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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그 (81/270)

그녀와 그

동민은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하고 있었다.

‘젠장맞을.’

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조금도 취하지 않은 채로 그는 입술을 깨물며 자책하고 있었다.

‘다들 그러고 있었는데 나는 알지도 못했어. 무슨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이야기해 놓고. 오히려 알지도 못하고 상황만 더 악화시켰지.’

그러나 그런 것들 중에서도 그가 가장 스스로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은 따로 있었다.

‘장민호 그 사람이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때 잠깐이나마 고민한 게 가장 화가 나. 예전에 나한테 있던 일이랑 비슷한데 내 일이 아니니까 고민했다는 게 창피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는 그 사실에 스스로에게 격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민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동민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아르바이트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의 수연과는 이유가 다르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누구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고 다른 이들과는 아무 대화도 없이 혼자서 조용히 일만 하고 있었다.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그의 흉을 보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심지어 그가 있는 자리에서 들으라는 듯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위에서 철저히 고립당한 상태로 그는 도망치듯 일에만 집중했다. 그랬던 예전의 그의 모습이 수연과 겹쳐졌다.

그런 생활이 어떤지 알고 있던 동민이기에 수연의 기분이 어떤지 이해가 가는 한편, 등시에 그런 일을 겪는다는 사실 자체에서 한순간이라도 눈을 돌리고 모른 척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수연을 돕기로 한 것이지만 자신을 도왔던 그녀를 외면한다는 선택을 잠깐이라도 고민 했다는 사실에 그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내가 자기를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한 말… 이제야 좀 이해가 가네.’

동민은 예전에 성남 페가수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던 시절, 수연을 보면서 열등감을 느끼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의 자신도 자신을 보면서 웃는 수연을 보고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거리던 것이 있었다.

“결국 똑같았단 거야. 나나 그 사람이나.”

처음 팀에 왔을 때 수연을 보면서 침울해하던 자신도, 그녀보다 늦게 들어왔으면서 먼저 주안의 신임을 얻은 동민을 보고 초조해하는 수연도 다르지 않았다. 상대가 선의로 도와주려 해도 생각이 엇갈리면 상처만 줄 뿐이라는 것을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동시에 수연을 지금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침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팀에서 해내가겠다는 마음을 더욱 굳게 먹었던 만큼 자신도 그녀를 돕고 싶었다.

‘내일 당장 가서 수연 씨한테 사과하자. 그리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자. 저번처럼 가볍고 별생각 없는 행동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한테 도움이 될 만한 방향으로. 또 실수하지 말고 정말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해.’

동민은 주먹을 꾹 쥐면서 생각에 빠졌다.

“수연 씨, 잠시 이야기 좀…….”

“난 할 말 없어요. 그냥 계속 모른 척이나 하고 있는 게 어때요?”

수연의 대꾸는 차가웠다.

민호와의 술자리 다음 날, 동민은 수연을 찾아가 사과하려 했지만 수연의 반응은 그의 꼴을 보기도 싫다는 듯 그대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수연 씨, 잠깐만 기다려 봐요. 잠깐이면 되니까 이야기 좀 해요.”

“난 할 말 없다고 했잖아요.”

계속해서 피하려는 수연을 보고 동민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그녀를 붙잡았다.

“내가 정말 미안해요. 잠시만이면 되니까 내가 만회할 시간을 줘요.”

“싫다는데 자꾸……!”

그를 뿌리치려던 수연은 동민의 진지한 표정에 결국 마음을 돌렸다.

“…알았어요. 정말 잠깐뿐이에요.”

겨우 수연의 승낙을 얻어낸 동민은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 들어온 뒤 동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수연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상황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돕는다고 했던 행동인데 오히려 상처만 줘서 미안해요.”

동민의 진심 어린 사과에 수연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서 있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동민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돕고 싶은 마음만은 진짜예요. 처음 팀에 들어왔을 때 위로해 준 것도, 그 이후로도 도와줬던 것도 전부 보답하고 싶어요. 저는 수연 씨를 돕고 싶은 거지 상처를 주고 싶은 게 아니에요.”

동민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의 자신과 지금의 수연, 그 슬픈 공통점을 없애고 싶었다. 동민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아는 고독한 울타리 속에 갇힌 수연은 끄집어내고 싶었다. 그것이 잠깐이라도 그녀를 외면할 뻔한 그의 속죄였다. 동민의 말에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수연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알았어요. 동민 씨가 저를 위해서 한 일이라는 건 알겠어요. 사과는 받을게요. 아니, 오히려 저도 사과드릴게요. 저도 그렇게 급하게 화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어제는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미안해요.”

그녀는 동민을 보면서 사과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뭔가 해줄 필요는 없어요. 괜히 움직이다가 기껏 동민 씨 자리 잡았는데 감독한테 밉보이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사과는 이미 받았으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요. 어쨌든 이만 가볼게요. 다시 한번 미안해요.”

