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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내기 (83/270)
  • 두 사람의 내기

    “그 빌어먹을 어린 새끼가……”

    잔뜩 구겨진 종이가 주안의 손 안쪽에서 조금씩 찢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안에게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그를 능멸하듯 말하던 동민의 모습만이 되풀이하듯 계속해서 떠올랐다.

    “감독님, 저랑 내기 하나 하시죠. 저번에 했던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동민의 말에 주안은 화조차 내지 못하고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런 주안의 표정을 즐기듯 미소를 띤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동민은 재차 말을 꺼냈다.

    “아, 물론 제가 팀에 남느냐 안 남느냐 하는 걸로 내기하자는 게 아니에요. 저는 감독님이 해고를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무조건 이번 시즌이 끝나는 대로 팀에서 나가겠습니다. 적어도 시즌이 끝나고 나가는 편이 단장님이나 구단 윗분들이 보기에도 이상한 점이 없을 것 같으니까요.”

    동민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듯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주안을 보며 설명하듯 말했다.

    “그리고 팀을 나가면서 절대 아까 이야기했던 소문에 대해서 흘리지 않을게요. 이 두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뭘 어쩌겠다는 건지 설명해.”

    주안의 말에 동민은 가볍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했다. 수연에 대한 유치한 따돌림을 그만두어 달라는 것.

    그에 대한 조건은 동민이 남은 FA컵 경기를 맡아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그 경기들의 지휘는 주안이 하는 것으로 하고 그 공로 또한 전부 주안에게 넘기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실패할 시에는 그 순간 동민 자신의 해고는 물론, 앞으로 이 프로 무대에서 코치로서 살아가지 못할 정도로 소문을 내든 어쩌든 상관없다는 것.

    반대로 동민이 FA컵을 우승으로 이끌었음에도 수연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동민도 주안에 대해서 곧바로 이야기를 털어놓고 다닐 거라는 이야기였다.

    “…미친 새끼.”

    동민의 제의를 들은 주안의 첫마디는 욕설이었다. 주안이 생각하기에 이런 제의를 하는 동민의 머리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FA컵은 축구 협회에 등록된 프로, 아마추어 팀들을 통틀어 최고의 팀을 가리는 자리다. 물론 아마추어 팀들이나 실업팀, K2 리그 팀들이 나와 돌풍을 일으킨다고 해도 결국 마지막은 K리그 팀과의 실력 차를 뒤집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요 몇 년간, 아니, 더 넓게 봐도 K2 리그 팀이 FA컵에서 우승한 적은 내 기억 상 없다. 훨씬 예전 기록으로 눈을 돌리면 모를까.’

    얼마 전 성남 페가수스도 FA컵 16강전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상대는 실업 팀이었다. 그러나 이제 남은 8강전부터 만날 수 있는 상대들은 이미 K2리그의 상위 리그인 K리그 팀들이거나 K2리그에서도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었다.

    ‘그런 FA컵에서 지가 우승을 차지하게 만들겠다고? 8강전도 힘들 텐데. 이 새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야. 몇 번 지가 생각한 게 먹히고 저번 경기 준비를 지가 해보더니 자만심이라도 잔뜩 들어버린 건가.’

    K리그 팀들이라도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것은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리그가 오래도록 이어지는 마라톤이라면, FA컵은 한 번의 실수가 곧장 끝으로 이어지는 단거리 경주나 권투 시합과도 같았다. 그러나 동민은 그런 대회에서 자신이 우승을 차지하면 수연에 대한 태도를 고쳐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뭐라고 말을 하든 제 제안은 바뀌지 않아요. 내기, 하실래요?”

    동민의 재촉하는 말에 주안은 다시 말없이 생각해 보았다. FA컵에서 동민이 우승에 실패할 경우, 주안은 곧바로 동민을 내칠 수 있었다. 수연에 대한 태도를 바꿀 필요도 없이 따로 조건에 들어가 있지 않은 이상 오히려 내쳐도 상관없으리라.

    반대로 동민이 FA컵을 우승한다면 주안은 FA컵 우승이라는 실적으로 구단에서 자신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수연에 대한 태도를 고쳐야 하겠지만 골치 아픈 동민이야 어차피 시즌이 끝나는 대로 나가기로 한 이상 적당히 상대하는 척만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우승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주안이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이쯤 되자 오히려 동민이 어째서 스스로에게 얻는 것은 적고 리스크는 큰 내기를 하자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주안이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그것을 물어보자 동민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런 거 아니면 받아들일 마음 없잖아요? 말했다시피 이야기를 터뜨리는 건 저로서도 마지막에나 선택할 만한 거지 웬만하면 피하고 싶거든요.”

    동민의 말에 주안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민했다.

    ‘확실히 나한테 리스크는 거의 없다시피 하는 내기다. 따지고 보면 이놈이 더 효율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걸 내버리면서까지 이 내기를 하자고 하고 있어. 자신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가능한 한 한수연한테 안 좋은 영향이 갈 만한 건 피하고 싶어서?’

    한동안 고민을 하던 주안에게 다시금 동민의 말이 날아왔다.

    “어떻게 하실래요? 저는 가능하면 수락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서로 안 좋아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안 그래요? 오히려 감독님한테는 이점밖에 없죠.”

    동민의 말에 말없이 더 고민하던 주안은 결국 승낙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동민이 갑작스레 말을 덧붙였다.

