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바뀐 두 사람의 관계
“일단 감독한테 올릴 어제 경기 보고서 자료는 거의 끝났고… 그다음엔 다음 경기 상대 브리핑이랑 보고서인가. 아이고, 좀 쉬었다가 해야지.”
동민은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떼고 땀을 닦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침에 자신의 방에 온 이후로 벌써 몇 시간째 눈 한 번 떼지 못하고 저번 경기들의 보고서 작성과 자료 확인에 몰두하면서 오전을 보낸 만큼 어깨 가득 피로가 짓누르고 있었다.
“뭔 인간이 한번 바뀌기 시작하니까 끝도 없이 사람을 들볶네. 좋긴 좋은데 이것 참…….”
동민은 음료수라도 뽑아 마시려 방 밖으로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그가 이렇게 업무에 짓눌려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안양 타이거즈와의 일전 이후 갑자기 바뀐 주안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전까지는 이야기를 하거나 전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도 하나하나 동민의 속을 긁어내는 말투를 고집하던 주안은, 그 경기 이후 태도를 홱 바꾸고 그를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동민에게 주어지는 일거리도 잔뜩 늘어난 것이다.
‘그 인간 태도가 그렇게 크게 바뀔 거라고는 죽어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동민은 안양 타이거즈와의 경기 다음 날 주안이 그를 호출했던 것을 떠올렸다.
“강동민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동민은 주안의 방문 앞에서 노크를 하고는 평소처럼 짜증을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이 완연한 주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전히 틀리고 말았다.
“기다렸습니다. 들어오세요.”
방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주안의 목소리가 분명했지만, 주안과 같은 목소리를 가진 타인이라고 생각할 만큼 분위기가 달랐다. 노크를 하고도 한참 동안 일부러 심술이라도 부리듯 대답이 없다가 툭 내뱉던 대답이 아닌, 말을 꺼내자마자 곧바로 환영하는 인사는 주안에게 기대할 수 없던 것이었다.
‘이 인간 뭐라도 잘못 먹었나? 반응이 왜 이래?’
동민이 예상치 못한 주안의 대답에 당황하며 방안으로 들어서자 더욱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의 의자에 앉아 동민을 기다리는 주안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지만 결정적인 것이 달랐다. 언제나 뚱하거나 기분 나쁜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얼굴로 동민을 바라보던 주안의 표정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세요. 한창 바쁠 텐데 잘 왔어요. 앉으세요.”
동민은 주안의 말을 듣고 지금 자신이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건지 허벅지를 꼬집어 봐야 하나 고민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죠. 계속 서서 이야기할 수도 없으니까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주안이 맞는지, 주안이 맞다 면 어제 경기 중 자신이 모르는 사이 머리에 공이라도 얻어맞은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의자에 앉았다. 동민이 자리에 앉자 주안은 곧 입을 열었다.
“부른 이유 말이죠? 바쁜 시간인데 미안하지만 부른 이유는 별거 아닙니다. 그저 그… 동민 씨와 나하고의 관계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 볼 필요성을 느껴서요.”
“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멍하니 앉아 있는 동민을 앞에 두고 주안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터놓고 말해서 지금껏 동민 씨랑 나랑 빈말로도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니었잖아요. 동민 씨가 날 보면서 불쾌감과 짜증을 느끼듯 나도 크게 다를 게 없었으니까. 이야기야 서로 하지만 서로 눈에 안 보이는 게 더 마음에 편했을 정도로 말이에요.”
“아니, 그…….”
“굳이 억지로 부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 스스로도 동민 씨를 대할 때 태도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눈에 힘주고 나를 노려보면 싫어한다는 걸 모를려야 모를 수가 없으니까요. 저도 사람이 그렇게 둔하질 못해서요.”
마치 사람이 바뀐 듯 지금껏 있던 일들을 가볍게 이야기하는 주안을 보면서 동민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주안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 또한 그것을 크게 감출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자신의 눈앞에서 상쾌할 정도로 꾸밈없이 동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지금껏 알던 주안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랬던 관계를 좀 바꾸고 싶어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주안은 경계심 가득한 동민의 대답에 입가에 자리하고 있던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며 말했다.
“나는 실력 있는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대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동민 씨는 팀에 온 지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존중을 받을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프리시즌 상하이 레인저스의 경기 때나 이번 안양 타이거즈를 상대할 때에 어느 정도 보여줬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니까…….”
주안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동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동민은 그 눈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제 말은, 지금까지 빈말로도 그렇게 좋지 못했던 관계를 좋게 만들어보자 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동민 씨를 대하던 내 태도가 좋지 못했던 것은 지금 사과하겠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좀 더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도록 잘 지내보자고요. 서로 존중하는 선 안에서 일해 나가면 좋잖아요?”
