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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시작된 외줄타기 (82/270)

또다시 시작된 외줄타기

“굉장히 흥분한 것 같은데 지금 스스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지금이라도 본인이 하고 있는 행동이 뭔지 깨닫는 게 좋아요. 화장실에 들러서 세수라도 하고 오는 걸 추천하는데.”

주안의 목소리 또한 동민에 대한 분노를 보여주듯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안은 아직 마지막 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동민이 실수했다며 고개 숙여 사과를 하면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넘어갈 마음이 있었다. 지금껏 동민이 해온 일에 대한 최소한의 대우였다.

“배려는 감사합니다. 그런데 생각 없이 열 받아서 뛰어온 것도 아니고, 지금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민은 그런 주안의 배려를 깡그리 무시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런 동민의 말에 주안도 더 이상 동민에 대한 대우를 해줄 필요성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면서 지금 이런 행동을 한다고요? 그리고 지금 동민 씨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네요. 다른 코치들 사이에서 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고 있는 거죠? 갑자기 찾아와서 지금 무슨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까?”

“감독님부터 시작해서 다른 코치들 전부가 연관되어 있는 사실을 모른다고요? 그거야말로 억지 아닙니까? 감독님이 주도해서 하고 있던 건 다 알고 찾아왔는데요. 모른 척하고 그냥 넘기려는 건 너무 치사하지 않나요?”

동민의 눈은 불타고 있는 것처럼 주안을 쏘아보고 있었다. 주안은 동민이 이 정도로 확신을 가지고 온 것으로 보아 뭔가 확실한 것을 잡아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누군가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최소한 끌어들이려다 엇나간 거겠지. 누구지? 장민호 그놈인가… 그래, 그놈밖에 없겠군. 꼴에 충고한답시고 말했거나 아니면 일이 커지지 않게 한답시고 떠들어댔을 텐데. 그 도움 안 되는 놈.’

주안은 마음속으로 민호에게 욕을 퍼붓고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동민이 확실한 증거나 적어도 증언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모르는 척 넘기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었다. 지금은 조금 억지로라도 동민을 눌러버리는 것이 차라리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주안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어디 동민 씨 말이 맞다고 칩시다. 근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동민 씨가 이렇게 달려들 이유가 있나요?”

“뭐요?”

조금 전과는 180도 다른, 뻔뻔한 주안의 말에 동민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주안을 압박할 생각은 있었지만 이렇게 아예 뻔뻔하게 나올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동민 씨랑 직접 관련되는 일도 아닌데 이렇게 나한테 찾아올 이유가 있나요? 팀을 이끄는 방식은 지금 감독인 나한테 달려 있고, 거기다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준 적도, 자리에 어울리는 커리어도 없는 사람을 내가 왜 대우해 줘야 하죠?”

“그게 무슨…….”

주안의 말에 동민이 말하려던 찰나, 그의 말은 계속된 주안의 말에 잘렸다.

“내 말이 틀렸나요? 따지고 보면 지금 동민 씨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해봐야 도덕적으로 그러면 안 된다 정도밖에 없지 않나요? 아니면, 그 사람한테 뭔가 다른 감정이라도 있어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시죠.”

주안의 빈정거리는 말에 동민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주안의 성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도 지금 그의 말은 그대로 듣고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수연을 돕는다는 그의 목적을 남녀 사이의 감정이라는 다른 것으로 바꾸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는 게 아니라 능력을 보여줄 기회조차 제대로 내준 적이 없는 거겠죠. 처음부터 계속 짓눌러서 기 죽이고 기회조차 안 주는 거, 감독님 특기 아닌가요? 저한테 그랬던 것처럼요.”

동민의 말에 주안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눈앞의 청년을 보았다. 성격은 잘 맞지 않아도 확실히 실력만은 있어서 써먹을 만하다고 판단했던 그였지만 이제는 그 생각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요즘 조용히 말 잘 듣는다 싶더니만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아무리 적당히 써먹어 주려고 해도 본인 성격이 발목을 붙잡는 놈이야.’

그는 더 이상 동민을 안고 가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지금까지는 성격상 맞지 않아도 선만 넘지 않으면 계속 써먹으려 생각했지만 오늘로 그 생각은 바뀌었다. 이미 동민은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은 데다 아무리 써먹기 좋은 능력이 있어도 더 이상 참는 것은 무리였다.

“…요즘 좀 잘 대해줬더니 기어오르기는. 저번에 말했던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멍청했나?”

주안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조금 전까지가 화를 어떻게든 억누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저 눈앞의 동민을 향해서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껏 위해줬더니만 되도 않는 소리를 하면서 이빨을 드러내? 기르던 개도 키워준 은혜는 안다는데 네놈 머리는 개만도 못한가 보구나. 됐어, 저번에 경고한 것처럼 오늘이 네가 이 팀에 있는 마지막 날이 될 거라고 생각해라. 가서 네 방이나 정리해. 내일부턴 다시 나올 일이 없을 거다. 아무리 단장이라도 이딴 식으로 감독한테 대드는 머저리를 감싸주긴 힘들 테니까.”

주안이 씹어뱉듯 하는 말에도 동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주안의 협박에도 미미한 비웃음을 입가에 짓고는 말했다.

“예, 그러죠. 다만 감독님도 좀 귀찮아지실걸요.”

“무슨 개소리를…….”