동민의 말을 그녀는 또다시 거절했다. 어제와 같은 분노나 원망 없이, 이번에는 말 그대로 동민을 위해서 선택한 것이었다. 그 말을 남기고 뒤돌아서 가려는 수연을 보며 동민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번에도 거절당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자 그는 그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 그, 말을 잘못했네요. 돕게 해 주세요, 가 아니라 도와주세요. 수연 씨의 도움이 필요해요.”

“네?”

갑자기 바뀐 동민의 말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수연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동민이 말했다.

“제가 하려는 일이 하나 있는데 수연 씨 도움이 필요하거든요.”

이윽고 이어진 동민의 말을 들을수록 그녀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가, 이윽고 날카롭게 변했다.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동민 씨는 또…….”

그러나 수연의 말에도 동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이번에는 그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제가 수연 씨한테 도와달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프리시즌 때처럼 제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 미리 SOS요청하는 거니까요.”

수연은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는 동민을 바라보다가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태도를 보니 뭐라고 말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도 아닐 것 같은 데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번하고는 다르게 기분이 나쁘진 않아.’

동민 혼자서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연에게 먼저 이야기한 점도, 진심으로 그녀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전해지는 것도 그때와는 달랐다. 게다가 계속해서 거절하기엔 동민의 말은 지친 그녀에겐 너무나도 달콤한 말이었다. 결국 수연은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뭘요, 말했다시피 제가 또 일 저지르고 수연 씨가 도와주겠다고 하시는 거잖아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수연은 감사의 말을 웃으며 흘리는 동민을 보면서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짐짓 무겁게 말했다.

“그럼 제가 돕는 대신 제대로 해야 해요. 정말로 전부 다 걸고 하는 일이니까요.”

“너무 걱정 마세요. 프리시즌 때도 둘이 힘을 합치니까 잘 됐잖아요. 그럼 이따 뵐게요.”

그 말을 남기고 동민은 먼저 방을 나섰다.

동민이 먼저 방을 나선 후에도 수연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로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안 그랬는데, 갈수록 이상한 사람이야…….”

동민을 탓하는 듯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는 조용하고 뒤로 빼는 인상이 강하던 그였지만, 다시 만나고 나니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그의 빠른 변화에 자신은 어째서 그대로인가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지금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힘을 얻었다.

‘동민 씨는 나한테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나도 똑같아. 동민 씨한테 도움받고 있는 거니까.’

수연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방 밖으로 향했다.

“고마워요.”

문을 열기 직전, 그녀는 지금은 자리에 없는 그 방의 주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감독님, 강동민입니다.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들어와요.”

동민이 주안의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주안의 대답이 들려왔다.

“오늘은 따로 부른 적 없는데 무슨 일이죠? 나한테 급한 볼일이라도 생겼나요?”

주안은 자리에 앉아 얼굴만 슬쩍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주안을 보며 동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 없이 그의 책상 앞까지 걸어갔다.

“동민 씨?”

“감독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동민의 목소리는 지금껏 주안이 들었던 동민의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갑고 딱딱했다. 말의 형태만 부드러웠지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오히려 주안에 대한 적대감을 극도로 드러내는 듯했다.

“뭘 말하는 거죠?”

주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동민이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 자체가 불쾌한 그였지만, 요즘 동민이 잘 따르던 것을 생각하면 한 번 정도는 참아줄 수 있다며 넘어가려 했다.

“다른 코치들에 의해서 벌어지고 있는 한수연 코치에 대한 따돌림, 감독님이 시작하신 것에 가까우니 모른다는 말씀은 안 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민의 말은 더욱 날이 서서 그를 노려왔다. 주안은 점점 더 커져가는 불쾌감을 감출 생각을 접은 채 대꾸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예의를 지켰으면 하는데요. 분명히 서로 지킬 것만 지키고 지내면 다시 충돌할 일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었나요? 말하는 태도에 관해서는 서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했는데요.”

“그 충돌 자체를 맨 처음 시작한 것도 감독님이었죠. 별다른 이유 없이 다른 코치들이 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상황과 그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과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을 전부 지켜야 합니까?”

동민의 말은 이제 존댓말의 탈을 쓴 분노 표출에 가까웠다. 주안은 갑자기 동민이 이렇게 달려드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다가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놈이랑 그년이랑 나름 사이가 좋았지. 서로 도와줬느니 어쨌느니 하는 이야기도 있었고. 어디서 이야기라도 주워듣고 지금 나한테 따지러 온 건가.’

주안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의 일도 아닌 상황 때문에 기껏 괜찮게 이어놓았던 관계마저 부수려는 듯 달려드는 동민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민을 바라보는 주안의 시선에도 분노가 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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