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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의 마음(2) (68/270)
  • 에이스의 마음(2)

    ‘감독님이 말한 대로야. 강만엽이 나왔으니까 나는 이제 앞으로 나서면 되는 거지.’

    정호는 안양 타이거즈의 에이스인 강만엽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될 줄이야 알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저 상대를 맡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 어차피 전에도 앞으로 나서는 건 많이 연습했었고, 내 뒤엔 명진이 형이나 민성이 형도 있으니까.’

    주안이 후반전이 시작되고 경기에 나서는 그에게 이야기한 것은 간단했다.

    쓰리백의 우측을 구성해서 경기에 나서되, 안양 타이거즈에서 강만엽이 나올 경우에는 곧바로 앞으로 나서서 그를 전담 마크할 것. 그것이 주안이 특별히 그에게 전달한 사항이었다.

    ‘확실히 이해는 하지만, 하필 나한테 그 역할을 맡겼냔 말이지…….’

    정호는 굳은 눈으로 만엽을 바라보았다.

    지난 시즌 첫 경기에서 결승 골이 된 안양 타이거즈의 골의 시발점은 그가 철저하게 만엽의 드리블에 속아서 공간을 내준 탓이었다. 그것은 정호에게 트라우마에 가까운 굴욕이었고 그 경기 이후 정호는 만엽을 상대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쩔 수 없지. 계속 그때 당했던 걸 신경 쓰고 있을 수도 없고. 이번에 맞대결에서 아예 지워 버려서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수밖에.’

    정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의 손은 긴장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확실히 여기까진 예상대로인데… 이정호가 잘 막아주길 바라야겠어.’

    동민은 염웅진과 교체되어 그라운드로 들어오는 강만엽을 보았다.

    [강만엽]

    28세

    잘 쓰는 발: 오른발

    성장 가능성 13.0/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2.3/20

    선호하는 플레이: 공을 받고 멈춰 서서 주위를 살핌

    특성:

    장점 - 플레이 메이커, 절묘한 위치 선정

    단점 - 깃털 몸

    현재 컨디션: 5/10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따라 강만엽의 컨디션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정호]

    26세

    잘 쓰는 발: 오른발

    성장 가능성 11.0/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8.2/20

    선호하는 플레이: 몸싸움 선호,

    특성:

    장점 - 절묘한 위치 선정, 빠른 판단력

    단점 - 서툰 태클

    현재 컨디션: 7/10

    ‘반대로 이정호의 컨디션은 평소보다 높다는 거. 포인트를 이용해서 강화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오늘의 이정호는 충분히 컨디션이 좋아. 거기다가 이주성이랑 서로 자리를 바꾸어가면서 공격을 하던 훈련 탓인지 수비 라인 앞쪽에서도 적합도가 그리 떨어지지 않는 편이고.’

    동민의 머릿속에서 나온 작전은 상대가 강만엽을 내보내는 것을 전제로 한 작전이었다. 성남 페가수스가 평소의 공격적인 쓰리백으로 돌아온다면 이미 두 번이나 상대를 압도했던 안양 타이거즈 또한 본래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진형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한창 주전 선수들 체력 관리가 필요한 시즌 중반도 아니고, 초반에 강만엽이라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선수를 벤치에 두고 운영하는 게 좀이 쑤실 테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안양 타이거즈는 염웅진을 빼고 강만엽을 투입하면서 익숙한 4-2-3-1 진형으로 변경했고 그에 대한 대응은 간단했다.

    유민성과 오영진의 앞으로 이정호를 올려서 강만엽이 만들어낼 공간을 최소화시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장진운에게 집중적으로 몰릴 압박들을 풀어낼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드는 것.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은 성남 페가수스의 선수들 중 이정호가 유일했다.

    ‘이정호의 단점이 태클이지만 어차피 태클로 공을 따낼 수 있을 정도로 강만엽이 쉬운 선수가 아니야. 결국 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강만엽이 공을 가지기 전에 위치를 선점해서 방해하는 것, 그리고 공을 잡는다면 강만엽의 약점인 몸싸움으로 밀어내는 것. 그거 둘 외엔 없어.’

    처음 동민의 이야기를 들은 주안의 반응은 그게 무슨 도박 수냐는 이야기였다. 기껏 쓰리백으로 돌아와 놓고 상대 에이스가 나오면 그 익숙한 포메이션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이 불안하기 그지없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동민의 말은 완강했다. 강만엽에 대한 대인 마크 없이 그대로 경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며 이정호의 전진 배치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강만엽의 가장 큰 약점인 몸싸움으로 그를 막아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말로 주안을 설득하자, 결국 대안이 없던 주안은 결국 못이긴 듯 그의 말에 따른 것이다.

    ‘이미 상대가 어떻게 뚫을지 알고 있는 전술로 밀고 나가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으니까. 결국 남은 건 이제 이정호가 어떻게 해주느냐인데.’

    동민은 이정호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랑 뭔가 좀 다르게 흘러가는디?’

    경화는 만엽의 투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의 흐름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지만, 후반전도 벌써 중반이 지나가는 지금까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강만엽에게 달라붙어 있는 상대 수비수였다. 단순하게 전담 마크가 붙어 있는 정도라면 만엽에게는 익숙한 일이고, 동시에 그 마크를 벗어나 찬스를 만드는 일 또한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저 애매모호한 위치가 문제인디……. 저 양반 대체 뭘 주문해서 저렇게 귀찮게 만든 거시여?’

