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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과 변화 (85/270)
  • 고집과 변화

    “이번 경기는 특히나 절대 지면 안 되는 경기입니다. 그 이유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주안의 말에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머릿속에는 지난 시즌 있었던 두 번의 경기 결과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상대의 그물 같은 수비망에 장진운이 꽁꽁 묶이고 아래로 내려앉아, 공을 가지고만 있었지 정작 제대로 된 공격은 하지 못한 채 역습에 패배했던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팀 컬러 그대로의 대결에서 졌던 안양 타이거즈와의 대결보다도 더욱 허무했던 패배였기에 그들은 분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저번처럼 허망하게 지고 싶지 않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거예요. 특히…….”

    거기서 주안은 말을 끊고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진운이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난 경기에서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는 후회와 주안의 무언의 압력에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번 경기에서 이겨야만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얼마 후에 있을 FA컵 8강전의 상대 또한 전주 드래곤즈니까 이번 경기에서까지 진다면 그때까지 영향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 꼭 이기길 바랍니다.”

    주안은 그렇게 말을 마치면서 먼저 벤치에 나가 있을 동민을 떠올렸다.

    ‘오늘의 리그 경기는 얼마 후에 있을 FA컵 8강전의 전초전과도 같다. 그놈은 다 알면서 나한테 내기를 하자고 한 거겠지. 영악한 새끼.’

    실제로 주안이 FA컵 8강전 전에 전주 드래곤즈와의 리그 경기가 있고, 그것이 동민에게 있어서 참고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동민과의 내기에 응하고 며칠 후의 일이었다. FA컵 상대를 몰랐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서 있었던 동민의 도발과, 동민에 대한 주안의 무시가 합쳐져 평소라면 없었을 실수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아니, 실수라고 해봐야 별로 달라질 건 없어. 나조차도 쉽지 않은 일을 저놈이 본다고 될 리가 없고, 그래 봐야 8강전일 뿐이야.’

    주안은 애써 동민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눈앞의 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동민에 대해 신경 쓰느니 저번 시즌에 두 번이나 자신의 자존심을 정면에서 짓밟았던 전주 드래곤즈와 손홍진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 몇 배는 더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경기지 그 멍청한 놈이 아니야.”

    주안은 그렇게 되뇌며 라커 룸을 뒤로했다. 꾹 쥔 그의 손에서는 축축한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같은 시각, 전주 드래곤즈의 감독인 손홍진은 선수들을 보면서 마지막 작전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쪽 전술은 별거 없어. 수비 쪽에서 공 받고 장진운한테 넘겨줄 거고 그놈부터 공격 시작이야. 장진운 안 막았다가는 다 박살 날 줄 알아라. 아무리 공간 안 주고 빽빽하게 서 있어도, 그 사이로 찔러 넣어주고도 남을 놈이니까 확실히 막아. 알았지? 위로 올라오면 중앙에서 아예 싸 먹어버리고 뒤로 물러나도 아예 힘 못 쓰게 대민이랑 형규 니네 둘이서 번갈아가면서 쪼으라고. 알아들었어? 정신도 못 차리게 계속 눌러대란 말이야.”

    “네!”

    홍진은 손짓 발짓을 섞어가면서 선수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그만큼 홍진은 장진운이야말로 성남 페가수스를 상대할 때의 가장 큰 위험 요소라고 생각했다.

    ‘장진운이라는 에이스가 있는 점이 저쪽의 양날의 칼이나 다름없다. 장진운이 패스를 못 뿌리고 다니게 만들면 우리의 승리, 멋대로 설치고 돌아다니도록 만들면 우리의 패배. 언제나 그랬지만 성남과의 경기는 간단해.’

    그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장진운은 성남 페가수스가 추구하는 축구의 핵심 그 자체였다.

    “우리는 프리 시즌에 그 유명한 웨인 베인스까지 묶어놨던 팀이다. 근데 하물며 정규 시즌도 반 정도 지났고 상대는 웨인 베인스 하고는 말도 안 되게 차이 나는 놈이다. 아무리 상대 홈이라지만 뚫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아닙니다!”

    홍진의 말에 전주 드래곤즈 선수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홍진은 속으로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짐짓 굳은 얼굴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확실하게 해라. 알았지?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수들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 라커 룸을 가득 채웠다.

    ‘좋아, 이 분위기만 본다면 이번 경기도 쉽게 무너지진 않겠어.’

    먼저 라커 룸을 나서는 선수들의 뒷모습을 보며 홍진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는 전술의 창의성이나 변화가 뛰어난 감독은 아니었다. 감독으로서 아직은 어린 나이에 더 가까운 그지만 변화무쌍한 전술을 선보이며 팬들의 눈을 사로잡는 축구를 선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주안처럼 선수 시절에 꽤나 명성을 떨치던 선수도 아니었다. 그저 K리그 중하위권 팀들을 오가며 오래된 팬들에게서나 가끔 그런 선수도 있었다며 이야기가 나오는 정도였다.

    그러나 손홍진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그런 자신의 특징을 강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전술의 창의성이나 부족한 점은 오히려 큰 실험 없이 팀을 한 가지 특징을 가진 팀으로 만들었고, 그만큼 선수들도 혼란을 겪지 않고 그의 전술에 적응할 수 있었다.

