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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남긴 것 (69/270)

경기가 남긴 것

‘믿을 수가 없군.’

주안은 경기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 소리를 들으며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상황을 솔직히 믿기 힘들다는 말이 더 알맞을지도 모른다.

경기 결과는 1 대 0.

끝나기 직전인 후반 44분에 터진 진운의 중거리포가 그대로 결승 골이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가는 정호의 영향력에 안양 타이거즈가 정호에 신경을 쏟자 비교적 압박이 느슨해진 진운이 직접 공을 끌고 올라가 만들어낸 통쾌한 골이었다.

‘장진운이 골을 만들어낸 게 놀라운 게 아니야. 저 녀석은 스타일상 뒤에 머무르는 게 더 편할 테지만 충분히 앞쪽에서도 뛸 수 있을 정도로 재능 있는 녀석이니까. 오히려 놀라운 건 이정호지.’

주안은 후반전에 정호를 보며 지금 자신이 보는 선수가 지금껏 알던 선수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양 타이거즈의 에이스이자 리그에서 손꼽히는 선수인 강만엽을 상대로, 단 한 차례를 제외하면 기회를 내주지 않고 틀어막으면서 동시에 패스의 연결 고리까지 해내는 말도 안 되는 역할을 혼자서 해낸 것이다. 지금껏 쓰리 백에서 우측 중앙 수비수 역할을 맡으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던 선수라고는 믿기 힘든 경기력이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재능 있던 녀석이었나? 지금껏 내가 이 녀석은 제대로 평가하질 못했던 건가?’

그는 지금껏 자신이 내렸던 정호에 대한 평가를 되짚어보았지만 다시금 천천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패스와 위치 선정이 좋은 녀석이긴 했지만 그만큼 중앙 수비수라는 포지션에 걸맞지 않게 태클이 능숙하지 않아,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고 때로는 페널티킥까지 만들어내던 선수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수비진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주안으로서는 쓰면서도 항상 고민하게 되던 선수였고, 결국 확실한 주전선수가 아닌 수비에 신경을 덜 쏟게되는 비교적 약팀용 로테이션용 선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녀석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 오늘 경기도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저 본인의 단점은 유민성과 오명진이라는 다른 두 명의 수비수에게 넘기고 장점이던 위치 선정과 패스를 극대화시켰을 뿐. 강만엽을 막아냈다지만 대단한 태클로 볼을 끊어내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미리 공을 받을 위치를 봉쇄하는 모습이었지. 그렇다면 결국 이정호가 이렇게 대단한 활약을 하도록 만든 건 이 녀석을 그 위치에 넣은 사람의 능력인데…….’

주안은 등 아래쪽에서부터 싸하게 올라오는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경기가 끝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동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녀석은 진짜다. 지금까지 이 녀석을 잘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오늘 일로 확실해졌어. 이놈은 그냥저냥 써먹을 수 있다 정도가 아니야. 이놈만 잘 이용해 먹으면 이번 시즌, 아니, 앞으로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어. 그저 승격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K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

주안의 머릿속에는 이번 시즌 K리그 승격에 성공해서 환호를 받는 본인의 모습이 확실히 보이고 있었다. 그의 눈 속에서는 욕망의 불꽃이 넘실거리는 듯했다.

‘성깔 하나는 마음에 더럽게 안 들지만 이놈만 잘 휘어잡으면 제대로 한 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그의 표정이 환희에 젖어 들어갈 때쯤 별안간 그는 반대로 얼굴을 굳혔다.

‘그렇지, 성깔. 이놈 능력은 참 써먹을 만한데 성깔이 문제란 말이야… 이걸 참고 써먹느냐, 아니면 어느 정도 선에서 잘라내야 하는 가…….’

아무리 능력이 쓸 만하다고 해도 감독인 자신에게 눈 똑바로 뜨고 대드는 놈을 그대로 오냐오냐 하면서 써먹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주안은 이내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아니, 선수 생활 하면서 온갖 날파리 같은 놈들도 다 휘어잡았던 나고, 감독 생활 하면서도 건방진 놈들을 내 앞에서 머리 박게 하는 데에는 익숙해. 이놈도 그렇게 만들면 그만이지. 성깔 더럽고 태도 안 좋은 거? 내 앞에서만 대놓고 안 그러면 돼. 그렇게 만들면 되니까.’

주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동민이 자기랑 맞든 맞지 않든,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다면 자신에게 맞도록 만들면 그만이었다. 주안은 진심으로 자신이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웃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안양 타이거즈의 감독인 경화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이구, 거 축하합니다. 내 그쪽이 그렇게 머리가 말랑말랑한 양반인지 오늘 처음 알았구먼.”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축하의 말을 건네는 경화를 보며 주안은 가슴이 터지도록 기쁜 것을 눌러 참으며 말했다.

“지난 경기들에서 배우는 건 있어야죠. 매번 경기가 똑같이만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바보 같잖아요. 안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축하합디다.”

가시가 가득 돋아 있는 주안의 말에 경화의 얼굴은 아주 살짝 비틀렸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되찾고 먼저 자리를 떴다.

‘경기 종료 인터뷰에서는 어떻게 더 속을 긁어서 저 늙은 여우의 두꺼운 낯짝을 살살 긁어볼까.’

