다. 그들에게 맡겨진 역할은 기본적으로 수비가 아니니까.

    영원의 지도 후, 그들은 곧 날개를 단 듯 날아올랐다. 형진의 단점으로 지적되던 수비력은 압도적인 공격력에 파묻혔고, 경원의 피지컬적인 한계였던 몸싸움은 웬만한 공격수 못지않은 침투로 가려졌다.

    그런 영원의 전술은 그들을 리그 최고의 측면 수비수들 중 하나로 만드는 것을 넘어서 국가 대표 팀에까지 승선하게 만든 것이다.

    ‘타이틀이 없는 것 때문에 우리 팀이 과소평가 받는 건 이번시즌으로 끝내야 해.’

    물론 영원의 전술에도 단점은 있었다. 과도할 정도로 앞쪽으로 쏠린 밸런스는 빠른 역습에 취약했고, 수비 부담을 전부 짊어지는 센터백은 과부하로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정리되지 않은 수비 라인 덕에 부임한 첫 시즌의 성적은 6위라는 그저 그런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장점을 팬들에게 보여주었다. 보기 드물 정도로 화끈한 공격, 한 경기당 2골이 넘는 골 수는 부산의 팬들뿐 아니라 중립 팬들의 눈까지 사로잡았다. 그러나 전문가들로부터는 안정되지 않은 수비와 두 시즌 동안 무관이라는 점 때문에 고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수비가 튼튼하진 않지만 우리도 최고의 팀 중 하나다. 그걸 여기서 보여줘야 해. 그러려면 2부 리그에서 올라온 이런 팀 정도는 확실히 이겨야만 하고. 감독님이 하나라도 타이틀을 들게 하려면 이번이 기회다.’

    형진은 그렇게 전의를 다졌다.

    그리고 그의 전의는 경원을 비롯한 다른 팀원들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좀 심한데. 2부 리그 약팀이라고 기세라도 오른 거야, 뭐야? 아무리 이 경기를 이기면 결승이라지만 이건 무섭잖아.’

    동민은 경기 시작 후 상대의 모습을 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정형진]

    30세

    잘 쓰는 발 : 왼발

    성장 가능성 12.8/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2.7/20

    선호하는 플레이 : 좌측면을 따라 드리블 선호

    특성 :

    장점 - 캐논 슈터, 정확한 크로스

    단점 - 부정확한 위치 선정

    현재 컨디션: 8/10

    [김경원]

    28세

    잘 쓰는 발 : 오른발

    성장 가능성 12.9/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2.5/20

    선호하는 플레이 : 수비의 틈 사이로 침투, 우측면을 따라 드리블 선호

    특성 :

    장점 - 정확한 슈팅, 빠른 발

    단점 - 깃털 몸

    현재 컨디션: 8/10

    ‘대부분의 컨디션이 평균보다도 높은 것도 있지만 가장 무서운 건 그게 아니야. 단순히 스테이터스가 높은 것보다 무서운 건 저쪽이 진짜 이를 악물고 하는 느낌이라고.’

    동민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스테이터스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동민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는 스테이터스 이상의 움직임들을 만들어내는 것들이었다. 부산 히어로즈의 선수들은 전체적인 개인 기량도 성남 페가수스보다 위였지만 그 이상으로 경시가 시작하자마자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동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눈에 안 보이는 심리적인 부분이겠지. 선수들의 사기나 동기부여 같은 것.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질 않아.’

    그들은 처음으로 FA컵 4강에 오른 성남보다도 더욱 동기부여가 되어있는 듯 이를 악물고 뛰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가 확실히 더 약팀이니까 좀 풀어질 걸 기대했는데 풀어지기는커녕 더 무섭게 달려들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형진을 포함한 부산 히어로즈 선수들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동민은 예상외의 상황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상대에 대한 맞춤 전술을 준비했다고 해도 상대의 방심을 노리려던 생각이 완전히 뒤집혀 버린 것이다.

    ‘개인 기량도 저쪽이 위고, 동기부여도 밀리지 않는다. 결국 해결책은 전략적으로 부산의 허점을 공략해야 한단 건데……. 잘 될지 모르겠네.’

    동민은 입술을 깨물면서 생각에 잠겼다.

    ‘무조건 이 경기에서 승리해서 결승으로 가는 거야.’

    형진은 경기 초반부터 이를 악물고 달리고 있었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린 지 15분도 안 된 시간, 그는 벌써 성남 페가수스의 우측면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있었다.

