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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받는 존재 (80/270)
  • 외면받는 존재

    “하아.”

    동민은 자판기 앞 의자에 앉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자신의 방에 앉아 상황을 되짚어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수연과 자신의 일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은 주안이라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건의했던 훈련 방식을 이야기한 것도, 그리고 거기에 수연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도 주안밖에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아낸 수연이 분노해서 찾아온 것인 만큼 이 일의 해답은 주안에게 있는 것이 확실했다.

    동민은 밑도 끝도 없이 화를 내던 수연과 다시 이야기해서 풀고 싶은 마음보다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주안에게 찾아가 봤지만, 그는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 중요한 일이라고 전화기도 꺼놓고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만한 사람은 그 인간뿐인데.’

    동민은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에는 조금 전 뽑은 블랙커피가 조금도 줄지 않은 채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동민 씨?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머리를 감싼 채 멍하니 앉아 있자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민이 힘없이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장민호가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뇨, 그냥 좀 쉬고 있어요. 살짝 피곤해서요. 잠이 부족했나 봐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기분도, 힘도 없던 동민은 대충 말을 넘기고 빨리 이 영양가 없는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주안이 따로 이야기를 전해두지 않은 이상 장민호도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모를 테니 지금 장민호와의 대화는 정신만 갉아먹는 시간 낭비 그 자체였다.

    “어이구, 컨디션 관리는 잘 해야지. 요즘 안 그래도 바쁜데 그러다가 탈이라도 나면 고생한다니까.”

    “…감사합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잠깐 잠이 부족한 것 뿐이라서 커피만 마시고 다시 들어가 보겠습니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되게 졸려 보이는데 커피 그걸로 되겠어? 부족해 보이는데.”

    동민은 빠르게 이야기를 마치고 싶었지만 오늘따라 장민호는 자꾸 말을 걸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말 많은 사람이 아니더니 왜 기분 안 좋은 오늘 같은 날 자꾸 이러는 건지를 모르겠네.’

    결국 동민은 억지로 이야기를 끊으려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동민 씨, 아까 지나가다가 언뜻 들었는데 한수연 씨랑 무슨 일 있었다면서.”

    자판기를 뒤로하고 걸어가려던 동민의 발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별일 아니에요. 잠깐 이야기가 좀 커진 것뿐이라서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 느끼는 짜증을 담아 억지로 말을 짓씹어 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그의 등 뒤에서 다시 장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한수연 씨 관련해서 이야기 해줄 게 있는데 저번에 깜빡하고 말을 못 해줘서 말이야, 이따 저녁에 술이나 한잔하지?”

    그 말은 지금 동민에게는 물 수 밖에 없는 미끼 그 자체였다.

    “어쨌든 감독님이 동민 씨를 되게 좋게 보고 있다니까. 평소에 그 양반 죽어도 남 칭찬 안 하는데 동민 씨한테는 하는 걸 보면 그럴 수밖에 없어.”

    “아하하…….”

    민호는 술자리가 시작되고 한 시간이 지나서도 수연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계속 동민이나 주안에 대한 이야기나 전혀 관계없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만 계속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가 싶어 경청하던 동민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지쳐가고 있었다.

    ‘사람 불러놓고 이런 아무 관계없는 이야기나 할 거면 대테 날 왜 부른 거야?’

    민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곧 본제에 들어가겠지 라는 생각으로 영혼 없는 맞장구를 치는 것도 지칠 무렵, 결국 동민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때 황지우 코치가…….”

    “저기 수석 코치님.”

    “어, 응? 그래 왜 동민 씨?”

    “수연 씨 관련해서 말씀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동민의 말투에는 미약하게나마 가시가 돋아 있었다. 평소라면 조금 더 완곡한 표현을 쓰거나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을 테지만 낮에 있었던 수연과의 충돌에 동민은 아직도 예민한 채였다.

    “아, 그랬지. 미안. 동민 씨랑 이렇게 둘이 술 마시는 게 처음이라 이야기하다 보니 다른 곳으로 빠져 버렸어.”

    민호는 가시가 돋은 동민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수연 씨 이야기였지. 아까 동민 씨 이야기에서 그렇게 크게 넘어가는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는 동민의 시선과 함께 민호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동민 씨도 알고 있잖아. 감독님 성격이나 그런 면 까다로운 거. 수연 씨가 거기에 좀 안 맞았단 거지. 거기다가 여자라는 점도 한몫하는 거고.”

    “예?”

    민호의 이야기에 동민은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민호의 말은 동민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쉽게 말해서 웬 어린년이 자꾸 시끄럽게 구는 게 마음에 안 든단 거겠지. 아마 수연 씨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역효과일걸. 단장 때문에 낙하산처럼 들어온 뜨내기라는 생각밖에 없을 테니까.”

    민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까지 밝은 목소리로 떠들어대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변화였다.

