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민의 해답(1)
‘아무리 연습을 했어도 불안한 건 매한가지야. 감독님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경기 시작 직전, 성남 페가수스의 미드필더 이주성은 긴장된 얼굴로 센터서클에 놓인 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처음에는 몸이 굳어 있다고 해도 경기가 시작하면 어느새 금세 긴장이 풀리는 그였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저번에는 밑에서부터 풀어주면서 아래로 내려가서 공을 받으라더니 오늘은 아예… 됐다. 이제 와서 더 생각해 봐야 뭐 하겠어. 그동안 연습했으니까 박살이 나도 해봐야지 뭐.’
경기장에 울리는 심판의 휘슬 소리를 들으며 주성은 체념하듯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에서 힘을 뺐다. 오늘은 부진한 모습을 보여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이 되려 그에게 쓸데없는 힘을 빼게 만든 것이다.
오늘 그가 맡은 역할은 전과 같은 중앙 미드필더도, 수비형 미드필더도 아닌 센터백이었다.
[이주성]
25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1.2/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7.4/20
선호하는 플레이: 수비의 틈 사이로 침투, 정확한 슈팅 선호
특성:
장점 - 넓은 시야, 정확한 패스
단점 - 느린 판단력
현재 컨디션: 7/10
‘보아하니 컨디션도 괜찮아 보이고. 시작부터 불안한 모습은 안 보이겠네.’
동민의 눈은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성남 페가수스 측의 수비진으로 향해 있었다. 평소라면 오명진과 유민성, 그리고 황석우나 이정호로 구성되어 있을 쓰리백은 오늘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좌측의 이주성, 중앙의 오명진, 우측의 이정호로 평소 주전 수비진에서 남아 있는 것은 주장인 오명진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동민이 내놓은 해결책 중 하나였다.
‘장진운하고 이정호 두 명을 함께 투입시켜서 패스 루트를 만든다는 감독 생각은 나쁘지 않았어. 다만 두 명이라면 결국 인원수에서 모자란다는 걸 몰랐던 거지.’
동민은 이주성과 이정호가 번갈아 올라가면서 상대 수비가 흐트러뜨리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번 성남과 전주의 경기에서 손홍진이 노린 것은 이정호가 위로 올라오는 타이밍이었다. 조금 더 체격이 좋은 주형규로 장진운을 견제하면서 안대민으로 하여금 이정호를 방해하는 동시에 역습 시에는 그의 뒤 공간을 노리게 한 것이다.
‘이번에는 이주성과 이정호 두 명에 장진운까지 셋, 저번처럼 한 명씩 붙이면서 역습을 노리기는 어려울 거다.’
이정호와 장진운, 이주성까지 셋 중 둘을 막아낸다고 해도 틈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 동민이 지금까지 센터백을 서본 적 없는 이주성을 아래로 내린 이유였다.
“어디 한번 머리 싸매고 고민해 보시지.”
전반전 10분, 현재까지는 확실하게 경기를 리드해 가는 성남 페가수스의 모습에 동민의 입가에는 도발적인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저번 경기보다도 더 공격적으로 나왔나. 흠…….’
홍진은 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공을 가지고 경기를 주도해 나가는 상대를 보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성남 페가수스는 마치 저번에 있던 패배는 공격에 무게를 둔 것이 패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처럼 초반부터 두 센터백까지 번갈아가며 공격에 참여시키고 있었다.
‘막아내는 게 골치가 아프기야 하겠지만 오히려 위험성을 더 커질 텐데. 경기 초반부터 저러다가는 후반부에 집중력 모자라는 순간을 노리기 쉽다. 저번 경기에서 지고 약이라도 바짝 올라 있는 건지, 아니면 포기에 가까운 만용인 건지 알 수가 없어.’
선제골을 넣고도 역전당한 일 때문에 성남이 더 안정성을 중요시하는 게임을 펼칠 거라는 그의 생각과는 다른 상대의 모습에 홍진은 당황하고 있었다.
‘저번처럼 잔꾀라도 부리려는 건지 대놓고 수비에 허점을 두고서 공격을 진행하려 하는데 이걸 노려야 하는 건가.’
지금 그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낚시꾼이 던진 미끼와 같았다. 홍진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눈앞에 보이는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데 주력할 것인지, 아니면 평소처럼 수비에 치중하는 경기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결국 그의 선택은.
‘…아니, 언제나 해야 할 일은 같다. 뚝심 있게 계속 생각한 대로 밀어붙인다. 상대가 아무리 화려한 경기력을 뽐내며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아도 우리는 우리대로 묵묵히, 열정적으로 막아내고 반격한다. 이건 언제나 바뀌지 않아.’
홍진은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독님 이번 경기 전술은 확실히 평소 같지 않단 말이야.’
성남 페가수스의 주장인 오명진은 안대민을 노리고 날아드는 롱패스를 머리로 걷어내며 생각했다. 이번 경기에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단 한 가지였다. 급박할 때에는 앞쪽에서 패스를 뿌리고 공을 돌리는 이주성과 이정호의 후방 커버, 그리고 안대민을 집중적으로 마크할 것. 다른 선수들은 놓쳐도 안대민만큼은 확실하게 막아내라는 주문이었다.
그의 존재가 바로 동민이 생각한 두 번째 조건인 상대 역습차단에 대한 답이었다. 발밑은 좋지 않지만 풍부한 경험과 피지컬을 가지고 있는 명진은 위쪽으로 올라가는 두 사람의 커버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선수였다.