    ‘우리 팀에 대한 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던 건지, 아니면 원래 실력이 모자랐던 건지 측면이 자동문인데. 아까 경원이한테 주의를 주긴 했지만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정말로 수월하게 결승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껏 부산 히어로즈를 상대하는 팀들은 대부분 어떻게든 측면을 막아내려 애를 쓰곤 했다. 양 측면의 미드필더까지 모두 내려와 두껍게 벽을 쌓거나, 반대로 형진이나 경원의 뒤를 노리려 전진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 상대인 성남 페가수스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측면을 어느 정도 열어둔 채 중앙에서 막기에 급급해 보였다.

    ‘이 정도로 뻥뻥 뚫리면 오히려 반대로 뭔가 있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인데. 처음부터 짓눌러 버리는 쪽이 좋겠어.’

    형진의 날카로운 크로스는 헤딩슛으로 이어졌지만 또다시 아슬아슬하게 골대를 넘어갔다. 벌써 네 번째 슈팅이었다.

    ‘전반전부터 확실하게 골을 만들어내면 이 뭔지 모를 찜찜한 기분도 사라지겠지.’

    그는 한층 더 마음을 다잡고 발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빛을 발했다.

    계속해서 좌측 사이드라인을 따라 성남 페가수스의 수비를 뒤흔들던 형진이 다시 크로스를 올리려 하자 성남의 수비진은 중앙에서 공중 볼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몇 번이나 크로스가 막혔던 형진이 이를 두고 볼 리 없었다. 형진의 크로스는 낮게 땅에 깔렸고, 빠른 속도로 성남의 수비진을 꿰뚫었다.

    전과는 다른 공격에 성남의 수비진은 당황했다. 비록 그 당황은 영 점 몇 초의 아주 잠시였지만, 그 찰나의 순간마저 찬스가 골이 되기에는 차고도 넘치는 시간이었다. 내내 김경원의 침투를 미리 좋은 위치를 선점하는 것으로 막아내던 이정호가 잠시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김경원이 수비 사이로 들어오고 만 것이다.

    ‘이거지.’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칠 경원이 아니었다. 공격진에게 붙어 있던 성남의 수비진이 미처 붙지 못하는 틈을 타 골대 구석으로 깔끔하게 공을 밀어 넣었다.

    전반 27분에 터진 부산 히어로즈의 선제골이었다.

    ‘하아, 부산 히어로즈를 상대로 무실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역시 이렇게 되면 머리가 아픈데.’

    동민은 선제골을 넣고 포효하는 경원을 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측면을 열어준 것도, 오른발잡이인 이정호를 왼쪽으로, 왼발잡이인 유민성을 우측으로 넣은 것도 그의 수비 전술이었다.

    ‘측면을 비워줘도 중앙으로 오는 공만은 확실하게 막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거기에 몸싸움은 못해도 위치 선정이 좋은 이정호가 김경원의 침투를 막고, 피지컬이 좋은 유민성이 정형진의 크로스를 막아내면 그래도 꽤나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영 쉽지 않네.’

    무실점까지 기대하진 않았어도 적어도 상대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보다 정형진과 김경원의 움직임은 더 위였다.

    ‘계속해서 크로스가 끊어지거나, 받아도 제대로 된 슈팅을 못하니까 아예 낮게 깔아버리는 선택을 한 정형진. 단 한 번의 찬스도 놓치지 않고 골로 만들어내는 김경원. 저 둘이 어떻게 수비수냐고.’

    동민은 입술을 깨물며 그라운드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진정했다.

    ‘그래, 어차피 한 골 정도는 허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중요한 건 이제 슬슬 저쪽 수비진이 한 번쯤은 흔들릴 타이밍이 올 텐데 그걸 잡느냐, 놓치느냐 하는 게 이 경기의 분수령이다.’

    동민의 눈은 날카롭게 부산 히어로즈 측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히 한 번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야. 나한테 극성스럽게 달라붙지 않는다는 건 공격에 집중을 해서 그렇거나, 우리 팀이 K2 리그 팀이라고 날 얕보는 거거나 둘 중 하나야. 한 번이라도 나한테 제대로 공이 온다면…….’

    진운은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돌리고 있었다.

    부상 이후로 첫 선발 출전인 만큼 그의 의욕은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비록 선제골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지난번 있었던 부상을 넘어 FA컵 결승전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의욕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세진이나 명우랑 말을 맞춰놓았으니까. 지금 기세가 올라서 공격에 집중하고 있지만 단 한번만 실수하면 곧바로 최전방으로 보낼 수 있어.’

    이번 경기에서 그가 받은 역할은 단 하나였다. 수비에 크게 집중하지 않아도 좋다. 공을 전달받는 즉시 상대 수비진의 뒤로 공을 날려 최전방의 두 공격수에게 찬스를 만들어라.

    진운의 눈은 의욕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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