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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75/270)

과거와 현재

“그, 그러면 어쩔 수 없겠네요. 죄송해요.”

동민의 힘 빠진 말에 수연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에게 돌아온 말을 돌리려 이야기를 꺼낸 것이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동민에게는 지뢰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내가 봐도 같은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이 달라졌으니까. 혼자서 수비진을 잡고 뒤흔드는 것 같던 선수가 지금은 뒤로 물러나서 패스만 공급해 주는 역할이니 직접 팀을 이끌던 입장에서는 씁쓸하겠지.’

본의 아니게 동민의 아킬레스건을 찌른 것 같아 그녀는 기분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동민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이번 경기가 끝날 때까지는 제가 있던 팀 선수도, 아끼던 후배도 아니고 상대 팀 선수니까요.”

“아…….”

그 말에는 조금 전 담겨 있던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은 사라지고 평소와 같은 신중함과 냉철함이 느껴졌다. 그런 동민의 반응에 수연은 문득 한숨을 흘렸다.

“왜 그러세요?”

“…아뇨. 왜 감독님이 동민 씨를 신뢰하는지 알 것 같아서요.”

“예?”

본인이 가장 아끼던 후배이자 애제자를 앞에 두고서도 동민은 어디까지나 성남 페가수스의 전술 분석관이자 스태프로서 상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주현이 결코 가벼운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었다. 조금 전 동민의 말에서 느껴지던 안타까움도, 그리고 지금 동민이 두르고 있는 냉철함도 모두 그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굉장히 프로페셔널하다고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되게 냉정하신 것 같아서요.”

“제가요? 아뇨 당연한 거니까요. 그리고 저는 수연 씨가 더 대단해 보이는데요.”

“예?”

수연은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립 서비스라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려고 할 때, 동민이 말했다.

“저번에 제가 개인 훈련 이야기 꺼낸 걸 도와준 것도 그렇고, 평소 훈련에서도 수연 씨가 감독이나 다른 코치들한테 되게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시잖아요. 뭐, 저는 감독한테 붙잡혀서 제대로 듣질 못하지만요. 다들 수연 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걸요?”

동민의 말에 수연의 미소 지으려던 얼굴은 그대로 멈췄다. 시즌이 진행되면서 언제나 정신없이 바빠 보이는 동민이 의외로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에도 불구하고 빗나간 그의 말이 복잡하게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훈련 때마다 주안이나 다른 코치들에게 팀이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지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맞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었다.

경력이 없는 애송이, 남자 축구에 끼어든 뭣도 모르는 여자. 그것이 수연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코치들의 생각이었다. 단 한 명만 빼고.

“저기 왜 그러세요?”

갑자기 말이 없어진 수연을 보면서 동민은 당황한 듯 말했다.

“아, 아녜요. 저는 경기 시작 전에 잠시 다른 곳 좀 다녀올게요. 이따가 뵙겠습니다.”

수연은 동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빠른 걸음으로 그를 뒤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에 대한 무시를 주도하고 있는 주안도,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다른 코치들도 모두 이야기하고 편해지고 싶었다. 동민이 주안에게 인정받고 다른 이들도 그를 받아준 상황과는 반대로, 능력과는 별개의 이유로 무시당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턱밑까지 올라왔을 때, 또 다른 그녀의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것을 동민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순수하게 자신을 응원해 주고,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능력만으로 평가를 해주는 사람 앞에서 그런 것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에게 남아 있는 자존심이었다.

그녀는 동민을 뒤로 하고 주먹을 꼭 쥐었다. 단 한 명이라도 이렇게 그녀를 순수하게 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힘들다고 해도 계속해서 이 자리에 맞게 대우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 이야기한 건가?’

동민은 빠르게 걸어가는 수연의 뒷모습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동민으로선 수연의 평소 모습에 대한 칭찬과 감사를 표한 것인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리를 뜨는 것을 보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뭐, 별일 아니겠지. 지금 신경 쓸 일은 아닐 거야.”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동민은 다시 곧 재개될 경기에 의식을 돌렸다. 만일 그가 수연의 행동에 의문을 품고 조금 더 생각하면 그녀의 굳어버린 표정을 알아챌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커 룸에 있던 주안과 선수들이 나오면서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수연에 대한 생각은 깊게 묻혀 버렸다.

‘박주현 탓인지 감독 탓인지 바뀌는 것 없이 계속해서 고집만 부리면 우리로서는 땡큐지, 뭐.’

동민은 후반전이 시작된 그라운드를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반전 내내 괴롭힘 당했으니 하프타임이 끝나면 무언가 바뀌면서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부천 유나이티드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그저 최전방을 구성하는 투톱 중 한 명을 교체해서 제공권을 포기하는 대신, 더 많은 활동량과 스피드로 우위를 가져가려 했지만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저쪽의 가장 문제는 최전방이 아니니까. 모르고 있는 건지, 알면서도 손댈 수가 없는 건지.’