    끊임없이 만엽에게 따라붙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뒤에서 수비 라인만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엽이 가장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계속 머물면서 공을 가지는 것을 방해하고, 공을 잡게 되면 태클보다는 달라붙어 몸싸움을 해대는 상대 수비에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만엽이 저놈 평소보다 뭔가 좀 힘겨워 보이는디 뭔 일이라도 있었나?’

    오늘의 만엽은 평소라면 공을 받아 곧바로 패스를 내줄 것이 아주 약간 더 느리거나 너무 급박한 느낌이었다. 고작 0. 몇 초의 딜레이, 그러나 그 약간의 시간들이 쌓이고 상대의 끈질긴 수비가 계속되자 그 약간의 틈은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는 또 한 가지의 이유 또한 바로 그 수비수, 이정호였다. 장진운이 그라운드에 나온 이상 경화가 선수들에게 지시한 것은 하나였다.

    ‘절대로 장진운이 마음 편하게 경기를 풀어나가도록 두지 말 것’.

    성남 페가수스의 공격의 시작은 모두 장진운이었고, 그가 없이는 제대로 된 공격이 만들어지기도 힘들다는 것을 경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대민으로 하여금 장진운에 대한 많은 압박을 주문하고, 조민섭은 뒤에 남겨 강만엽에 대한 패스루트를 확보하게 했다. 그렇게만 해도 성남 페가수스의 공격의 반 이상은 봉쇄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틀렸다.

    ‘24번 저놈이 만엽이 발만 묶는 게 아니라 장진운이가 압박을 벗어날 통로까지 되고 있는 겨. 그냥 수비만 하는 것도 번거로운데 공격의 연결 고리까지 하고 있으니 눈엣가시가 따로 없구먼. 그렇다고 저놈까지 견제시키자니 나머지 부분이 불안해지는디…….’

    오대민의 계속된 압박에도 장진운이 자신의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것은 이정호라는 또 다른 연결 고리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비진에서 전해지는 패스는 거의 무조건 장진운에게 연결되는 것을 예상한 그였지만, 장진운이 받지 못할 상황에서는 24번이 직접 전방으로 연결하거나 패스 길을 찾는 플레이가 나오고 있었다.

    물론 전에도 장진운이 심하게 마크당하면 수비진에서 롱패스를 시도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그 타이밍과 정확도였다. 장진운만큼은 아니어도 그저 일개 수비수가 급하게 하는 패스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양반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번 시즌에는 만엽이한테 정신 나가도록 탈탈 털린 놈이 저렇게 변한 겨?’

    경화는 단 한 명의 선수에게 자신의 계획이 막혔다는 점과 지금껏 자신의 밑이라고 생각했던 주안이 이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나도 만만히 보면 안 되는구먼. 까딱하다가는 큰일 나겠는디. 아니면 그냥 만엽이 저놈을 믿어야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굳어져 가던 그의 미소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미소가 자리하고 있던 그의 표정은 이미 딱딱하게 변해 차가운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망할.’

    강만엽은 몇 번이나 계속된 실수에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오늘따라 몸이 약간 무거운지 약간씩 어긋나는 볼 터치와 패스는 그를 지치게 했고, 꼭 가장 중요한 순간과 위치에서 달라붙어 대는 상대 수비는 그의 신경을 긁었다.

    ‘이대로 계속 가면 안 돼. 어떻게든 찬스를 만들어내야 해.’

    경기가 계속될수록 그의 마음은 급해져만 갔다. 전반전 동안 자신을 빼고도 매끄럽게 흘러가던 팀을 생각하면 지금 자신이 능력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감독님한테 내 능력을 보여줘야 해. 이대로 계속 실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그의 마음이 절박해질수록 오히려 그의 실수는 늘어만 갔고,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간단한 패스와 터치마저 뭔가에 홀린 듯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빗나가기만 했다.

    ‘지금 내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지난 시즌까지 잘해왔던 것도 전부 사라지고 옛날처럼 벤치에서만 썩게 될 거야.’

    안양 타이거즈로 오기 전, 성장하지 않는 유망주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벤치에도 앉기 힘들었던 시절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지독하게 남아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어떻게든 뭔가 해내야만 해.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그리고 그의 기도를 신이 듣기라도 한 듯 마침내 그에게 단 한 번의 기회가 왔다.

    후반전 37분, 30분 가까이 만엽을 잘 막아내고 있던 정호가 낙하지점을 잘못 판단해 뒤로 공을 흘린 것이다. 만엽은 그 기회를 그냥 놓칠 만큼 무르지 않았고, 제대로 된 공을 잡아낸 그는 순식간에 나머지 두 명의 수비마저 제쳐내며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을 만들었다. 우측 뒤쪽에서 패스를 받으러 달려오는 동료가 보였지만, 만엽은 상대 골키퍼와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 능력을 보여줘야만 해.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감독님은 날 계속 쓰게 될 거야.’

    그 생각과 함께 만엽은 화려한 발놀림으로 골키퍼마저 돌아 들어가며 빈 골문을 보았고, 출렁이는 골 망을 기대하며 가볍게 공을 차 넣었다.

    그러나 공은 골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찬 공은 거짓말처럼 골대 옆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지나친 부담 탓이었을까, 안양 타이거즈의 에이스인 강만엽은 그렇게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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