게다가 상대의 투톱 중 결국 마무리를 짓는 것은 대부분 주형규가 아닌 안대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동민에게는 당연한 조치이기도 했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나서진 않을 텐데.’
자신이 머리로 걷어낸 공을 잡고 다시 공을 주고받는 주성과 정호, 진운을 보면서 명진은 어딘가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평소의 주안이라면 공격 루트를 더 만들어야 한다고 해도 이주성을 센터백으로 쓰는 무리수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에 하나 그런다고 해도 이주성과 이정호라는 확실하게 공격에 치중된 수비진은 지금껏 밸런스를 기초로 하는 게임의 지배를 말하던 그의 전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예전에 비슷한 일이 없진 않았던가.’
명진의 머리에 스쳐 지나간 것은 시즌 전에 있었던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경기로, 장진운 대신 이주성과 이정호 두 명의 투입으로 공격 전개를 했던 경기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공격에 모두 거는 전술은 아니었지만 지금과 비슷한 점이 많았어. 포지션의 변경이라든가 생각 못 했던 전술 같은 걸로.’
그 경기는 그전까지 공격형 미드필더나 벤치에 있었던 이주성, 그리고 태클이 능숙하지 못해 로테이션 멤버에 불과했던 이정호의 극적인 변화로, 선수들로 하여금 충격처럼 다가온 경기였다.
‘변화의 중심에 선 같은 두 선수, 상대의 예상을 뒤엎은 포지셔닝. 이거 혹시…….’
순간적으로 명진의 머릿속에서 젊은 전술 담당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지워졌다. 얼마 전까지 심복처럼 보이던 동민의 모습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감독에게 무시를 당하는 동민이 이런 계책을 짜낸다 해도 분명 주안이 써먹을 리가 만무했다.
‘팀 훈련 때 티를 안 내려고 하는 것 같아도 딱 보면 보이니까. 다른 애들이면 모를까 나한테까지 티가 안 날 순 없지. 아니, 눈치 빠른 애들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으려나.’
전에는 훈련 때마다 동민과 상의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던 주안이었지만 언젠가부터 훈련장에 동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일이 는 것이다. 게다가 동민은 훈련장에 와도 예전처럼 주안과 붙어서 상의하는 모습은 없고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적거나 수연과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둘이 무슨 일이 있던 건가. 뭐 감독님 성격상 자기한테 한번 안 맞으면 난리 치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그는 이번엔 땅에 깔려 날아오는 패스를 끊어내면서 동민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었다. 지금 전술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이 경기를 이겨야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 그런 걸 생각하는 건 경기 이후다. 딴생각하다가 내가 실수하는 순간 팀이 무너질지 몰라.’
이정호와 이주성,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서면서 공격을 지원해줄 수 있는 것은 뒤에 버티고 있는 그가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단 한번이라도 실수하는 순간 곧바로 위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명진은 잘 알고 있었다.
‘약간의 실수도 나와선 안 돼. 내가 뚫리는 순간 골키퍼와 1 대 1이 되어버려.’
명진은 이를 악물고 다시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오명진이 아니었다면 시도해 볼 수조차 없던 전술이야.’
동민은 최전방으로 이어지는 몇 번의 패스를 모두 완벽하게 끊어내는 명진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오명진의 존재는 밸런스가 앞쪽으로 쏠린 성남 페가수스가 어떻게든 경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
‘많은 경험으로 다져진 침착성과 부담을 이겨내는 여유, 안대민 한 명 정도야 확실하게 막아낼 수 있는 수비력, 거기에 주장으로서 책임감까지 있으니 지금 저 위치에서 오명진만큼 해줄 사람은 없겠지.’
동민이 공격에 힘을 쏟으려 할 때 가장 고민했던 두 가지 과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기 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결국 그가 찾은 해답은 장진운과 이정호 두 사람에게 붙은 압박을 줄여줄 파트너를 찾는 것과 그만큼의 수비 부담을 대신 짊어져 줄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었다.
첫 번째는 예전에 공격형 미드필더나 중앙 미드필더를 맡았던 이주성이 센터백이라는 생소한 위치에 얼마나 적응을 할 수 있느냐, 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했지만 두 번째는 달랐다.
‘오명진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까 다른 대안을 찾을 필요도,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도 없지. 장점은 극대화시키고 단점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역할이니까.’
오명진의 단점은 패스와 개인기라는 것을 동민은 잘 알고 있었다. 공격수가 달라붙었을 때 혼자서 공격수를 제치는 일이나, 깔끔한 패스로 전방에 공을 전달하는 일은 그에게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모두 지금 명진의 역할과는 관계가 없었다.
T3T
‘달라붙을 수 있는 상대 공격진은 해봐야 안대민 하나, 패스를 받을 수 있는 동료가 넘치는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지. 그리고 전방에 패스를 넘기는 일은 이정호, 이주성, 장진운 세 명이 있으니 오명진이 신경 쓸 일도 없고. 자기 장점인 수비력만 확실히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나머지 두 센터백의 수비 부담을 안고서도 자신의 예상 이상으로 안정적인 명진의 모습을 보면서 동민은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그의 장점을 생각하고 그 자리를 맡아주길 바랐지만 그는 정말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경기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남은 건 골을 만드는 것뿐이야. 골 없이 이런 상황만 지속되다가는 결국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지치는 건 우리 쪽일 거야. 반대로 골이 들어가면 분명히 이 경기는 우리에게 기운다.’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그라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