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승리 뒤의 그림자 (93/270)
  • 승리 뒤의 그림자

    “으음……이걸 어째야 하나…….”

    동민은 핸드폰을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눈이 고정된 핸드폰 화면에는 오랜만에 보는 병렬의 문자가 쓰여 있었다.

    [요즘 팀 성적이 괜찮더라. 잘 지내는지 조만간 얼굴이나 보고 이야기하길 바란다.]

    ‘감독님 연락이야 언제나 환영이긴 한데 타이밍이 뭔가 좀 그렇단 말이지…….’

    동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평소라면 언제든 반가웠을 병렬의 연락이었지만 지금은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감독님이 뭔가 알고 계시기라도 한 건……’

    그는 곧바로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지웠다. 다른 팀원들에게까지 이야기가 퍼지지 않도록 하던 주안이다. 아무리 이리저리 아는 사람이 많은 병렬이라 해도 그런 일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괜히 나 혼자서 신경 써봐야 아무 의미 없어.’

    동민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병렬에게 보내는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동민은 휴일을 맞아 병렬과 약속을 한 식당으로 향했다. 정신이 없어서 한동안 연락도 하지 못했던 병렬과의 만남은 그의 발걸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동민은 병렬을 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감독님,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연락 못 드려 죄송합니다!”

    “오자마자 큰 소리 내기는. 얼른 앉기나 해라.”

    병렬은 동민의 사과를 겸한 인사를 흘려들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내가 왜 아직도 네 감독이냐. 네가 지금 있는 성남 페가수스 팀 감독한테나 그렇게 똑바로 인사하고 다닐 것이지.”

    “아하하, 오랜만에 뵈어도 여전하시네요.”

    얼굴을 보자마자 툭툭 내뱉는 그를 보면서 동민은 몇 달 만에 보는 병렬이어도 달라진 것이 없다며 웃었다. 그동안 주안과의 충돌이나 수연과의 일로 피곤하던 동민의 입가에도 오랜만에 근심 없는 웃음이 꽃피고 있었다.

    “그래, 얼마 전에 있었던 FA컵 경기도 그렇고 요즘 성남이 성적 잘 나오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한참 동안 식사와 반주를 곁들이면서 각자의 시시콜콜한 생활을 이야기하던 중, 병렬이 운을 뗐다.

    “아직 시즌 다 지나간 것도 아니니까요. 아직도 끝날 때까지는 아직 세 달 가까이 남았는걸요.”

    동민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슬쩍 눈을 피했다. 빠르면 그전에, 늦어도 이번 시즌이 끝나는 즉시 팀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병렬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팀을 떠나는 것도, 떠나서 무슨 일을 할지도 생각은 해뒀지만 감독님이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네. 아예 나중에 팀을 떠날 때까지는 입 다물고 있는 게 좋으려나.’

    동민은 입속에서 몇 번이나 떠돌던 말을 그대로 삼키고는 식사를 입에 쑤셔 넣었다.

    “그래, 네가 스태프로서 겪는 첫 시즌도 얼마 안 남았다는 이야기군. 황주안 감독 밑에서 배운 것들이 많았길 바란다. 그런 경험 많은 감독 밑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적지 않을 테니까. 다음 시즌도 마찬가지겠지만 첫 시즌처럼 네가 이리저리 들이받으면서 배우는 경험을 적을 거다.”

    병렬의 말에 동민의 눈썹이 소리 없이 꿈틀거렸다.

    경험 많은 주안의 밑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거라는 병렬의 말이 술이 조금 들어간 그의 신경을 건드린 탓이었다. 그러나 동민은 입속에서 떠도는 것을 넘어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굳이 지금 주안이나 팀에 대한 이야기를 병렬과 하면서 찝찝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표정을 보니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먹다가 혀를 살짝 깨물어서요.”

    동민의 서툰 거짓말에 병렬은 슬쩍 눈을 찌푸렸다.

    ‘꼴을 보아하니 이놈이 팀에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 본데. 황주안 감독이랑 트러블이라도 있었던 건가.’

    축구판에서 오래 있던 만큼 병렬은 주안과 직접적인 접촉은 없어도 어느 정도 그에 대한 소문은 들을 수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본인의 생각을 관철한다는 황주안의 소문은 병렬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마 이놈이 뭔가 이야기라도 했다가 대판 깨지기라도 한 거겠지.’

    라이선스를 준비할 때에도, 선수 때와는 다르게 스스로의 고집을 보이던 동민의 모습을 떠올리며 병렬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황주안 감독은 괜히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가만히 보기도 하고 참고 생각하면서 배우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감독님은…….”

    병렬의 말에 동민의 입이 들썩이다가 잦아들었다. 억지로 입을 다무는 동민을 보며 병렬은 캐물었다.

    “내가 뭘? 말을 시작했으면 어디 끝까지 해봐라.”

    병렬의 말에 동민은 입술을 깨물고 우물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감독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제가 눌러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동민의 말에 병렬은 작게 눈썹을 찌푸렸다.

    “…네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만, 만약 팀에 관한 이야기라면 지금은 당연히 네가 참아야지. 그럼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거냐.”