주안은 그런 경화의 뒷모습을 보면서 더욱 미소를 짙게 할 뿐이었다.

동민은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히 이정호의 컨디션이 높고 반대로 강만엽의 컨디션이 낮은 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엉망인 경기력을 보여줄 줄은 몰랐는데.’

동민은 아까 있던 경기에서 강만엽이 평소 실력이나 스테이터스에 비해 이해가 가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준 것이 아직도 머릿속에 의문으로 남았다. 아무리 컨디션이 평소보다 낮았다고는 해도 수치 자체는 5였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민은 예전에 병렬의 시합에서 보았던 이차주를 떠올렸다.

‘그때 이차주는 아예 1이었지. 그래서 그렇게까지 망가진 모습도 이해가 갔어. 그렇지만 이번에 강만엽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 그럼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동민이 그전까지 있었던 안양 타이거즈의 경기들을 보았을 때에도 강만엽은 그 정도로 형편없는 경기를 펼칠 선수는 아니었다. 특히 골키퍼까지 전부 제쳐놓고 마지막에 골대 옆으로 날려 버린 것은 보는 그가 더 놀랄 정도였다.

‘결국은 답은 스테이터스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영향을 미쳤다는 건데. 이 가정이 맞다면 앞으로는 스테이터스만 보고 판단하는 게 더 불완전하다는 거네. 심리적인 요인이라든가 그런 면은 결국 스테이터스에 나오질 않으니까.’

동민은 스테이터스만 믿고 경기를 준비하고 전술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재차 깨달았다.

‘이번에 이정호를 올리면서 강만엽을 마크시키겠다는 생각도 결국 이정호가 평소에 수비 위치를 비교적 앞쪽으로 잡고 있다는 점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생각한 거였지, 스테이터스상으로는 그런 건 나오지 않으니까. 결국 이런 임기응변에 가까운 건 스테이터스만으로는 부족하단 거야. 하이고, 점점 더 이 능력은 기초고 이걸 바탕으로 내가 알아야만 하는 게 늘어나는구먼.’

동민은 푸념하듯 입속에서 혼잣말을 웅얼거렸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학생! 학생!”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동민은 갑자기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버스 기사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요?”

“그럼 학생 말하는 거지, 누굴 말하는 거겠어! 종점 도착했다니까! 다른 사람들은 죄다 내렸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좌우를 보자 버스 기사의 말대로 이미 그를 뺀 다른 승객들은 모두 내린 지 오래인 듯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이미 내릴 정류장을 지나 종점까지 온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내릴게요! 죄송합니다!”

동민은 사과하며 부리나케 버스에서 뛰어내려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버스를 내리면서 들리는 버스 기사의 투덜거림에도 그의 입가의 미소는 흐려지지 않았다.

‘내가 선수들을 더 알아갈수록 능력을 유용하게 쓸 수 있으니까. 감독 그 늙은이는 어찌 됐든 계속 힘내자.’

집을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그의 기분처럼 가벼워 보였다.

“하아, 오늘도 안 된 건가.”

수연은 침대에 엎드려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을 걸었지만 주안의 반응은 여전히 똑같았다. 수연이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계속된 주안의 싸늘한 반응과 무시는 점점 더 그녀를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침울해 있는 다고 뭔가 변하지 않을 거란건 잘 알지만… 오늘은 좀 많이 힘드네.’

평소에는 주안을 포함한 다른 스태프들에게 은근히 무시를 당하거나 냉대를 받더라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던 그녀였지만 오늘의 일은 그녀에게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그런 걸 보지 않았으면 더 잘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동민의 모습이 스쳤다. 자신이 말하려고 했다가 차갑게 무시당한 직후, 주안이 자신과는 반대로 동민에게는 먼저 가서 말을 거는 것을 보면서 수연은 그렇지 않아도 아프던 가슴을 칼로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말을 걸어도 무시당하는 자신과 주안이 먼저 가서 이야기를 건네는 동민의 차이가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먼저 팀에 들어온 이후 언제나 열정을 가지고 노력했지만 아직도 그런 상황에 닿지 못한 자신과는 달리, 동민은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신뢰를 얻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게 잘못된 건가…….”

한숨 섞인 혼잣말을 내뱉어 봤지만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네…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이 방 안을 채울 때쯤 방 밖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수연 너 들어와서 뭐하고 있어! 빨래 해놓은 거라도 빨리 니 방으로 가지고 가! 이년이 들어와서는 지 방에만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지 애미만 부려먹네!”

밖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호통에 결국 수연은 고개를 젓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오늘이라도 더 침울해져 있을 시간은 없는 모양이었다.

“알았어! 금방 나갈게, 좀 기다려!”

어머니의 짜증 섞인 잔소리에 얼굴을 슬쩍 찌푸리면서도 오히려 그녀의 마음은 조금 나아졌다.

‘그래, 계속 이러고 있으니 차라리 뭐라도 몸을 움직이는 게 낫겠지. 어찌 되든 내일부턴 다시 힘내야지. 내가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생길 테니까.’

그녀가 일어나 방문을 나서자 조금 전까지 그녀의 한숨으로 무거웠던 분위기도 약간은 가벼워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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