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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고 싶은 마음(2) (79/270)
  • 돕고 싶은 마음(2)

    “수비 간격 조절이라…….”

    주안은 동민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계속 듣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곧바로 더 들을 필요도 없다며 끝내 버렸을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있다는 것이, 그가 동민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는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네, 측면에서 공을 끌고 들어오는 선수들과 다른 쪽까지 동시에 막으려면 맨 마킹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수들이 지금보다 더 간격을 줄여서 촘촘하게 위치하는 것이 필요할 겁니다.”

    되풀이되는 동민의 대답에 주안은 체념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다지 필요 없을 거라는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기에는 지금껏 동민이 보여준 것들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알겠어요. 동민 씨 생각이 그렇다면 참고해 보도록 하죠. 그러면…….”

    “저기 감독님. 거기서 하나 건의드릴 게 있는데요.”

    주안이 고개를 돌리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하자 동민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있기 힘든 드문 일에 놀라 고개를 들자 동민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동민 씨 이야기는 그 훈련 방식으로 수비 간격을 줄이자는 말인가요?”

    “네, 분명히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동민이 꺼낸 이야기는 장난감 비행기나 작은 기구 같은 것에 카메라를 매달아 훈련 상황을 녹화하고, 그것을 참고하면서 선수들에게 보여주자는 이야기였다.

    ‘돌아오기 전 미래에서는 아예 드론 같은 물건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런 건 지금 없으니 좀 아쉽긴 해도 이거라면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지. 가장 중요한 점은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는 방식이니만큼 선수들이 자기 위치를 객관적으로 보기 좋다는 점이고.’

    경기를 직접 뛰는 선수들의 시선과 시야는 높은 위치에서 경기장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와는 완전히 다르다. 경기장에서 직접 뛰면서 보는 시선은 훨씬 더 생동감 있고 가까워서 어떤 것이 더 급한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기 쉽다. 반대로 위에서 경기장 전체를 내려다본다면 다른 선수들의 위치와 간격 등을 알기에 수월하고 시야 자체가 큰 폭으로 넓어진다.

    ‘평소하고는 다른 시야로 보면 분명히 위치선정이나 간격조절이 훨씬 더 수월해질 테니까.’

    그 것이 동민이 주안에게 건의한 이유였다. 아무리 시야가 좋은 선수라도 자신의 시선만 생각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테고, 그 자리에서 빠르게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흠… 생각해 보죠. 동민 씨는 확실히 특이한 생각을 많이 하나 보네요.”

    “네?”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을 품평하듯 말하는 주안을 보면서 동민은 되물었다.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생각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는 것 같아서요. 꽤 새로운 시각이네요. 나름대로 도움이 되고 있어요.”

    “아하하, 그런 식으로 생각은 안 해봤었는데요…….”

    주안의 말에 동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곧 그 어색한 웃음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그 생각을 떠올렸던 것은 한수연 코치 덕분이었거든요.”

    “예?”

    동민의 말에 주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문했다.

    “수비 간격이나 위치에 대해서 좀 더 중점을 두고 훈련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거기에 한수연 코치가 도움을 줬거든요. 한수연 코치 아니었으면 안 떠올랐을 생각이었어요.”

    동민의 말은 거의 사실이었다. 수비 간격에 대해서만 주안에게 이야기하려던 동민에게 수연이 꺼낸 말은 선수들이 훈련을 하면서 다른 시점에서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거란 것이었고, 그 말에서 동민은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들었던 드론을 생각해 낸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 매니저가 자기 남자 친구가 샀네, 어쨌네 하고 수다 떨던 게 기억났던 거지만 그걸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이제는 거의 흐려져 가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동민은 쓴 음을 지었다.

    ‘그리고 수연 씨가 이 생각을 떠올리게 도와줬다고 하면 이 인간도 수연 씨를 보는 눈이 좀 달라질 것 같으니까.’

    동민이 알고 있는 주안은 성격이 나쁘긴 하지만 상대방이 능력이 있다면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라도 인정하는 방식의 사람이었다. 수연이 그의 생각보다 유능하다는 점을 어필하면 주안과 수연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한수연 씨가요?”

    “네, 한수연 코치가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떠올리지 못했을 거예요.”

    “…흠, 그런가요.”

    그러나 그런 동민의 기대와는 다르게 주안의 반응은 시큰둥한 것을 넘어 차가워 보였다.

    “감독님?”

    “… 아닙니다. 그만 가보세요.”

