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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그대로의 경기 (74/270)
  • 예측 그대로의 경기

    ‘줄 곳이 마땅치 않아. 나한테 달라붙는 게 아니라 패스 줄 곳을 틀어막고 있으니…….’

    주현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가 시작하고 어느덧 30분이 지났지만 그는 성남 페가수스의 수비를 공략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에게 압박이 들어온다면 개인기로 제치고 압박을 하느라 생긴 공간으로 패스를 넣어주겠지만, 상대는 주현이 맡고 있는 역할을 알기라도 하듯 그에게 압박을 하는 대신 패스를 내줄 공간들을 막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미리 우리 팀에 대해서 확실하게 분석해서 나온 결과일 테고, 누가 한 일인지 짐작이 가네.’

    주현의 머릿속에서 친숙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큰 은인이자 오늘에 한해서는 뛰어넘어야 하는 상대 중 하나, 동민의 모습이었다.

    ‘성남 페가수스에서 전술 분석관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었지. 경태 형이나 종환이 형 이야기 들으면 상대 팀 분석 같은 것도 맡아서 하는 모양이고. 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테니 이건 100퍼센트네.’

    KFC 시절에도 귀신같이 상대 팀의 전술을 알아채고, 그 강점을 무력화시키고 약점을 노리는 데에는 천재라는 생각이 들던 동민이다. 주현은 그런 그가 적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라는 것을 미리 알아챘어야 한다며 자책했다.

    ‘더군다나 부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고 나서는 그때하고 플레이 스타일도 많이 바꾸려고 했는데 그런 것도 전부 알아챈 느낌이야. 아예 드리블할 수 있는 공간은 내줘도 패스할 곳은 내주질 않으려는 듯이 꽉꽉 막아두고 있으니. 그렇다고 감독님이 이야기한 역할에서 벗어날 수는 없고…….’

    측면에 위치하지만 측면에서 위아래로 움직이기보다는 중앙으로 움직이면서 플레이메이커에 가깝게 움직이는 것이 지금 주현의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이는 수비력은 뛰어나지만 패스가 부족한 두 중앙 미드필더 대신 공격진에게 패스를 공급해 주기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부천 유나이티드의 감독인 이한성이 끊임없이 그에게 강조하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주현의 움직임을 묶고 있는 사슬과도 같았다.

    평소라면 그가 중원에 가세하면서 중원에서의 수적 우위를 가져가고 그의 발끝에서 공격이 시작될 수 있는 전술이지만 지금 상황은 달랐다. 그가 아무리 움직여도 패스를 받아줘야 할 동료들이 꽁꽁 묶여 있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대체 그 형은 어디까지 날 알고 있던 거람.’

    경기장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는 주현이지만 그의 등에서 나는 땀은 운동으로 나는 땀이라기보다는 식은땀에 가까웠다. 주현은 공을 가지고 이리저리 줄 곳을 찾아보았지만 결국 다시 뒤로 내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뒤로 내주면서 상대 수비를 끌어낼 생각이었지만 그 선택은 이내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주현의 패스를 받은 이호원이 김현진 쪽으로 연결하려 하자 그 패스가 곧바로 마재호에게 인터셉트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남 페가수스의 역습의 시발점이 되었다. 장진운에게 연결된 공은 곧바로 한영수가 있는 최전방으로 길게 이어졌고, 이는 그대로 골로 이어졌다.

    ‘그렇지! 하는 거에 비해서 골이 안 나와서 좀 불안불안했는데 다행이야.’

    동민은 환호하며 미소 지었다. 상대를 확실하게 압도하면서도 골이 터지지 않아 조금 걱정하고 있던 동민이었지만 결국 전반전이 모두 지나가기 전에 터진 선제골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한영수랑 조민석 두 공격수가 수비진은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긴 했는데 이번만은 깔끔한 마무리였네.’

    패스를 받을 동료가 없으면 맡고 있는 역할상 본인의 능력을 살리기 힘들게 된 박주현, 수비력에 비해서 패스가 떨어지는 이호원과 황창준이라는 두 중앙 미드필더, 그리고 우측면으로 이어지는 패스를 막기 위한 마재호라는 카드까지. 동민이 분석하고 대비한 것을 한 골 장면 안에 그대로 보여주는 움직임이었다.

    ‘전반전이 끝나기 전에 골이 들어갔으니 저쪽도 복잡할 수밖에 없겠지. 본래 쓰던 무기는 완전히 막혀 버리고 반대로 공략만 당하고 있으니까.’

    동민의 입가에는 자신감 있는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동민의 생각처럼 부천 유나이티드의 감독인 이한성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정도 밀릴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 뒀지만 이렇게까지 밀릴 줄은 몰랐는데…….’

    1 대 0이라는 스코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천 유나이티드는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중앙에서 왕성한 활동량으로 상대 팀 에이스인 장진운을 압박하고 공을 빼앗아 역습의 시발점을 만들어야 할 이호원과 황창준 두 중앙 미드필더는 장진운이 아래쪽으로 내려앉아 버리자 장점을 모두 잃고 패스 흐름만 끊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들 대신 좌측면에서 중앙까지 폭 넓게 움직이며 공격진에 공을 전달해 주어야 할 박주현은 공격진이 패스를 받아줄 공격진이 모두 묶여 버리자 다시 뒤로 내주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박주현에게 패스를 받아서 상대 수비 뒤 공간을 노려야 할 김현진은 뒤로 물러난 이문성에 의해 묶이고 마재호에 의해 패스가 차단되고 있었고 나머지 두 공격수도 다르지 않았다.

