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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기회(1) (72/270)
  • 뜻밖의 기회(1)

    “…그래서 간단히 정리하면요?”

    주안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동민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한참을 설명한 동민이지만 주안은 오늘따라 짧게 요약하는 것을 원하는 듯했다.

    “부천 유나이티드의 비대칭적인 4-4-2를 막으려면 결국 우리 팀도 그에 따라가야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보고서에도 써놓았지만 저번 경기에서 나온 부천 유나이티드의 좌측 미드필더는 종적인 움직임보다는 아래쪽에 머물면서 중원 싸움과 패스에 중점을 뒀고, 반대로 우측 미드필더는 넓게 벌리고 빠른 속도를 이용해 측면을 공략했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우리팀의 좌측 윙백인 이문성 선수를 평소보다 뒤쪽에 배치하거나 혹은 중앙에 마재호 선수를 투입시켜서 아예 측면으로 가는 패스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정리하라고 했는데… 어쨌든 알았습니다. 수고했어요.”

    동민의 말에 주안은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고개를 보고서로 내렸지만 그의 눈동자는 다른 생각에 빠진 듯 글을 따라 내려가고 있지 않았다.

    억지로 생각을 되돌려도 저번 시즌 부천 유나이티드를 상대했던 경험이나 동민의 보고서와 브리핑을 생각했을 때 그렇게 어려운 경기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이걸로 브리핑 마치고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요.”

    동민이 생각에 잠겨 있는 주안을 뒤로하고 방을 나서려 할 때, 그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네?”

    동민이 뒤를 돌아보자 주안이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뭔가 또 말씀하실 거 있나요?”

    동민의 말에 주안은 잠깐 말없이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동민 씨, 이번 게임… 동민 씨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주안의 말에 동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녀석이 어떻게 준비를 해오려나…….’

    동민이 나가고 주안의 방에는 주안 혼자서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동민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동민 씨, 이번 게임… 동민 씨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예? 그게 무슨 말씀…’

    ‘이번 경기를 만약 당신이 준비하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 것이냐, 라는 말이죠. 부천 유나이티드 경기를 먼저 보면서, 그리고 보고서를 쓰면서 동민 씨 머릿속에서 어떤 선수들로 명단을 구성해서 어떻게 선수들을 세우고 경기를 진행시킬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생각한 게 있다면, 정리해서 나한테 이야기해 보라는 겁니다. 늦어도 한… 모레 정도까지.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고요. 동민 씨 재능이야 내가 잘 아니까 한번 이야기나 들어보자 이거예요. 그리 긴장하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고민해 보고 다시 오겠습니다.’

    주안의 말을 들은 동민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표정을 없앴지만 그의 미간에는 엷은 주름이 그어져 혼란스러운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주안은 그런 동민의 뒷모습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는 동민이 다음 경기에 대한 준비를 해서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은 자기 능력을 펼치고 싶어 안달 난 놈이니까. 이렇게 내미는 미끼를 거절할 리가 없지. 지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내려고 고민이야 꽤나 하겠지만 결국 물 수 밖에 없는 거야.’

    주안은 이제 동민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재능이 있고, 그 재능을 어떻게든 써먹고 싶어 안달 난 타입이다. 스스로가 재능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주안이 가장 싫어하는 타입인 것이다.

    그런 동민이기에 주안이 던지는 이런 기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놈한테 한 말도 전부 거짓말은 아니니까.”

    주안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반은 동민의 능력을 신뢰해서였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저놈에게 맡기면 나는 지금 당장 더 신경 쓰이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거지.’

    주안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저녁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떻게 해야 나머지 이사진들을 설득하고 정광호 그 눈엣가시 같은 것을 밀어내는 데 도움이 되려나…….”

    주안은 차가운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부천 유나이티드와의 다음 경기가 아닌 광호를 밀어낼 수 있는 방법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황주안 그 인간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리를 한 거지? 진짜로 뭔가 짐작 가는 게 없는데.’

    동민은 자신의 방에 돌아와 의자에 앉아, 조금 전 주안이 한 말의 의도를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아무리 말 그대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그냥 다음 경기를 준비에 어느 정도 참고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애초에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지금까지 상대의 분석이나 경기의 보고서, 그리고 종종 경기 중 상대에 대한 대응법 등을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경기 자체에 대한 준비와 직접적인 대응 방법 등은 언제나 주안의 영역이었다. 선발 명단부터 선택할 전술, 교체에 관해서는 동민은 그저 단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만 가능했다. 쉽게 말해 동민이 제공하는 것은 퍼즐 조각이며 그 퍼즐 조각을 가지고 어떠한 그림을 만들어내는지는 언제나 주안의 몫이었다. 그것이 동민이 넘지 말아야 할 선 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다음 경기에 대한 준비 자체를 생각해서 보여 달라는 주안의 말은 지금까지 그가 취하고 있던 태도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쪽 관련해서 입만 벙끗해도 자기 영역에 대한 침범이니 감독에 대한 도전이니 뭐니 운운하면서 잡아먹을 듯이 날카롭게 굴었으니까. 그런 쪽으로 무진장 예민한 양반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서 아무리 사이가 괜찮아졌다고는 해도 내 쪽에서 그 선을 넘은 적은 없고 그쪽도 그 선을 변경할 이유는 아마 없을 텐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네.”