    “참, 딱 한 가지 조건만 추가하고 싶은데요.”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생각이냐? 이미 네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못 주워 담는다. 취소니 사과니 그런 이야기는 필요 없어.”

    으르렁거리는 주안에게 동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별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경기를 준비하고 지휘할 때 한수연 씨 도움을 좀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동민의 이야기는 정말로 주안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였다. 그에게 한수연은 동민처럼 써먹을 만한 무언가를 보여주는 존재도 아니고 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듣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동민을 돕는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국 주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두 사람의 내기는 성립되었다.

    “그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이……”

    주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내리자 종이가 양손에 잡히는 부분대로 구겨져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곧바로 종이를 펴고 다른 책 사이에 끼워 종이를 다시 펴고 있었다. 그 종이는 조금 전 주안과 동민이 내기를 하면서 쓴 계약서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주안은 동민이 말하지 않겠다는 것을 믿지 못해서, 동민은 주안의 말이 바뀔까 봐 견제한 끝에 나온 물건이었다.

    “그놈이 말 바뀔 수도 있으니 이건 멀쩡히 보관해 둬야지. 그래야 나중에 가서 입 놀리는 일이 없어.”

    주안은 으르렁거리듯 혼잣말을 하며 계약서를 책상 서랍 안에 넣고 열쇠로 단단히 잠갔다. 이것이 있는 한 동민은 나중에 말을 바꾸지도 못하고 나가게 될 것이 뻔했다.

    ‘그 주인도 못 알아보는 개새끼가 감히 주인은 물려고 들어? 어디 박살 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정신을 차려도 다시는 이 쪽에 발도 못 붙이겠지만.’

    주안은 동민이 팀에서 쫓겨나는 것을 상상하며 사납게 미소 지었다. 처음 주제도 모르고 대들었던 것은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다음 자신의 경고도 무시하고 이를 드러낸 이상 동민을 팀에 남길 생각은 없었다.

    내기에 져서 팀에서 나가는 순간, 아니, 만에 하나 동민이 성공한다고 해도 주안은 그가 축구판에 발을 들이게 할 생각이 없었다. 실력이 어찌 되든 감독에게 도전하는 스태프라 소문내고 다니면 그런 동민을 받아줄 팀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감독한테 대드는 놈을 좋다고 데려가겠다는 정신 나간 팀은 없을 테니까. 알량한 정의감인지 다른 감정인지 때문에 앞길을 망치는 머저리 같은 놈. 실력이 있으면 뭐 해, 그걸 지 손으로 시궁창에 처박는걸.’

    그렇게 생각하니 주안은 조금 전까지 잔뜩 올랐던 짜증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동민이 불쌍하기까지 느껴졌다.

    “가만히 닥치고나 있었으면 내가 잘 써먹어주기라도 할 것을 그깟 년이 뭐라고 끼어들어서 미래를 망치나. 멍청한 새끼.”

    주안의 동민을 향한 비웃음은 가만히 방 안을 떠돌았다.

    ‘첫 번째는 끝났으니 지금 남은 건 준비하는 거구나.’

    동민은 벤치에 기대 쉬면서 기운을 차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 가장 큰 고비였던 주안과의 내기가 성립된 이상 그에게 남은 건 팀을 FA컵 우승까지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날짜인 FA컵 8강전 상대는 전주 드래곤즈니까 시작부터 빡세기 그지없네. 아니, 그 이후로 만날 수 있는 팀들이 거의 K리그 팀들일 테니까 이걸 가지고 빡세다고 표현하기도 그런가. 따지고 보면 그 숨 막히게 끔찍한 수비를 뚫어야 한단 거지…….’

    동민은 시즌 전에 봤던 전주 드래곤즈의 질식 수비를 떠올리고는 몸을 움츠렸다. 손홍진 감독의 지도 아래에서 팀 전체가 하프라인부터 그물을 짜듯 위치해 상대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수비 방식은 지금 동민에게는 돌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FA컵 전에 전주 드래곤즈랑 리그 경기가 한 번 있다는 거지. 그때 보면서 미리 고민해 보는 수밖에. 이기든 지든 확실히 힌트가 되긴 되겠지.”

    FA컵 2주 전에 전주 드래곤즈와 치르는 리그 경기는 동민에겐 시험 전에 미리 문제를 알려주는 것과도 같았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동민은 덕분에 8강전만큼은 어느 정도 미리 정보를 가지고 준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감독 그 양반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그걸 알았다고 해도 8강전 상대를 미리 보는 걸로 우승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질 않았겠지. 그만큼 이성적으로 생각할 시간이 없게 만들려고 밀어붙이기도 했고.’

    동민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던 주안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주안이 어떻게 생각했든 리그 경기에서 전주 드래곤즈를 상대하는 것은 동민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리그 경기 준비하면서 미리 알아보고, 경기 때 분석하면서 방법을 찾는 수밖에. 전주 드래곤즈야 숨 막히게 조여 대는 수비인 걸 내가 직접 봐서 알고, 우리 감독도 원래 수비를 중요시하면서 점유율을 바라는 거니까 분명히 경기에서 장단점이 보이겠지. 가능하면 해결책도 미리 알아두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보면서 생각해 둘 순 있을 테지.’

    동민은 가볍게 웃음 지었다.

    같은 시각, 주안도 웃고 있었다.

    다만 한 사람은 성공적인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파멸에 대한 확신으로 미소 짓고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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