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생겨나는 위화감 (77/270)
  • 생겨나는 위화감

    “아, 동민이 형.”

    “방금 전까지 일부러 부르는 것도 못 들은 척하고 무시했으면서 형이냐. 매정한 놈.”

    동민은 짐짓 삐친 척을 하면서 주현을 보고 있었다. KFC의 우승 이후 두 사람이 직접 얼굴을 맞대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만했다. 대회가 끝나고 2년 동안 동민은 지도자 라이선스 준비에 온 힘을 쏟았고, 주현은 부천 유나이티드와의 계약 이후 적응과 훈련에 바빠 따로 시간을 내서 사람들을 보기 힘들었다. 특히 주현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찾아온 기회를 확실하게 붙잡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안 보고자 했던 이유가 더 컸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아니, 진짜로 잠깐 생각하느라 못 들은 거니까. 얼굴 맞대고 보는 건 2년도 넘었지?”

    “그렇지 뭐. 나도 나름대로 바빴는데 나보다 더 정신없이 살고 있던 놈이 하나 있어서. 사실 얼마 전에 나는 일방적으로 봤지만.”

    고양 캣츠와의 경기를 보러갔던 것을 떠올리며 동민은 웃었다.

    “확실히 저번 경기 형이 봤구나. 그래,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사람 말려 죽이는 전술로 나올 리가 없지. 나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다든가, 우리 팀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다 알고 있던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이제야 겨우 체감했지만 예전에 상대 팀들이 형이 짜낸 전술에 얼마나 열 받았을지 알 것 같아. 산 채로 거미줄에 묶이는 기분 같았다고.”

    주현은 전반전 내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막혀 있던 것을 생각하고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주현이 멋대로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 돌파로 성남 페가수스의 수비진을 뒤흔들기 전까지의 경기는 주현에겐 거의 악몽 같은 광경이었다.

    “엄살은. 그렇게 빡세게 준비하고서도 결국 니가 갑자기 틀어져 버리는 바람에 후반전에는 반대로 끌려가다시피 했는데. 애초에 네 드리블이나 탈압박은 알고 있었지만 프로 레벨에서도 이런 식으로 먹힐 것까진 예상 못 했지. 더군다나 지난 경기에서 그런 쪽하고는 아예 거리가 멀게 움직이더니만 오늘, 그것도 후반전에 갑자기 그럴 줄 누가 알았겠냐. 아주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어. 덕분에 어떻게 막아야 할지 머리 싸매고 있었잖아.”

    “아… 그건…….”

    뒤통수를 긁적이며 엄살을 피우는 동민을 보면서 주현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동민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잘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나중에 있을 2차전에서만 힘 좀 빼고 경기 해줘라. 오늘 후반전처럼 경기가 흘러가는 건 진짜 골치 아프니까.”

    “…누가 누구한테 엄살이라는지 모르겠네. 그때 되면 또 온갖 방법을 통틀어서 막으려 들 거면서.”

    “그거야 당연한 소리고. 그럼 내가 너 신나게 날뛰라고 아무런 준비도 안 할까 봐? 아무튼 수고했어. 얼른 가서 쉬어라. 먼저 간다.”

    그 말을 마치고 동민은 먼저 자리를 떴다. 그러나 몇 걸음 걷다가 그는 다시 뒤를 돌아 주현을 바라보았다. 뭔가 잊은 물건이라도 있는지 그를 바라보는 주현을 보며 동민은 다시금 밝게 미소를 지었다.

    “리그 첫 골 축하한다. 웬만하면 우리 팀 상대로 안 넣고 다른 팀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무튼 진짜 먼저 간다.”

    마지막까지 투덜거리는 말을 하고는 동민은 잽싸게 성남 페가수스 스태프진 쪽으로 달려갔다.

    ‘누가 종환이 형이랑 경태 형이랑 어울려 다닌다고 안 할까 봐 그런가. 저런 식으로 투덜대는 버릇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주현은 예전에 속했던 동아리의 주장과 부주장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형도 이긴 거 축하해. 그리고 고마워.”

    주현의 말은 빠르게 달려가는 동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겠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자신이 부천 유나이티드의 선수로 있는 한, 그리고 동민이 성남 페가수스의 전술 분석관으로 있는 한 앞으로는 더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다음번에는 반대로 내가 이긴 걸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까. 어떻게 해야 저 귀신같은 형이 못 막아낼지 생각을 해봐야겠어.’

    주현은 동민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 라커 룸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주현이 저놈 이긴 거 축하한다느니 그런 소린 결국 한마디도 없었네. 에라, 이 좀생이.”

    동민은 주현과 헤어져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입에 담으며 아직 다른 스태프들이 있는 벤치로 향했다. 그곳에는 평소라면 먼저 자리를 떴을 주안이 아직 벤치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수연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응? 또 뭔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그들에게 다가가던 동민은 수연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발을 멈췄다. 요즘 들어 웃는 표정 대신 굳은 얼굴을 더 많이 보게 된 그녀지만 지금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그제야 동민은 수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연 씨한테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게 제가 요청한 일입니까? 왜 제가 요청하지도 않은 일로 계속 말을 하게 만드는 거죠?”