    동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 그러던 인간이 요즘 들어 갑자기 변했다? 그것도 내 재능을 믿어서? 그럴 리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주안이 그때의 화해 이후로 아무리 동민과의 교류가 원만해졌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역을 그렇게 휙 넘길 리가 없었다.

    ‘아니면 내가 경험을 쌓고 성장하는 것을 바라서? 아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지. 단 한순간이라도 그런 걸 생각한 내가 바보 멍청이지. 내가 더 성장하는 게 아무리 이용해 먹기 더 쉬워진다고 해도 자기 영역까지 넘길 인간이 아니야.’

    동민은 빠르게 고개를 저어 방금 한 생각을 지웠다. 동민과 주안의 관계가 예전보다 나아졌긴 하지만 표면적으로 작게나마 으르렁거리던 것이 사라졌을 뿐, 결국 두 사람이 전혀 맞지 않는 타입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동민과 주안 모두 서로에 대한 불쾌감을 접어두고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저번에 말했던 거랑 큰 차이 없이 나를 이용해 먹겠다, 라는 말일 텐데… 이제 와서 갑자기 나한테 거기까지 범위를 넓히는 이유가 뭐냐 이거지.’

    동민은 머릿속에서 주안이 건넸던 화해를 떠올렸다. 단순히 그때 이후로 점점 더 동민의 능력을 신뢰할 수 있어서 다음 경기의 준비까지 손대게 한다는 것은 너무 스스로에게 유리한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때 이후로 동민의 활약이 눈에 띈다고 해도 주안 자신이 그렇게 이를 드러내며 지키던 감독의 권한에 속하는 것을 내주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은 뭔가 나를 시험해 보겠다, 혹은 나한테 떠넘길 만한 뭔가 사정이 있다. 이 정도인데…….’

    주안이 그를 지금 시험해 보려는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반대로 무언가의 이유 때문에 그에게 떠넘겨야 한다고 해도 지금 동민으로서는 그 이유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 생각해 봐야 내가 뭔가 짐작할 수는 없는 거네…….”

    방에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나서야 동민은 그런 해답 아닌 해답을 정하고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주안의 예상치 못한 말에 꽤 긴 시간을 고민했지만 결국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한 가지였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른다고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지. 그 인간 말대로 내가 감독이라면 어떤 선발 명단으로, 어떤 준비를 해서 상대할지 생각했던 건 사실이니까.’

    부천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볼 때에도 경기를 보는 와중에는 주현의 변화에 실망과 아쉬움을 가졌었지만 경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부터 이미 그는 ‘과거에 박주현을 지도했던 KFC의 감독 강동민’이 아닌 ‘성남 페가수스의 전술분석관 강동민’으로서 상대에 대한 대응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주안에게 제출할 브리핑과 보고서에 들어갈 정보뿐만 아니라 자신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상대의 강점을 막아내고 약점을 파고들지 고민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 저쪽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고. 아무리 생각해도 바늘 달린 미끼 같지만 물 수밖에 없지.”

    동민은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주안이 나중에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일단 자신에게 해가 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형태 자체는 내가 다 책임지는 게 아니라 그 인간한테 보고하는 형식이니까 나한테 뒤집어씌우기도 불가능할 테고. 나한테는 확실히 기회이기도 하니까.’

    비록 라이선스도 없었고 정식적인 자리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팀을 꾸리고 있던 시기도 어느새 2년이 지났다. 그런 지금 자신이 직접 경기를 준비하는 것은 동민에게 있어서 또 한 번의 도전이고 경험을 쌓아 성장할 수 있는 계기였다.

    ‘물론 황주안 그 인간이 내 말을 그대로 들어줄지 어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애초에 그냥 넘겨 버릴 거였으면 그런 식으로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겠지. 예전처럼 이야기 꺼내고 무시하면서 도발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동민은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주안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말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생각을 거듭해도 그에게 나쁘게 돌아올 일은 없어 보였다. 자신에게 좋은 경험이나 배움이 되는 것에 비해서 다른 단점은 없는, 로우 코스트 하이 리턴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 당연히 오케이지. 집에 가서 곧바로 머리 싸매고 다시 생각해 보는 수밖에. 적어도 박주현을 묶어내는 건 황주안 그 인간보다는 내가 더 나을 테니까.”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주안의 어떤 생각 때문에 나온 기회인지는 몰라도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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