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다(1)
“아 참, 감독님 성격상 괜히 이런 거 찾아가서 이야기하거나, 장진운 선수한테 감독님이 시켰다 같은 거 이야기하면 모르는 체하실지도 몰라요. 원래 좀 그런 분이잖아요.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그런 쪽을 좋아하시니까요.”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어. 어쨌든 나한테 맡기겠단 거잖아. 다 알아들었으니까 더 이야기 안 해도 돼. 좀 이따 봐.”
등 뒤에서 들리는 동민의 말에 대답하고는 명진은 고개를 돌렸다.
“저번부터 느끼지만 쟤는 거짓말 참 못한다니까.”
명진은 동민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조금 전 동민의 이야기는 거짓이 분명했다.
‘감독 그 양반이 이런 일을 시켰을 리가. 말투가 어쨌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래도 남들한테 이야기하는 걸 오히려 즐기면 즐겼지 피할 사람은 아니야. 거기다가 저번 경기 시작 전에 하던 걸 생각하면, 진운이가 정신 못 차릴 경우 더 으르렁대겠지 위로니 뭐니 할 위인이 아닌 건 너무 잘 알고 있어.’
명진은 지난 전주 드래곤즈와의 경기 직전 주안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모두들 저번처럼 허망하게 지고 싶지 않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아요. 특히…….’
주안은 그렇게 말하며 압박하듯 진운을 보았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거처럼 그러던 양반이 이번 경기에서는 위로를 부탁해? 속기에는 너무 얕은 거짓말이야. 대체 날 뭘로 보는 건지 모르겠네. 그리고 가장 문제는 앞에 나왔던 모든 걸 다 그렇다 쳐도, 적어도 그걸 걔한테 전해 달라 시키진 않았을 테지.’
명진은 동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만약 같은 이야기를 몇 주 전쯤 들었다면 어쩌면 믿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감독 그 양반이 사이가 틀어진 사람한테 그런 이야기를 할 리가 없잖아.”
자신이 본 동민과 주안의 사이는 이미 예전처럼 멀어져 있었다. 아니, 예전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좋지는 않았다. 훈련 때에 주안이 그와는 눈조차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대에게 주안이 무언가를 부탁한다는 것을 명진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걸로 하난 확실하네.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경기는 확실히 저 녀석하고 관련이 있어. 만약 감독한테 들키면 곱게 끝날 일이 아닌데도 감독이 시킨 일이라느니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한테 그런 걸 부탁할 정도로.’
저번에 느꼈던 것과 비슷하게 이번에도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그의 감은 동민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 아닌가. 이번에는 증거가 있을 수 있겠네.”
명진은 라커 룸 앞에 서서 미소 지었다.
‘여기서 감독 반응을 보면 내 생각이 맞는지 어떤지 더 명확해지겠지.’
명진은 잠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떼어 라커 룸 안으로 향했다.
“좀 늦었네요.”
라커 룸에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주안의 목소리에는 경기에서 밀리고 있다는 짜증도, 착실하게 압도하고 있던 경기에서 실수 때문에 선제골을 헌납했다는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무감정한 주안의 목소리는 오히려 어딘가 뒤로 물러서서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곧바로 나온 명진의 사과에 대한 대답도 없이 주안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경기는 따로 할 말이 없습니다. 이길 수 있는 경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요.”
주안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후반전에 있을 전술에 대해 이야기할 테니 잘 들어요.”
주안은 드물게도 손에 들고 있는 메모를 보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상대는…….”
‘정말로 별말이 없었네. 상대가 전주 드래곤즈인데 꼭 이겨야 한다는 그런 말이 없던 걸 보면 정말로 이번 경기는 어딘가 이상하단 말이지. 아니면 감독 그 양반한테 뭔가 일이 터졌거나.’
명진은 라커 룸에서 나오며 생각에 잠겼다.
라커룸 안에서 주안의 대화는 그의 예상보다 더욱 별 느낌이 없었다. 주안이 하는 말도 텅 비어있는 것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 경기에서 승패가 중요하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강동민 그 녀석이랑 감독 두 사람하고 이번 경기가 뭔가 엮이긴 엮여 있다는 느낌인데……. 지고 나면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던 저 양반이 저렇게 멍하니 있는 거나, 사이가 안 좋아진 게 뻔한 그놈이 끼어들고 있는 거나 어딘가 이상하단 말이지.’
그는 후반전 시작 전, 몸을 풀면서 더 고민해 봤지만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동민에 대해서 의심스러운 점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도 명확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저 녀석을 좀 더 지켜보면 나중에라도 뭔가 알 수 있겠지. 일단은…….”
명진은 벤치에 앉아서 무언가를 적고 있는 동민을 흘끗 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경기나 동민, 주안에 대한 것은 경기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경기장 한가운데에서 멍하니 서 있는 진운에게 향했다.
“야, 진운아.”
“어, 어?”
초조한 듯 이를 악물고 서있던 장진운은 명진의 말에 놀란 듯 펄쩍 뛰다시피 하며 몸을 돌렸다.
“아, 형 놀랐잖아요.”
평소의 그를 생각하면 꽤 날이 서 있는 듯한 반응에 명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동민의 말이 옳았다. 전반전에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플레이가 급해지던 것도, 실점 장면에 이르러서는 거의 최전방으로 공을 뿌리기만 급급했던 것도 그답지 않게 심리적인 압박을 받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놀라긴 무슨. 얌마, 너 왜 그렇게 얼어 있어?”
