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시험 (96/270)
  • 두 번째 시험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동민은 그 말을 남기고 방 밖으로 향했다. 그의 등 뒤에는 이제 익숙한 침묵만이 남겨져 있었다.

    ‘정말 저 인간은 눈곱만큼이라도 변하는 게 없다니까. 전에는 차라리 반응이 없는 게 편했지만 이쯤 되니 정말 벽인지 사람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어.’

    그는 방 밖으로 나와 방 안에 앉아 있을 주안을 향해 눈을 흘겼다. 벌써 며칠 앞으로 다가온 부산 히어로즈와의 경기 준비 때문에 주안의 방을 들른 참이었다.

    “그리고 보면 시간 참 빠르단 말이야.”

    동민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며칠 전 비가 내린 이후로, 아직도 뜨겁게 태양이 빛나던 늦여름의 하늘이 어느새 높아진 것을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팀에 있는 것도 끝까지 해봐야 리그가 끝나는 다음 달이 끝이겠고. 또 한동안은 일 대신 공부하는데 여념이 없겠네. 뭐, 내가 택한 길이니까.’

    FA컵 경기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다음 달 말로 예정된 리그 마지막 경기가 끝나면 동민은 성남 페가수스를 떠날 예정이었다.

    ‘적어도 말했던 대로 FA컵 우승을 따내고 나서 떠났으면 좋겠는데…….’

    팀을 떠나는 것은 이미 확정적인 상태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주안과의 내기는 확실하게 이기고 싶었다.

    그 감정은 이미 ‘주안이 주도하는 수연의 따돌림을 없애겠다’라는 전의 목적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병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와 자신이 성남 페가수스에 있었다는 증거와 같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감정들까지 그 안에 모두 섞여 있었다.

    ‘그래, 그러기 위해선 부산 히어로즈를 누르는 게 우선이지. 특히 다른 사람들보다 김경원, 정형진 그 두 사람을 막는 게 큰일이야. 대책이야 이미 생각해 뒀지만 역시 전부 예상대로 흘러갈 리가 만무하니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네. 저번처럼 갑작스러운 부상이라도 있으면 또 뒤바뀌니까.’

    부산 히어로즈가 자랑하는 공격적인 두 풀백은 당장 눈앞에 닥쳐온 경기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포지션은 분명히 수비수지만 숙련된 공격수에 가까운 움직임과 패스, 골 결정력을 지닌 두 사람을 막는 일은 동민이 부산 히어로즈 경기를 본 이후로 계속 고민하던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풀백한테 그런 움직임을 주문하는 감독도 진짜 괴짜지. 그만큼 공격력으로 상대를 두들겨 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으면 애초에 할 수도 없으니까. 공격 일변도의 전술을 위해서 그 두 사람을 쓰는 건지, 아니면 그 둘을 중심으로 그렇게 극단적이라 할 만큼 공격적인 전술을 짜낸 건지 모르겠네.”

    동민은 자신의 방에 돌아와 의자에 기댔다. 의자 앞의 탁자 위에는 그가 방책을 짜기 위해 해놓은 낙서들로 가득한 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게 떠올려서 다행이지. 아직도 제대로 된 방법을 못 떠올린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어.’

    그는 쌓여 있는 종이들을 다시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공격력이 뛰어난 풀백을 막아내는 방법으로 동민은 세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측면 수비를 단단히 하는 것이었다. 공격적으로 전체적인 밸런스를 기울이고 있는 상대팀에 맞추어, 이쪽은 뒤로 빠지고 수비적으로 뛰어난 선수들로 하여금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법이었다. 분명히 가장 떠올리기 쉬운 방법이면서 잘 해내면 상대의 장점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동민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수비적으로 내려앉아봐야 가둬놓고 두들겨 패는 부산을 상대로 골을 노리기는 더 어려워지는 데다가, 일단 우리 팀이 자신 있는 방법이 아니니까. 괜히 어울리지도 않는 방법을 따라하다가 실수만 늘고 무너지기 쉽지.’

    만일 자신이 속해 있는 팀이 역습에 익숙한 전주 드래곤즈였다면 곧바로 선택할 방법이지만 성남은 그들만큼 역습에 뛰어난 팀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김경원과 정형진의 뒤 공간을 노리는 것이었다. 공격적으로 올라오는 그들의 뒤 공간을 빠른 발을 지닌 선수들로 노리려 든다면 그들의 오버래핑(수비수가 공격에 가담하는 일)을 억제할 수 있고, 동시에 골을 노릴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실제로 부산 히어로즈를 상대하는 팀들이 많이 이용하는 방법이면서 지금껏 효과를 본 방법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만큼 상대도 잘 아는 약점이란 거지. 그만큼 대비도 어느 정도 해두는 방법이기도 하고.’

    동민은 강원 디어즈와의 경기에서 한 명의 미드필더가 내려가면서 동시에 두 센터백이 조금 더 거리를 벌리던 것을 기억했다. 그것이 상대가 발 빠른 윙어를 이용해 측면을 노리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센터백이 양 측면으로 더 벌어지면 상대가 가속도가 붙기 전에 어떻게든 달라붙어서 끊어내기도 쉽고, 동시에 중앙은 내려온 미드필더가 1차 저지선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자신들의 약점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단 거야. 거기다가 일단 우리 팀에는 그 뒤쪽을 노릴 만한 발 빠르고 공격적인 윙어는 없으니…….’

    상대가 그 두 명의 풀백 외에는 성남과 비슷한 수준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혹은 동민의 팀이 그들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좋은 방법이겠지만 이 또한 동민이 고를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거의 모든 포지션에서 성남 페가수스를 압도하는 부산 히어로즈인 이상,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허를 찌르지 못하면 결국 선수들의 개인 기량에 짓눌릴 것이 뻔했다.