    주안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떨리는 손을 쥐고 서 있는 수연을 못 견디겠다는 듯 으르렁대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코치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 각자 시선을 돌리며 다른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하지만 감독님 이건 제가 이번 경기를 보면서 코치로서…….”

    “코치로서? 난 당신 같은 일개 코치한테 이런 일 맡기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도 불쾌하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죠.”

    수연의 이야기를 중간에서 잘라 버리고 주안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닌 곳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동민이 상황 파악을 위해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주안은 재빨리 자리에서 멀어졌고, 이내 눈이 마주친 수연조차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실례했다’라는 말만 남기고 지나가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동민은 잠깐 자신이 주현을 보고 오던 사이에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주안이 퉁명스러운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수연이 눈물까지 내비칠 정도의 일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동민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 다른 코치들을 둘러봤지만 다른 이들도 모두 못 본 척 입을 다물며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이람.’

    동민은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아까 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모두 퇴근하는 순간까지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고, 붙잡고 물어보려던 수연마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감독 그 인간은 물어보기도 전에 자기 할 말만 하고는 휙 가버렸으니까 물어볼 시간도 없었고… 무슨 난리가 났길래 한수연 그 사람이 눈물까지 글썽거릴 만한 일이 된 거지? 거기다가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말하려고도 하질 않고.’

    그는 가만히 앉아 대체 어떤 문제가 있었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했다. 주안 때문에 화를 내고 으르렁거릴 때에도 그를 도와줬던 수연을 이번에는 자신이 돕고 싶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수연 씨 성격상 다들 말하는 것처럼 별일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반응이 격할 리가 없어.’

    자신이 아는 한 주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살짝 말에 가시가 돋는 것 외에는 언제나 긍정적인 그녀였다. 게다가 주안과 충돌하게 되면 웃는 얼굴로 참거나 차라리 화를 낸다면 화를 냈지 눈물을 보일 거라는 생각을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감독 반응도 평소 무시하는 것보다는 나한테 진심으로 화낼 때에 더 가까웠던 걸 생각하면… 생각나는 건 역시 그건가.’

    동민은 주안이 지금처럼 나름대로의 관계를 쌓기 전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조롱하던 주안을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뿐만 아니라 수연에게도 그런 식으로 대한다는 이야기를 분명 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녀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만약 그게 맞다면…….

    ‘지금껏 쭉 그러다가 이제 와서 터진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게 또 있는 건가.’

    함께 기죽지 말고 힘내자던 수연이 급작스럽게 폭발할 이유가 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주안의 무례한 태도가 계속되더라도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가 눈물을 보일 정도라면 뭔가 다른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동민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일이나 언제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볼까. 수연 씨한테 직접 물어보면 계속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할 것 같고……. 누구한테 물어보는 편이 좋으려나.’

    수연이나 주안은 물어보려고 해도 대답하려 하지도 않을 테고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적어도 감독 그 인간이 대답할 말은 뻔하지. ‘그딴 걸 신경 쓸 시간에 경기 보고서와 다음 경기 상대 분석해야 한다. 얼른 보고서나 가져와라’란 소릴 비비 꼬고 늘려서 말할 게 분명해.”

    동민은 누구에게 일의 진상을 들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한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이야기는 별로 안 해봤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제일 낫겠지. 감독에 대해서도 잘 아는 편일 테고 자주 못 보는 나보다는 수연 씨도 가까이에서 보니까.’

    그는 결국 마음을 정하고 어서 집에 가서 쉬고 내일이 오기를 바랐다.

    “무슨 일이야? 동민 씨 어제 경기 보고서 때문에 바쁜 줄 알았는데.”

    민호는 이야기할 게 있다며 커피를 사가지고 온 동민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조금 전에 감독님한테 보여 드릴 영상들도 따로 모아뒀고 보고서 자체도 일단 끝내놓은 상태라서요. 어느 정도 쉬는 건 가능해 보이거든요.”

    동민이 물어볼 상대로 선택한 것은 성남 페가수스의 수석 코치인 장민호였다. 주안과도 꽤 오랜 시간을 본 것으로 알뿐더러 전술 분석관이라는 직책 때문에 수연을 자주 만나지 않는 동민보다는 훨씬 가까운 이가 그였기 때문이다.

    ‘그거 외에도 감독이나 수연 씨를 빼면 그나마 가장 말 붙이기 쉬운 사람이긴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랑은 회식 때 말고는 이야기할 일도 그다지 없기도 하고. 출근해서 제일 많이 대화하는 게 감독이니 뭐.’

    동민으로서는 당사자인 주안이나 수연을 빼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 가까웠다.

    “일도 점점 여유가 붙어간다는 이야기네. 감독님이 좋아할 만하다니까.”

    “감독님이 저를요? 에이, 그럴 리가요.”

    “저번에도 말했잖아. 동민 씨보다 먼저 들어온 한수연 코치한테는 아직도… 아, 지금 이야기할 게 아닌가. 어쨌든 감독님이 동민 씨를 굉장히 신뢰하시는 것 같다니까. 자신감을 가져. 그나저나 동민 씨가 이렇게 온 걸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거야?”

    민호는 말하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이야기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동민은 자신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먼저 이야깃거리를 던져준 민호의 실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동민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