동민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부천 유나이티드의 가장 큰 문제는 경기를 풀어나갈 플레이메이커가 박주현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이고, 그 박주현도 본인이 직접 공을 끌고 올라가는 것이 아닌 패스 기계처럼 움직이는 한 막기가 쉽다는 점이었다.

“박주현이 아니라 베인스를 데려와도 저런 식으로만 움직임을 제한시켜 놓으면 한계가 드러나겠지. 100m 육상선수한테 전족 신겨두고 뛰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다르겠어.”

동민의 눈은 또다시 무리한 패스를 내주다가 공을 빼앗긴 주현을 향했다.

그가 K2 리그 팀인 부천 유나이티드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동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몸에 맞지 않는 옷에 못이 박혀서 본인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작게 한숨을 쉴 때 주현도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후반전이 시작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나. 아니, 오히려 더 안 좋아지기만 했지.’

주현은 후반전이 다시 시작하고도 전반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끔찍한 전반전을 지낸 부천 유나이티드 감독 이한성은 최전방 공격수를 교체했지만 결과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주현이 볼을 찔러 넣어줄 동료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그 외에 경기를 풀어줄 선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경기는 오히려 성남 페가수스의 추가골까지 나오면서 점점 더 암울해져만 갔다.

‘진짜로 아예 방법이 보이질 않아. 공이 와도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아예 기회도 별로 오질 않으니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패스 시도가 상대 수비에 끊어지는 것을 보며 주현은 이를 갈았다. 상대가 집요하게 패스 줄기를 끊는 것에 집중하는 동안 그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팀에 들어오고 2군부터 시작하면서 가장 요구받은 것은 한성의 전술에 맞는 움직임만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것은 부천 유나이티드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묶어버리는 자물쇠가 되고 있었다.

‘직접 끌고 올라갈 수도 없고, 패스는 막히고, 기껏 줄 곳이 있어도 거기서 더 이어나갈 수는 없이 결국 다시 뒤로 돌릴 뿐이고. 총체적 난국인데 정말.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상대가 되었을 때는 이렇게 힘든 거였나.’

주현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한때 함께했던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시절과 같은 든든함이나 따뜻함이 아니었다. 주현을 바라보는 동민의 눈은 그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복잡하던 주현의 머릿속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것이 차라리 완벽하게 상대 팀 선수를 바라보는 눈이었다면 그는 상관이 없었다. 주현 또한 경기가 있기 전부터 가능한 한 동민이 있는 팀이라는 생각보다는 그저 이겨야 할 경기 상대라고 생각하려 애썼으니까.

그러나 주현이 본 동민의 눈에 담긴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동민에게서 느낄 수 있던 것은 동민이 자신에 대해서 큰 실망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주었던 사람마저 그에게 등을 돌리는 듯한 모습에 주현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얼음물을 뒤집어 쓴 듯 머릿속까지 차갑게 얼어붙어 주현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동아리에서 형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골문 앞에서 이도저도 못하고 어처구니없는 슈팅만 날려대던, 다른 사람들에게 한마디만 들어도 멍하니 얼어붙던 자신의 모습이 지금 자신과 겹쳐 보이기까지 했다. 주현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런 환상은 오래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하아, …난 대체 뭘 하던 거람. 경기 중에 하등 쓸모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어.”

주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고 눈을 감았다 떴다. 조금 전까지 불이 꺼지듯 어두워져가던 시야는 다시 밝게 돌아오고 있었다.

예전의, 동민과 만나기 전의 주현이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일희일비하며 눈치만 보던 예전의 모습은 이미 바뀐 지 오래였다.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불안감에 한숨만 내쉬던 스무 살의 대학생이 아니었다. 자신이 바라던 길을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프로 선수였다.

‘그래, 동민이 형이든 누가 됐든 나한테 실망했다면 다시 보게 만들면 되는 거니까.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한 여기서 다시 보게 만들면 그만이야. 이제 와서 그런 거 하나하나에 신경 쓰지 말자.’

주현의 얼어붙었던 얼굴에 자신감 있는 미소가 돌아왔다.

‘감독님이 말한 걸 지키는 것도 좋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어떤 건지 이 기회에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도 필요할 테니까.’

아까까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족쇄처럼 느껴졌던 한성의 지시는 이제 더 이상 부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패스를 줄 곳 하나 없이 전부 막혀 있는 답답한 곳처럼 보이던 그라운드는 보는 눈을 바꾸자 공을 몰고 들어갈 곳으로 가득해 보였다.

‘내가 감독님이 이야기한 역할만 할 수 있는 그저 그런 백업선수가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줘야겠어. 거기다 동민이 형을 이길 수도 있으니 금상첨화고.’

주현의 눈은 다시 예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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