    “말도 안 돼요. 저한테도 그랬었지만 더 지내다 보면 감독님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동민 씨랑 수연 씨가 똑같지 않다는 거 알고 있잖아. 남자 축구팀에 여자 코치로 들어오는 게 남자 전술 분석관하고 100퍼센트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민호의 말에 동민은 숨을 삼키고 말을 잃었다. 자신은 수연을 처음 본 이후 그녀가 여자라는 점을 크게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동료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어린 나이와 이렇다 할 경험 없이 단장 덕에 팀에 들어온 여성이라는 색안경을 낄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 그러면 다른 분들이 감독님한테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수연 씨, 분명히 실력 있어요. 수연 씨가 그런 편견 때문에 오해받는다면 충분히 그 편견을 없애줄 수 있잖아요. 수석 코치님은 감독님이랑 오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러면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주시면…….”

    “내가 왜?”

    잠시 말을 멈추고 있다가 급하게 튀어나온 동민의 말은 얼음 같은 민호의 대꾸에 잘려 나갔다. 민호의 말은 마치 비수처럼 동민의 가슴에 꽂혔다.

    “내가 왜 감독님한테 밉보일 수도 있는 위험까지 감수해 가면서 말해줘야 하는데? 동민 씨도 마찬가지야. 내가 동민 씨한테 수연 씨 관련해서 말하려던 이유 알려줄까? 괜한 곳에 신경 써서 신세 붕 뜨지 말라고 충고해 주려고. 기껏 감독님한테 신임 얻고 있는 것 같은데 괜히 끼어들어서 다시 관계 험악해지기는 싫잖아?”

    그의 말은 간단했다. 사이에 끼어서 고생하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얻어두었던 주안의 신임을 다시 잃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민호가 그에게 충고하려는 것이었다. 그 뜻을 이해한 동민은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거 혹시 감독님 뜻입니까?”

    주안이 시킨 것이냐는 동민의 물음에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그 양반이랑 오래 알았지만 전부 알지는 못해. 그래도 동민 씨 행동 보니까 조만간 수연 씨 일로 감독님이랑 뭔가 터질까 봐 미리 하는 말이야. 괜히 다른 사람 일에 끼어들어서 나름대로 자리 잡아가던 사람이 뒤집어쓰는 상황은 보기에 안 좋잖아. 난 지금 동민 씨를 위해서 충고하는 거야. 다른 사람 일에 끼어서 피해 보지 말라고. 가만히 있으면 될 걸 긁어 부스럼 안 만들면 되잖아.”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민을 바라보던 민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동민 씨 같은 케이스를 처음 봤어. 예전 팀부터 감독님이랑 오래 봐왔지만 처음에 나쁜 쪽으로 눈도장 찍혔다가 이렇게 빠른 시간 만에 감독님 신임을 얻은 사람은 처음이었어. 처음에는 한 시즌도 못 버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뒤집어 버렸다고. 적당히 지금처럼만 지내면 앞으로 편안하게 자리 잡을 수 있어.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기 일도 아니고 다른 사람 일로 다시 떨어지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단 이야기야.”

    동민은 민호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 말이 틀린 말은 아니야. 지금 감독 태도를 보면 지금처럼만 가면 이번 시즌이 지나기도 전에 그 사람 밑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겠지. 그건 이 사람한테 확인받지 않아도 확실해. 그렇지만…….’

    아무 말 없이 생각을 하던 동민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

    “수석 코치님이나 다른 코치님들 모두들 그럼 알면서 그냥 묵인하는 건가요?”

    동민의 질문에 민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묵인이라니 말이 조금 안 좋네. 다들 현실적인 거지. 누가 감독한테 눈총받을 위험을 감수하고 그 사람을 돕겠어, 그럴 만한 이유도 없는데. 그게 당연한 거잖아.”

    고민을 하고 있던 동민은 민호의 그 말에 마음을 정했다. 동민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충고는 감사드리지만 저는 그렇게 못 할 것 같아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짐을 챙기고 나오며 말을 이었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충고는 감사히 들었으니 계산은 제가 하고 나갈게요.”

    “동민 씨가 그렇게 나올 줄 같았어. 동민 씨는 아직 어리니까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동민 씨가 지금 그래봐야 좋아질 일 하나도 없다니까? 동민 씨도 사회생활 어떤지 잘 알잖아. 난 지금 동민 씨를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거라고.”

    뒤에서 자신을 붙잡으려는 민호의 말에도 동민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가 어려서 감정적일 수는 있어도 그런 식으로 실력 있는 다른 사람을 내버리고 팀에서 자기 자리 생기길 기다리고 싶지만은 않아요. 오늘 술자리랑 충고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그대로 나가 버리는 동민의 뒷모습을 보며 민호는 일어나려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기껏 자기 생각해서 이야기해 줬더니만……. 하여간 어린놈들은 사회생활을 모른다니까.”

    민호는 남은 술잔을 비우며 한숨을 쉬었다. 나름대로 기대를 품게 만들었던 동민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주안과 또다시 충돌할 것이 뻔했다.

    “에라, 모르겠다. 말해도 안 들어먹은 놈 잘못이지. 내가 신경을 꺼야지.”

    민호는 마지막 잔이 유난히 쓰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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