    주안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대로 더 이상 말 하지 않은 채로 이야기를 마쳤다. 동민의 이야기를 더 들으려는 생각이 아예 없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주안의 반응에 내심 당황한 동민이었지만 결국 그는 그 이유를 묻지 못한 채로 주안의 방을 나서 돌아와야 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방에 돌아온 동민은 조금 전 주안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이라도 있는지 다시 한 번 곱씹어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이라도 했나? 그런 것 치고는 나한테 쌀쌀맞거나 하는 태도는 아니었는데. 아니면 그냥 말 그대로 수연 씨를 언급해서? 그것도 뭔가 이해가 안 가. 단순히 그냥 싫었으면 별일 없었다는 식으로 넘길 인간도 아니잖아.’

    그는 한동안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지만 주안의 태도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반쯤 포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모르겠다. 그냥 갑자기 이유 없이 기분이라도 나빠진 건가. 원래 성깔 더러운 인간이니 그럴 수도 있겠는데… 아니, 그런 거 외에는 진짜 생각나는 게 없네.”

    동민은 그렇게 더 이상의 고민을 관두고 쌓여 있는 일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동민 씨, 잠깐 뭣 좀 물어보고 싶은데 지금 시간 되시나요?”

    “예? 아, 예.”

    주안과의 대화가 있고 며칠 후, 동민은 갑자기 방에 찾아온 수연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얼떨결에 대답했다. 주안과 이야기한 이후 다음 경기 상대에 대한 분석을 위해 돌아다니는 등, 그와 했던 대화마저 까맣게 잊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던 동민은 수연이 찾아올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세요?”

    자리를 마련하고 동민이 말문을 열었지만 수연은 말없이 무언가를 꾹 참는 듯 서 있었다.

    “수연 씨?”

    “…동민 씨, 혹시 감독한테 저 관련해서 이야기한 적 있었어요?”

    “예?”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입은 연 수연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동민의 머릿속에 며칠 전 있었던 주안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 그때 이야기했던 훈련 때에 공중에서 찍고 그거 활용하는 걸 감독님이랑 이야기했었는데 그때 수연 씨가 도와줬다고 말했었거든요. 왜요? 감독님 반응이라도 바뀌었어요? 그나마 좀 덜 으르렁거릴 거 같은데. 하여간 그 양반도 뭔가 보여줘야 바뀐다니까요.”

    동민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주안이 그때 차가운 반응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수연에게 뭔가 다른 반응을 보여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동민의 말을 들은 수연의 표정은 지금껏 참던 것을 그만두듯 단번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웃음을 띠고 있던 그녀의 입가는 굳게 다물어지고 그녀의 양손은 주먹을 쥔 채 떨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해달라고 하기라도 했어요? 그건 동민 씨가 한 거잖아요. 그거에 왜 날 끼워 넣고 그 사람 앞에서 이야기를 해요? 대체 왜 그랬어요?”

    수연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동민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수연의 입에서 나온 것이 맞는지 몰라 눈을 깜빡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만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동민은 수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주안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수연과의 사이가 나아졌다면 그녀의 반응이 이럴 리가 없었다. 동민은 무언가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는 수연의 분노를 더욱 증가시킬 뿐이었다.

    “왜 멋대로 날 거기에 집어넣고 감독한테 그따위로 말해서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냐고요! 일부러 그 사람한테 비아냥대려고 한 거 아닌가요!”

    수연의 외침에 동민은 무언가로 머리를 세게 맞은 양 뒤로 물러섰다. 수연은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런 수연의 표정보다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진짜로 모르겠는데…….”

    “동민 씨는 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것밖에 못 하냐고요!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감독 그 인간한테 어떤 식으로 말하면 그딴 소리나 튀어나오는데! 사람 비참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래요?!”

    폭풍처럼 몰아치는 수연의 말에 동민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수연에 대한 반감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녀와 주안의 껄끄러움이 없어지길 바라고 한 행동인데 감사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다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듣자 듣자 하니까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다니요! 뭐가 어떻게 됐는지 제대로 이야기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 말도 없이 화만 내면 나보고 뭐 어쩌란 건데요!”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수연의 행동에 대한 의문은 점차 분노로 바뀌고, 결국 당황에 빠져 참다못한 동민도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직후 자신까지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그의 말에 수연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아…….”

    “…모른다고? 뻔뻔하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잘못 봤네. 그래, 계속 그렇게 모르는 척이나 하고 살든가.”

    아무 말 없이 입술만 깨물고 있던 수연은 그 말만을 남기고 그대로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금껏 그가 알고 있던 수연의 밝고 활기찬 목소리가 아닌 절망에 빠져 쉬어버린 목소리만이 방안에 남아 혼자 메아리치는 듯했다.

    “…아니, 대체 이게 뭐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동민은 혼자 의자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을 하는 동민 스스로도 자신 어딘가에서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은 지금의 상황에 입 밖으로 무언가를 내뱉고 싶었을 뿐이었다.

    BU의 매니저와 KFC의 감독으로 만난 지 어느새 2년 이상이 지난, 그리고 어쩌면 그 전에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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