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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부딪치는 두 명의 지략 (86/270)
  • 맞부딪치는 두 명의 지략

    “전반전에 상대 공격을 큰 위험 없이 막아낸 건 수고했다. 하지만 후반전에도 실수 없이 제대로 막아내야 해. 알아들었지? 저번 상하이 전이나 안양 전처럼 마지막에 가서 집중력 흐트러지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이 말이다.”

    “네!”

    홍진은 전반전 동안 상대가 슈팅은커녕, 공격다운 공격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아낸 선수들을 칭찬하면서도 내심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홍진이 보기에 성남 페가수스가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한 것은 전주 드래곤즈의 수비도 수비지만 본인들 스스로가 공격에 대해서 큰 열망을 보이지 않은 결과라 생각했다.

    저번 시즌 맞대결에서는 어떻게든 전주 드래곤즈의 수비를 뚫어보려는 노력이 도리어 화가 되어 무너진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성남도 무리해서 공격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다른 선수들보다도 장진운, 성남 공격의 시작과 중간을 동시에 떠맡는 저 괴물이 별로 앞쪽으로 나오질 않는단 말이지.’

    전반전 내내 홍진의 눈은 다른 이들보다 장진운에게 향해 있었다. 지난 두 번의 경기에서는 어떻게든 혼자라도 뭔가 만들어보려던 모습을 보이던 그였지만, 오늘은 혼자서 만들기는커녕 전진패스 시도조차 줄어 있었다. 전반전 내내 진운의 패스는 대부분 전방이 아닌 후방과 측면을 향해 있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저놈의 전방 패스에 대한 대비를 설렁설렁 하기라도 하면 단 한순간에 수비진 사이를 뚫고 패스가 날아와 골문을 위협할 수 있다는 거지. 중원에서 패스만 돌리고 있어도 골치 아픈 놈이야.’

    결국 고민을 하던 홍진은 선수들에게 따로 변화를 주문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대로 후반전을 맞이했다. 원정 경기인 이상 상대가 공격에 욕심 부리지 않고 소극적으로 나온다면 그건 그것대로 전주 드래곤즈에게 나쁘지 않은 결과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비기면 그대로 2위 자릴 수성할 수 있으니 비기는 것도 나쁘진 않아. 급한 건 저쪽이지 우리가 아니니까.’

    홍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음을 가라앉혔다. 상대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의 생각대로라면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비기는 것까지 가정하면서 안정적으로 경기를 이끌고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은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 우리가 싫어할 일은 아니지.’

    “전반전에 제대로 풀리지 않아 그리 마음에 들진 않겠지만 수고했어요.”

    주안의 말에도 성남 페가수스 선수들의 표정은 굳어진 채 풀리지 않았다. 대부분 지겹도록 끈질긴 전주 드래곤즈의 수비에 지친 표정이었다. 단 한 사람, 진운만이 가만히 앉아 주안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럼 이제 후반전에는 분위기를 바꿔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서 진운 외의 다른 사람들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주안의 입가에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미소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 그들을 모르고 있었다.

    하프타임이 끝나고 벤치에 앉아 기다리던 동민은 이내 나오는 선수들의 얼굴을 보고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교체?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그것도 공격 쪽 자원도 아닌 이정호라고?’

    동민이 다시 한 번 확인해도 라커룸에서 나와 성남 페가수스의 수비 진영을 향하는 선수는 이정호였다. 그제야 그는 전반전부터 이어지던 퍼즐이 맞춰지듯 주안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저 인간 안정성을 위해 공격을 포기한 게 아니었구먼. 후반전에는 아예 장진운을 방패로 삼고 이정호를 위로 올려서 패스를 찔러 넣겠다는 뜻이겠지.’

    전반전 내내 장진운이 후방에 내려앉아 공을 돌리게 한 것도 단순히 역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장진운을 미끼로 쓸 수 있는지 이정호를 투입하기 전에 미리 시험해 본 거겠지.’

    전진 패스를 하지 않고 볼을 돌리기만 하는 장진운이라도 전주 드래곤즈는 계속해서 대비를 할 수밖에 없다. 한순간이라도 노마크로 그대로 두었다간 금세 돌변해서 전진 패스를 뿌리거나 직접 끌고 들어올 위험성이 있는 선수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진운이 계속 뒤로 살짝 처져서 공을 돌리고, 전반전 동안 쉬어서 체력 든든한 이정호를 넣어서 전후방을 뛰어다니게 하겠단 거지. 계속 어슬렁거리는 장진운에 신경 쓰다가는 오락가락하는 이정호를 놓칠 수 있고, 반대로 이정호한테 투톱 중 한 명을 붙이자니 장진운에 대한 대비가 소홀해진다. 둘 중 뭘 골라도 골치 아프겠네.’

    동민은 주안의 성격이 그대로 그러나는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정호 시프트는 내가 이야기한 건데 상대 수비를 휘저어 흐트러뜨릴 방법만 생각하다가 정작 내가 잊을 뻔했네. 확실히 이거라면 먹힐 수도 있겠는데.’

    동민은 가만히 앉아 곧 시작될 후반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반전 동안 미리 시험해 보길 잘했어.’

    주안의 입가에는 보기 드문 큼지막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대로, 그리고 동민의 예상대로 생각지 못했던 이정호의 존재에 전주 드래곤즈의 그물 같은 수비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공을 잡고 돌리는 장진운을 막으려하면 뛰어나오는 이정호가 있었고, 반대로 장진운에게 붙던 주형규나 안대민 중 한 명을 이정호에게 붙이자니 아래쪽에서부터 공을 연결하는 장진운을 마크할 사람이 없었다.