    큰 명성 없이 여러 하위권 팀들을 오갔던 경험은 그만큼 많은 선수들을 만나며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행동해야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지 깨닫는 초석이 되었다.

    선수로서 코치로서 부족했던 부분들이 오히려 지금 그를 만들어가는 재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뚝심 있게 계속 생각한 대로 밀어붙인다. 상대가 아무리 화려한 경기력을 뽐내며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아도 우리는 우리대로 묵묵히, 열정적으로 막아내고 반격한다. 이건 절대 바뀌지 않아. 누구를 상대하든, 이것만 철저히 지키면 후회할 경기는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 중년의 감독은 매 경기마다 다시 하는 다짐을 마음속에 새기며 그가 있을 장소로 향했다.

    ‘이번 경기에서 확실하게 전주 드래곤즈를 꺾을 수 있는 비책을 마련해야 해. 감독 그 인간이 성격은 어쨌든 아예 실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두 번이나 비슷하게 당한 것을 생각하고 보완해서 나오겠지. 그걸 보고 참고해야 해.’

    동민은 입장하는 양 팀 선수들을 보면서 두 눈을 고정시켰다. 경기 시작 전 발표된 선발 명단에 따르면 양 팀 모두 선발 로 나온 선수들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렇다면 달라진 것은 분명 그 선수들을 활용하는 방법일 거라며 동민은 반짝이는 눈으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심판의 휘슬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자 그는 재빠르게 양 팀의 진영을 훑었다.

    “응? 양쪽 다 크게 변화된 게 없어?”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신들의 장기로 지금껏 성남 페가수스를 꺾었던 전주 드래곤즈는 그대로 나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주안조차 평소와 같은 전술을 들고 나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한 상대한테 두 번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박살 난 전술을 또 들고 나온다고? 고집인 거야, 아니면 미련한 거야? 아무리 고집불통이어도 그래도 이렇게 미련한 사람은 아닐 텐데, 무슨 생각이지?’

    동민은 슬쩍 눈을 돌려 주안을 바라보았지만 주안은 동민의 시선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평소와 같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늙다리 독수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조금 더 보다보면 알겠지.’

    동민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눈을 돌렸다. 주안이 고집을 부리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뭔가가 바뀌어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진짜 얘네는 만날 때마다 끔찍하네. 위쪽에서 공을 잡을 때는 숨도 못 쉬도록 에워싸고, 그렇다고 내려오면 공격수가 번갈아 가면서 달라붙고. 어디서 공을 잡든 귀신같이 달라붙는다니까.’

    진운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공을 잡는 순간 상대 공격수가 달라붙는 것을 겨우 제쳤지만, 그 탓에 원래 패스를 내주려던 전방이 아닌 다시 후방이나 측면으로 공을 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벌써 몇 번이나 상대 수비를 벗겨 내거나 끌어당겨서 무너뜨리려 애를 써봤지만, 그들은 진운이 들어오면 에워싸면서도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우리도 수비 간격 훈련을 해도 어느 정도 틈은 생기기 마련인데 얘네가 이러는 건 진짜 군인 같다니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뚫고 들어오려 하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볼을 탈취하고, 수비를 끌어올려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공을 돌려도 따라오지 않는다. 경기가 시작하고 내내 계속된 상대의 수비에 진운은 벌써부터 지칠 것만 같았다.

    ‘아냐. 감독님이 전반전에는 최대한 상대 앞에서 움직이라고 하셨으니까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지난번과는 다를 거라고 했으니까.’

    그런 진운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까 몸을 풀고 있던 그에게 주안이 한 말이었다.

    ‘전반전에는 확실한 전진 패스를 내지 못해도 좋다. 오히려 무리한 패스로 상대에게 공격권을 내주지 않도록 해라. 위험한 장소에서 공을 뺏기지만 않게 너무 올라가지 말고 계속해서 후방과 측면으로 공을 보내고 받으면서 상대 수비의 이목을 집중시켜라. 그게 감독님이 주문한 것이었으니까 분명히 생각이 있는 거겠지.’

    진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공을 돌리는 일에 집중했다.

    ‘확실히 장진운이 플레이하는 걸 보면 뭔가 생각이 있긴 있는 모양인데. 그게 뭔질 모르겠어.’

    동민은 그런 진운을 보면서 고민하고 있었다.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명단과 전술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운의 모습을 보고 그 생각을 수정했다.

    지난 시즌 성남 페가수스와 전주 드래곤즈와의 경기를 보았을 때 진운은 계속된 상대의 수비에 냉정함을 잃고 말았다.

    그는 혼자서라도 풀어보려 무리하다가 평소 그라면 저지르지 않을 실수까지 저지르며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움직임은 그때와는 달랐다. 여전히 튼튼한 전주의 수비 블록 앞에서 진운은 전방으로 무리한 패스도, 직접 뚫어보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비교적 뒤쪽에 머물면서 공을 돌리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홈경기인데도 그냥 무리하지 않고 안 되겠으면 무승부라도 노리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이러면서 전주의 수비진들이 끌려 올라오길 기다리나? 볼수록 뭔가 생각은 있다는 걸 알겠는데…….’

    전보다 더욱 신중한 성남의 움직임에 동민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런 동민의 의문은 결국 전반전 내내 이어졌고, 그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주심의 휘슬 소리와 함께 전반전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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