주안의 이야기는 단순했다. 지금껏 자신이 동민을 대하던 태도를 사과하겠으니 앞으로는 서로 으르렁대는 일 없이 지내자는, 따지고 보면 말 그대로의 화해 요청이었다.
‘애초에 싸움이고 뭐고 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고, 따지고 보면 이 인간이 먼저 사람 속을 뒤집어놨던 게 원인이지… 생각해 보면 굉장히 뻔뻔한 이야기인데 이 인간이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일이니까 당황스럽네.’
주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황하던 동민은 점점 냉정하게 지금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민이 당황 이후에 느낀 것은 불쾌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민은 지금 주안의 제안 아닌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는, 주안으로부터의 일방적인 제안인 것이다.
“물론 동민 씨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이 든 이상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동민 씨도 그저 가만히 썩고 있기보다는 더 일하고 배워가길 바라고 있잖아요?”
“…예,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동민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 외에는 다른 길도 없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고 더 많은 부분에서 활용하겠다는 말은 그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용해 먹겠다는 말을 더 당당히 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는 건 알겠는데… 이 인간 성격이 어떻든 결국 지금 나는 계속해서 경험하면서 배워야 하니까. 덤으로 성질 긁는 태도도 그만둔다면 나로선 더 바랄 나위가 없는 이야기야. 아무리 마음에는 안 든다지만 여기서는 저 손을 잡는 것 외에는 답이 없네.’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안의 손을 마주 잡았다. 주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더라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 결과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동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이후 주안이 동민에게 맡기는 일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 전에 하던 다음 상대에 대한 분석과 보고서는 물론, 경기가 끝나면 그 경기에 대한 분석, 그리고 때때로 주안이 직접 지시하는 각 선수들에 대한 확인까지.
그전까지의 일거리에 비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해야 할 일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리고 동민은 그 많은 일거리들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점점 더 주안의 신임을 얻어가는 중이었다. 동시에 성남 페가수스 팀 또한 좋은 활약으로 리그 3위 자리를 수성 중이었다.
‘그래도 즐겁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 경기나 훈련을 보면 볼수록 스테이터스 외에도 내가 알아야 할 정보가 많다는 걸 느끼고 있으니까.’
시즌 시작 전에 무시당하면서 팀 훈련에도 불리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은 천국과도 같을 정도였다.
동민은 프리시즌에 있었던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만약 자신이 주안을 상대로 도박 수를 걸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벌써 몇 달 전 이야기네.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시간이 좀 빨라야지.”
동민의 시선은 어느새 봄꽃조차 지고 햇볕이 따가워지는 창밖을 향했다. 거의 두 달여를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낸 그에게는 계절이 변하고 있는 것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상황이었다.
“동민 씨,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창밖을 보면서 잠시 감상에 빠진 그를 현실로 되돌린 것은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주안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이 있지만 주안은 그 타이밍을 조금 늦게 잡은 모양이었다.
“아, 감독님. 조금 전까지 저번 경기 분석 보고서 끝내뒀습니다. 조금 이따가 뽑아서 가져다 드릴 테니…….”
“아뇨, 괜찮아요. 바쁠 텐데 오고 갈 필요는 없어요. 저번부터 이야기했지만 그냥 메일로 보내면 되니까요. 그러면 휴식 끝내고 메일로 보내주세요. 그럼 이따가 오후 스탭 미팅 때 보죠.”
예전에 직접 종이로 프린트해서 가져오지 않았다며 동민에게 난리를 쳤던 것은 그대로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바쁜 동민을 배려하듯 메일로 보내면 된다고 말하는 주안을 보며 그는 새삼스럽지만 볼 때마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아, 예. 알겠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주안의 뒷모습을 보면서 동민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휴식 시간은 끝난 것이다. 남은 것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주안에게 이미 만들어놓은 저번 경기 보고서를 보내고, 다음 경기 상대가 치른 지난 세 경기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상대가… 부천 유나이티드였지.’
동민에게 부천 유나이티드는 같은 리그의 경쟁 팀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먼저 알게 된 팀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주현이 그 녀석은 잘 지내려나. 2군 경기에서는 이제 슬슬 나오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시즌 초였는데 말이야.”
동민은 자신에게 감독으로서 첫 우승을 경험하게 해준 사람들 중 한 명을 떠올렸다. 함께 사회인 축구 대회를 우승했던 KFC 출신으로 축구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은 동민을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성남 페가수스에서 전술 분석관으로 일하는 자신과 부천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박주현.
“어쩌면 이번에는 내가 주현이를 막아내는 방법을 떠올려야 할지도 모르겠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2군에 속해 있다고 했으니 가능성은 크지 않겠지만, 동민은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기대에 찬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