    병렬의 차가운 목소리가 동민을 꿰뚫고 지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병렬의 단언에 동민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병렬이 마저 입을 열었다.

    “몇 달간 못 본 사이에 꽤나 건방이 늘었구나. 아니면 전보다도 오히려 생각이 더 어려진 건지도 모르겠다. 네 나이가 이도저도 모르고 날뛸 나이는 아닐 텐데.”

    “그게 무슨……!”

    병렬의 말은 차가운 칼처럼 동민을 베어나가는 듯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눌러 참아야 하냐고? 지금은 당연한 거다. 넌 네가 생각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확실할까? 적어도 지금 너는 이 일을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어리고, 경험 없는 애송이인데? 벌써 몇십 년 동안 그 일을 하던 사람과 경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너. 누가 옳을 확률이 더 클까?”

    동민은 아무 대답 없이 병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네가 옳다고 쳐도 네가 옳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뭘 보고 믿어줄 수 있겠냐. 증명할 수 있는 근거라고는 없는 생각? 고작 몇 달뿐인 경험? 끽해봐야 동아리 축구 대회에서 네가 이끌던 팀이 우승했다는 사실? 대체 뭘 보고 믿을 수 있지?”

    “감독님, 저는!”

    “입 다물고 일단 들어. 네가 옳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면 그 근거로 삼을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거다. 그래, 예전에 있던 경기에서 네가 이차주를 빼면 안 된다고 했었지. 그때 내가 그 말을 들었던 건 그전까지 내가 알던 네가 헛소리를 하는 놈은 아니었으니까 그랬다. 나는 그전의 너를 알고 있으니까 그랬던 거라고. 반대로, 지금 너희 팀에서 너를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냐?”

    거기까지 말을 마친 병렬이 소주잔을 들어 타는 목으로 넘겼다. 그러나 그가 술을 넘기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동민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내 말은 무조건 고개를 처박고 있으라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네가 다른 사람, 그것도 너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사람 앞에서 네가 옳다고 설득하려면 그 사람이 믿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니면 적어도 상대가 너에 대해서 인정하는 부분이 있게 해야지. 같은 말을 해도 일을 시작한 지 고작 몇 달 뿐인 애송이보다는, 적어도 좀 더 오래 보면서 믿을 만하다고 느낀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테니까.”

    말을 끝맺는 병렬은 입안 쪽이 씁쓸한 것을 느꼈다. 그에게 있어서는 매우 드물게도, 스스로 자제하지 못할 정도로 열이 올라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말을 한 것이다.

    ‘고작 몇 잔에 술이라도 취하기라도 건가.’

    스스로에 대한 가벼운 혐오감에 빠져 있던 병렬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민을 보면서 힘없이 마무리는 지었다.

    “일단 네가 옳다고 생각해도 더 개방적으로 받아들여 보라는 거다. 그게 나 같은 늙은이보다 젊은 네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이니까. 그리고 그래도 네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고 생각하면 적어도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움직여야 하고. …오늘은 너도 생각이 꽤나 굳은 것 같으니 머리 좀 식히고 다시 생각해 봐라.”

    “…네. 감사합니다. 감독님.”

    동민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지.’

    병렬은 살짝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어느 정도 술을 입에 대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발걸음을 흔드는 것은 몸에 들어간 술이 아니라 자책감과 실망감이었다.

    ‘동민이 그놈한테 그렇게까지 심하게 이야기를 했어야 하나…….’

    스스로도 말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지만, 아까 동민에게 쓴 소리를 할 때에는 그 스스로조차 자제하기 힘들 정도로 격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동민을 보내고 집으로 걸어가는 지금에서야 그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실망한 거지.”

    병렬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내뱉었다.

    자신의 밑에서 선수로 뛸 때부터 그가 기억하는 동민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편이었다. 다른 이들과의 충돌도 대부분 그가 양보를 하던 모습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사고 이후에 더 안 좋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어쩌다 연락이 되거나, 주위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꽤나 어두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동민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감독이 되고 싶다며 찾아오고 난 이후부터였다. 좋게 말해서 뚝심이 생겼고, 나쁘게 말해서 고집이 생겼다. 그것을 가까이서 보면서 병렬은 생각했다. 어른스러운 동민이었던 만큼 그 가운데에서 잘 균형을 잡을 거라고.

    ‘그런데 오늘 본 그 녀석은 그래 보이지 않았지…….’

    몇 달 만에 만난 동민은 오히려 생각이 더 어려진 것 같았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는 점은 좋았지만, 그만큼 다른 이들과 부드러운 관계를 맺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그 점이 바로 병렬이 오늘 동민에게서 실망한 점이었다. 전부터 어른스럽던 그였기에 혼자서도 그런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바람은 틀렸던 것이다.

    동시에 그 실망감은 그 자신에게 향했다.

    동민이 아무리 싹수가 보이는 제자라고 해도 큰 사고를 당한 이후로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제대로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찔러왔다.

    그러나 그런 죄책감 속에서도 병렬의 마음속에 하나, 확실한 것이 있었다.

    “…지금은 어쨌든 저놈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수밖에 없지. 내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병렬은 걱정과 알코올 향을 담은 한숨을 다시 내뱉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한숨이 무더운 여름밤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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