    주안이 노리던 그대로 상대는 후반전이 시작되고 늘어난 수비 대상과 경기 템포에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한쪽 끝부터 풀어지던 그물은 결국 찢어지고 말았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없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주안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질 무렵, 선제골이 터졌다.

    장진운에게 붙어야 할 주형규가 이정호 때문에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으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장진운의 마크가 비어버린 것이다.

    ‘징그럽게 달라붙지만 않으면 찬스는 만들 수 있어!’

    진운은 전반전 내내 시달리던 울분을 풀 듯 곧바로 최전방까지 긴 패스를 날렸고 그 패스는 절묘하게 수비수와 골키퍼의 사이로 떨어졌다.

    ‘저런 걸 제일 주의하라고 한 건데 결국은…….’

    홍진은 상대 공격수가 가볍게 진운의 패스를 밀어 넣으며 마무리를 짓는 것을 보고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장진운이 단 한 번의 찬스만 생겨도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경기 전부터 그렇게 말했지만 갑자기 바뀐 상대 수비수에 순간적으로 그를 놓쳐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곤란해지는데… 대응이 너무 늦었나. 일단 지금이라도 빨리 이야기해 두는 수밖에 없어.’

    홍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곧바로 손을 들며 안대민을 불러들였다.

    ‘그렇지!’

    한편 주안은 한순간에 선제골이 나온 것을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대로 느릿느릿하던 전반전의 페이스에 익숙해져 있던 상대는 이정호를 투입하며 순식간에 템포를 끌어올린 성남의 공격에 당하고 만 것이다.

    ‘이대로만 가면 저 꼴도 보기 싫은 놈들을 눌러줄 수 있어. 거기다가 강동민 그 머저리 같은 자식이 옆에서 끼어들지도 않았으니 순전히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어!’

    주안은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웃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지금의 이정호를 만든 것이 동민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두 번이나 패배를 안겨준 전주 드래곤즈를 자신의 지략으로 제압한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는 이제 이 경기는 틀림없이 자신과 성남 페가수스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중앙에서 계속해서 상대를 위협하는 장진운의 존재, 상대의 빈틈을 노리고 달려 나오는 이정호의 날카로운 패스, 이정호의 투입과 함께 흔들리는 상대의 수비.

    모든 것이 성남 페가수스의 승리를 확신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길게 퍼져가는 주심의 세 번의 휘슬 소리가 지났지만 주안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멍하니 그라운드를 바라보다가 눈을 돌린 그에게 경기 결과가 적혀 있는 전광판이 보였다.

    2 대 1. 그 것이 성남 페가수스의 승리라면 그의 생각대로 된 것이겠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그 것이 아니었다. 후반 28분, 37분 전주 드래곤즈의 안대민에게 연속 골을 허용한 성남 페가수스는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이런…….”

    충격에 빠져 앉아 있는 그에게 손홍진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안은 눈을 내리고 그에게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고 다시 홍진의 얼굴을 보았다. 홍진은 이겼다는 사실에 대한 감흥도, 역전패를 당한 주안에 대한 감정도 없는 무표정으로 그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 새끼가…….’

    주안의 입속에서 이를 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홍진은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로 계속 손을 내밀었다. 결국 주안은 참지 못하고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밀치고는 빠르게 멀어져갔다.

    주위에 있던 성남 페가수스의 스태프들이나 선수들까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정작 홍진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아무 말 없이 전주 드래곤즈 측의 벤치로 돌아갔다.

    한편 동민은 그런 광경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선제골을 넣은 시점까지 나도 분명히 우리 팀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상황을 곧바로 파악하고 그걸 뒤집어버릴 줄이야.’

    그는 프리시즌에 있었던 전주 드래곤즈와 상하이 레인저스의 경기 이후 또 한 번 홍진을 보면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이정호의 오버래핑을 십분 활용하면서 상대의 압박 수비를 흔드는 선택을 확실히 유효했다. 딱 하나 위험한 점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정호가 올라가려고 할 때 잠깐이지만 수비에서 커버가 늦어버리면 구멍이 생긴다는 것인데 그걸 바로 파고들었어.’

    선제골을 허용한 전주 드래곤즈의 전술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홍진은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그물 자체를 버리지 않고 일부분만 수정했을 뿐이었다.

    그 부분은 바로 공격진으로, 지금껏 두 명이 번갈아 가면서 한 명은 최전방 수비진 옆으로 나가고 다른 한 명이 압박을 하는 형태로 바꾼 것이다.

    ‘주형규가 장진운에게 집중하고, 안대민이 내려오는 일 없이 이정호 쪽에 바짝 붙어 있다가 그 구멍을 파고든 거지.

    전주 드래곤즈의 두 번의 골 모두 이정호가 전방으로 나갈 때 생긴 구멍에 발 빠른 안대민이 파고들어서 생긴 찬스였다. 다시 막아야 할 지역과 선수가 명확해지자 그들의 수비는 선제골 이후 조금 느슨해졌던 성남의 패스를 끊어내기 시작했고 이는 곧 안대민에게 연결되어 연속 골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구멍을 곧바로 알아채고 거기로 역습이라. 진짜 무섭다, 무서워.’

    동민은 얼마 뒤에 있을 전주와의 FA컵 경기가 더욱 걱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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