    결국 동민이 택한 방법은 그 두 가지가 아니라 세 번째 방법이었다.

    ‘경태 형이 아니었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수도 있었는데, 그 자리에 경태 형이 같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부산에서 경태와 함께 경기를 볼 때,경태의 말을 듣고 세 번째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역습 상황이 되었을 때 미드필더에서 커버가 조금만 늦으면 바로 중앙 수비수 두 명이 수비를 다 떠맡아 해야 하는 건데. 부산 팀 컬러 자체가 닥치고 공격하는 쪽이기야 하지만 중앙 수비수는 신경 무진장 쓰일 것 같아서.’

    그 말에 그는 자신이 굳이 상대의 강점인 측면에 묶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팀에는 발 빠르고 공격적인 윙어가 없어. 그렇다고 측면에서 실수 한 번 없이 상대의 공격을 원천 봉쇄하는 수비가 있지도 않지. 애초에 쓰리백 전술이 기본인 이상 측면은 우리한테 강점이라고 하기 보단 약점에 가까우니까. 그러니까 약점을 강화시키려고 해봐야 효율도 안 좋고 제대로 되지도 않아. 저번에도 그랬지만 강점을 더 극대화시키는 편이 좋지.’

    그가 떠올린 방법은 측면이 아닌 중앙을 노리는 방법이었다. 측면에서 직접 두 풀백의 뒤를 노리며 오버래핑을 억제하는 것보다는 안정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중앙 수비수를 흔드는 데 충분한 일이었다.

    ‘중앙 수비수가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결국 상대는 두 풀백의 공격 가담을 줄이던지, 아니면 수비적인 불안을 안고 공격에 임할 수밖에 없으니까. 두 풀백이 공격에 가담하는 일이 줄면 좋은 거고, 그렇지 않아도 결국 뒤가 불안하면 조금씩 사소한 실수들이라도 나오기 마련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노려볼 만한 상황이지. 무엇보다 선수들이 적응하기도 더 쉬운 방법이니까.’

    성남 페가수스에는 발 빠르고 공격적인 윙어는 없지만 민첩한 중앙 공격수는 있었고, 무엇보다 그에게 정확한 롱패스를 날려줄 자원이 있었다.

    ‘다행히 장진운의 부상이 심하지 않아서 금방 복귀했으니까. 충분히 상대의 뒤를 노려서 롱패스를 떨어뜨릴 수는 있단 거지.’

    결국 그가 생각한 방법은 지금 있는 선수들로도 충분히 해볼 만하고, 상대의 허를 찌를 만한 방법이면서 동시에 충분히 실용성이 있는 방법이었다. 단점이라면 안정성이 부족하고, 상대가 측면에만 집중한다면 막아낼 만한 수비력은 부족할 수 있다는 거지만 그에게는 그 정도 리스크야 감수할 만한 일이였다.

    자신의 계획을 다시금 되짚으며 동민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100퍼센트 마음대로 된다고 확신을 할 순 없지만 분명히 이거라면 상대 팀이 예상하진 못하겠지. 안전한 방법이나 남들도 다 아는 방법으로 우리보다 더 강한 상대를 이길 수는 없지. 애초에 지금 이런 상황들을 만든 것도 전부 위험성을 떠안아서라도 큰 목표를 노리려고 한 결과니까. 이제 와서 겁먹을 수도 없지.’

    큰 고기를 노리려면 그만큼 더 큰 바다로 나가야 하는 법이라며 그는 마음을 정한 참이었다.

    부산 히어로즈와의 맞대결까지 남은 기간은 고작해야 며칠, 그는 남은 며칠 동안 자신이 얼마나 더 승리에 가까워질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나 선발 명단을 보면 크게 달라지는 건 없네.’

    동민은 부산 히어로즈의 선발 명단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번 경기에서 상대가 갑자기 자신들의 주 무기인 정형진과 김경원을 쓰지 않고 다른 방법을 택했다면 동민은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할 참이었다.

    “측면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전에 중앙에서 패스를 돌리는 것만 해도 우리 팀보다는 확실히 우위니까. 만약 지금껏 쓰던 전술 집어치우고 로테이션을 겸해서 다른 전술로 나왔다면 그거만큼 악몽이 없었겠지.”

    그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요?”

    “아, 아닙니다. 아무 말도 아니에요.”

    동민의 혼잣말에 등 뒤에서 주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굳이 주안에게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 남은 건 경기가 얼마나 생각대로 돌아가느냐, 그리고…….’

    동민은 눈을 돌려 뒤에 있는 주안에게 시선을 향했다.

    ‘저 인간이 어떻게 해주느냐인데…….’

    그는 저번 경기에서 주안이 했던 행동들을 기억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양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는 한 번뿐이라면 모를까, 두 번이 된다면 선수들에게 위화감을 심어버린다. 그걸 알고 있는 동민은 이번만은 주안이 평소처럼 선수들을 대해주길 바랐지만 그가 주안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FA컵 성적에 대한 공로는 전부 돌리겠다고 말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저 인간한테 내밀어 줄 당근으로는 부족한가. 젠장할, 무슨 생각인지를 모르니까 무조건 대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누가 눈치채기라도 하는 걸 바라는 건가? 설마…….’

    동민은 주안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곧 그의 의식은 주안이 아닌 다른 인물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오명진의 눈치도 좀 이상했는데… 하아, 경기를 준비할 때에는 잊고 있었는데 확실히 다른 의미에서 골치 아프긴 하네. 저 인간이 최대한 맞춰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주어진 두 번째 시험인 부산 히어로즈와의 FA컵 준결승전이 이제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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