“응? 형 무슨 소리세요? 얼어 있기는 무슨.”
아무 것도 아닌 양 대답하는 진운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그 대답을 들은 명진은 손을 들어 진운의 어깨를 가볍게 후려쳤다.
“어휴, 멍청한 놈. 어깨에 힘부터 빼, 인마. 저번 시즌도 그렇고 저번 경기에서 진 것도 신경 쓰지 마. 그러다가 아까처럼 어처구니없는 헛짓하는 거 아냐. 마음 급해서 막 날리지 말라고.”
“악!”
자신보다 10센티미터 이상 큰 명진에게서 날아든 손바닥이 어깨를 강타하자 진운은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 진운에게 명진은 말을 이었다.
“니가 마음 급해질수록 죄다 그거에 맞춰서 움직이게 된다고. 니가 올라가면 정호랑 주성이 죄다 딸려 올라가고 수비 밸런스 개판 나는 건 알고 있잖아. 니가 마음 급하다고 막 움직이는 순간 뒤는 다 털리는 거야. 상대가 부담스러운 건 이해하겠는데 평소처럼 움직이자, 평소처럼. 응?”
명진의 말에 진운은 대답 없이 어깨를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니가 잘못했다 뭐다 하는 게 아니라, 너 그러고 어영부영 대는 게 갑갑해서 그래. 나이도 경험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왜 갑자기 회춘이라도 한 거처럼 애같이 그러고 있어?”
“…아직 회춘이란 말이 익숙할 나이는 아닌데요.”
“그럼 나는 익숙한 나이냐? 어이구, 요거 봐라?”
다시금 날아드는 명진의 손이었지만 이번에는 맞는 진운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무게감이 없었다. 잠깐 동안의 농담 따먹기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명진의 뒤에서 진운이 말했다.
“…고마워요, 형. 확실히 좀 마음이 급했던 거 같아요.”
“알고 있으면 후반전에는 좀 고쳐라. 여유를 가지고 하다 보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고. 뒤는 내가 확실하게 막고 있을 테니까 쫄지 말고 저놈들 수비 뚫을 생각만 하고 있어.”
명진은 자신의 자리에 서서 동민이 앉아있는 벤치 쪽을 바라보았다.
‘이거면 됐으려나. 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기 쉬운 것 같은데 참 어렵단 말이지. 그렇게 세대 차이니 뭐니 할 나이는 아직 아닐 텐데.’
동민은 그런 그를 보며 웃고 있는 듯했다.
‘이제 좀 정상으로 돌아왔나.’
동민은 후반전 시작 후, 성남 페가수스가 다시 아까의 경기 템포로 돌아온 것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택한 방법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것보단 주장인 오명진이 움직이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했는데, 역시 뭔가 저 사람은 꺼림칙하단 말이지. 조금 전에도 어딘가 이상한데 모르는 척해준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동민의 뇌리에는 조금 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시 동안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를 하던 명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나 거기에서 더 이것저것 따져 물을까 봐 뒤에 이어나갈 거짓말들을 더 생각해 내던 동민이었지만, 명진은 곧 흔쾌히 그 말을 받아들이고 움직인 것이다. 마치 동민이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알고도 속아준다는 것처럼.
“정말로 눈치채고도 움직인 건 아니겠지… 저번 일도 그렇고 어딘가 말하는 게 떠보는 느낌이란 말이야.”
동민의 마음속에서 아까와는 다른 색의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과 주안에 대한 일을 그가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알게 되면 일이 어떤 식으로 굴러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다른 위험 인자 없이 주안과의 1 대 1, 아니, 수연까지 합해서 2 대 1의 구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뭐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니까. 지금은 이 경기부터 뒤집는 게 우선이야.”
동민은 다시 제 컨디션을 찾은 진운이 마법 같은 찬스들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라운드에 시선을 집중했다.
“다시 안정적으로 변했나. 하프 타임에 한 소리 먹어서 일시적으로 그런 건지, 아니면 전술 자체가 급했던 건지.”
홍진은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다시 여유 있게 공을 돌리는 성남 페가수스의 모습에 중얼거렸다.전반전 막바지로 갈수록 어딘가 급박해져서 무리한 롱패스를 남발하던 진운의 모습은 그에게는 충분히 노릴 수 있는 빈틈이었고, 이는 선제골로 이어진 찬스가 되기도 했다.
‘이제 와서 다시 평상심을 찾으려고 해봐야 한 점 뒤지고 있는 현실이니 곧 다시 흔들리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급박해지는 쪽은 저쪽이니까 잘만 막으면서 틈을 본다면 이번 경기에서 대량 득점을 올릴 수도 있겠어.’
오랜만의 대량 득점으로 사기를 올릴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FA컵이라고 해도 약팀을 상대하는 것이 아닌, 강팀이라고 부를 만한 성남 페가수스를 상대로 대량 득점을 올리는 것은 리그 선두권 경쟁을 잘 헤쳐 나갈 기폭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나오나 두고 봐야겠어. 언제까지 여유 있는 척 공을 돌리며 공격을 주도해 갈 수 있을지… 마음이 급해져서 또다시 허둥지둥 하는 순간이 반격할 순간이다.’
홍진은 조용히 눈을 빛내며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경기는 아직도 45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