“그냥 감독한테 대드는 스태프가 아니라 감독이 하던 일까지 대신 하던 스태프라서요. 단장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이나 감독이 중심이 되어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한 코치를 따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팀 분위기 잘 돌아간다며 참 좋아하겠네요.”

동민의 말에 주안의 머릿속에서는 얼마 전에 있었던 부천 유나이티드의 경기 준비 자체를 동민이 거의 맡아서 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 자식이 그 일로 발목을 잡을 생각인가.’

잊고 있던 자신의 실책에 주안은 뒷골이 짜릿해지는 감각을 맛봤다. 요즘 태도가 고분고분해져서 더 경험을 쌓게 할 겸 시킨 것이었는데 그 일이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와 그의 뒤통수를 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침착하게 대꾸했다.

“…헛소리는 집어치워. 네깟 놈 하나가 말한다고 해도 그걸 믿어줄 것 같아? 단장 그 인간이야 지가 데려왔으니 믿어준다고 쳐도 그 인간 하나로 뭔가 바뀔 일은 없어.”

동민이 아무리 광호의 기대를 받고 있다고 해도 광호가 100퍼센트 동민의 말을 믿어줄지는 모르는 일인 데다, 광호가 믿어준다고 해도 광호 한 명이 주안을 압박하기는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오히려 자기 자리를 보전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할 판일 텐데.’

주안은 광호를 믿고 뻗대는 동민이 잠깐이라도 당황해서 입을 멈출 것이라 예상했다. 만약 그렇지 않고 허세를 부려도 본인이 생각하는 것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며 그 미소 짓는 얼굴을 잔뜩 구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동민은 주안의 말을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받았다.

“구단 내부에서만 이야기가 돌면 그렇겠죠. 근데 외부에서부터 그런 소문이 돌면 이야기는 좀 다를걸요? 구단에서는 어떻게든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진정시켜야 하니까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훨씬 귀찮을 것 같은데요.”

동민의 말에 주안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어보려던 찰나, 동민은 말을 이었다.

“제 예전 은사님이 감독 생활을 오래하셔서요. 아시는 분들 중에는 스포츠 쪽 기자분들도 꽤 계신 걸로 알고 있거든요. 바깥에서부터 이야기가 돌다 보면 어떻게 될지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동민의 말에 주안은 말이 없었다. 지금 눈앞의 인물은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지금 그를 상대로.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듯한 착각과 함께 책상에 놓여 있는 물건이 동민에게 날아가기 직전, 동민은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별로 그렇게 하고 싶진 않네요. 서로 귀찮잖아요.”

“…뭐?”

주안이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내놓은 대답에 동민은 말했다.

“감독님, 저랑 내기 하나 하시죠. 저번에 했던 것처럼.”

주안은 건방짐을 넘어 허탈감까지 느껴지는 동민의 말에 아무 대꾸도 없이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가지 안 돌아가고 방에서 나온 걸 대단하게 생각해야 하나. 진짜 자기가 앉아 있던 의자라도 던질 것 같은 기세였으니까.”

동민은 주안의 방을 나와 굳은 걸음걸이로 벤치를 향했다. 이윽고 벤치에 도착해 몸을 기대자 무너지듯 체중을 실었다. 여기까지 멀쩡하게 걸어온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의 두 다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일단 자리에 앉자 다리를 포함한 온몸의 맥이 풀려서 한동안은 걸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번에도 무섭다고 느꼈지만 오늘은 진짜 얼굴에 적어도 한 대는 얻어맞는다고 생각했어.”

한숨을 내쉬며 동민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 곳에는 6월의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보고 있자 조금씩 웃음이 터졌다. 이윽고 피식거리던 웃음은 마치 발작처럼 터져 나갔다.

‘됐다. 어떻게든 또다시 그 늙은 뱀 같은 인간을 다시 한번 나하고 같은 무대로 끌어내렸다.’

가슴속 깊은 곳부터 유쾌한 웃음이 올라와 그의 입을 통해 퍼져 나갔다. 동민은 또 한 번 주안에게 승부를 걸었고, 상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어떻게든 성공은 했어, 성공은. 시작이 반이라니까 반은 했네. 이 정도면 훌륭하지.”

동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기지개를 켰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져있던 목과 어깨를 풀면서 그는 곧바로 앞으로 해나갈 일을 떠올렸다.

‘일단 시작은 했으니까 남은 건 내 능력을 얼마나 발휘하느냐, 수연 씨의 도움이 얼마나 큰 효과를 보느냐, 그리고 마지막은 얼마나 운이 따라주느냐. 이 세 가지네.’

만약 다른 이들이 동민과 주안의 내기 내용을 안다면 대부분은 동민을 보고 제정신이냐고 물을 테고, 몇 명은 요즘 유행하는 새로운 개념의 퇴사하는 방식이냐고 물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동민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저번에도 쉽진 않았지만 확실하게 해냈으니까. 이번이라고 못할 건 없지. 내가 저 아니꼬운 인간 밑에서 보면서 배운 거랑 느꼈던 것들의 총집합이니까 충분히 해낼 수 있어.’

그는 자신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떨리는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미소의 가장 큰 이유는 지금쯤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화가 나 있을 주안을 생각하니 느껴지는 유쾌함이었다.

“어디 외통수 한번 오지게 맞아봐라.”

동민은 지금쯤 방에서 온갖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있을 주안을 생각하며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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