    ‘미드필드 라인부터 총체적인 난국인데 이걸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가 바라는 비대칭적 진형으로 상대의 포메이션 붕괴를 노리고 역습을 추구하는 방향은 상대가 맞춤 전술을 들고 나오면서 되려 상대에게 공략만 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수비진이 버티고 있으니 한 점밖에 내주지 않은 거지, 수비진까지 흔들거리고 있었다면…….’

    공격 전개는 모두 막히고 오히려 계속 역습당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버티고 있던 것은 수비진이 상대 공격수를 제대로 마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한 골을 허용한 이상 이제 얼마나 더 흔들리게 될지 한성은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차라리 빨리 하프타임이 되는 편이 나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 후반전이 되기 전에 한 골 더 허용하게 되면 손쓸 방도도 없이 무너진다. 다만 팀을 재정비한다고 해도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한성은 입술을 깨물며 분위가 더 기울기 전에 어서 전반전이 끝나고 팀을 재정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의 간절한 바람을 듣기라도 하듯 더 이상의 실점 없이 전반전은 종료되었다.

    ‘이제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느냐 인데… 지금껏 하던 대로 박주현을 계속해서 플레이 메이커로 이용한다면 대응은 달라지지 않아. 다른 녀석들을 바꿔도 전체적인 큰 틀과 중심이 바뀌지 않는 이상 크게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동민은 혼자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주안이 자신이 짠 대로 경기 운영을 하는 만큼 이번에는 라커 룸에 들어오라고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다른 팀원들 있는 곳이니까 이번 경기에서 갑자기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어서 그런 건가. 아니, 뭐든 상관없겠네.”

    그는 주안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어 그만뒀다. 그가 라커 룸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의 문제는 지금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변화 때문에 다른 사람이 눈치 채거나 그로 말미암아 주안과 다시 틀어진다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도 없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내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만한 성과와 기회를 얻기 전까지는 저 인간 밑에 있는 게 나을 테니까. 괜한 일은 없는 게 낫겠지.’

    동민은 예전에 으르렁거리던 주안을 상상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괜히 주안의 성격을 잘못 건드려서 또다시 그와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진 않았다.

    “뭐 하고 계세요?”

    “예?”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동민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딘가 힘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수연이 앉아 있었다.

    “아뇨, 뭔가 되게 고민하고 계신 거 같아서요.”

    “아, 별거 아녜요. 그런데 라커 룸 들어가 계셨던 거 아니었어요?”

    동민의 말에 수연의 표정이 잠시 얼어붙었다. 그러나 동민이 알아채기도 전에 그녀의 표정은 빠르게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아하하, 감독님이 금방 끝날 테니 먼저 나가보라고 해서요. 그나저나 무슨 생각 중이길래 그렇게 집중하고 있던 거예요?”

    “그냥 전반전 정리 후에 어떻게 하는 편이 더 나을지 고민 중 이었어요. 그런 걸 생각해서 감독한테 이야기하는 게 제 일이니까요.”

    얼버무리는 동민의 말에 수연의 얼굴에 잠시 씁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곧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안 얼버무려도 되는데.”

    “네? 그게 무슨…….”

    “사실 상대 팀 선수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고요?”

    그녀가 자신의 혼잣말을 들었나 싶어 침을 삼키던 동민은 예상치 못한 수연의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대 팀 21번 선수요. 플레이 스타일도, 느낌도 예전이랑 다르지만 동민 씨 팀에 있던 선수 아니에요?”

    동민은 그제야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알아챌 수 있었다. 수연은 주현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것이다.

    “아… 뭐 맞긴 하죠. 저나 저 녀석이나 바빠서 제대로 만나질 못했지만요.”

    동민은 지도자 자격증 때문에, 그리고 주현은 팀 입단 후 프로 데뷔를 위해서 훈련에 매진하느라 두 사람이 직접 얼굴을 본 건 꽤 예전 일이었다.

    “그런데 꽤 예전 일을 기억하시네요.”

    동민은 본 지 벌써 2년도 더 된 주현을 그녀가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지금의 주현은 그가 생각해도 예전과는 다른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분위기나 플레이 스타일 같은 게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알아볼 수 있는걸요. 그때는 정말 아예 혼자 레벨이 다른 선수가 와서 뛰는 것 같았으니까요. 여기서 만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수연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동민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뭔가 예전보다 직접적으로 경기에 영향을 끼치는 게 줄었다고 할까요. 물론 그때는 아마추어들을 상대로 하는 거긴 했지만 혼자서 수비진을 휘젓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아예 안 보여서요. 지난 2년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수연의 조심스럽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에 동민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스테이터스를 보는 자신뿐만 아니라 수연에게까지 느껴질 정도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의 주현은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퇴화시키는 전술에 짓눌려 있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저도 못 본 지 꽤 시간이 지나서요.”

    동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경기를 준비하면서부터 주현을 자신이 아끼던 후배가 아니라 상대 팀의 일원으로 보려 했지만, 수연의 이야기를 듣자 그가 본 최고의 재능이 이렇게 사그라져 가는 것이 그의 마음을 찔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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