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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의 마음(1) (67/270)
  • 에이스의 마음(1)

    ‘어떻게 하는 게 상황을 뒤집을 수 있으려나…….’

    동민은 선수들과 주안이 라커 룸에 들어간 상황에서도 홀로 벤치에 남아 수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주안이 따로 부르는 일이 아니고서는 굳이 라커 룸까지 따라 들어가는 대신 그 전까지의 흐름이나 상대에 대한 간단한 분석 등을 맡는 것이 동민의 특권 아닌 특권이었다.

    ‘애초에 그냥 라커 룸에서 보이면 짜증나니까 오지 말라는 이유가 더 크겠지만. 그 인간 성격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것만 봐도 대충 속뜻을 알 수 있으니까.’

    동민은 생색내는 태도로 자신이 부르지 않으면 라커 룸에 굳이 따라올 필요 없이 상대팀에 대한 예측이나 전술 변화 등을 정리하라며 말하던 주안을 떠올리고는, 벌레를 씹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

    “하여간 그 인간은 진짜 꼴 보기 싫은 짓에는 천재적이라니까.”

    지금쯤 라커 룸 안에서 한창 떠들고 있을 주안의 냉랭한 얼굴을 생각하며 입을 삐쭉거렸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냉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를 말하는 거죠?”

    “예?”

    동민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평소보다 몇 배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주안이 그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누구한테 그런 혼잣말을 하나 해서요.”

    “혼잣말이요? 아뇨,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무슨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동민은 등골이 오싹한 것을 느끼며 애써 모르는 척을 했다. 요즘 들어서 사이가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해도 금방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 수 있는 주안의 성격을 생각하면 괜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런 동민을 가만히 째려보던 주안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뭔가 생각은 해봤나요?”

    “예?”

    동민이 무슨 이야기인지 되묻자, 주안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 멍청한 인간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상대한테 일방적으로 밀리는 지금 상황,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는 소리는 아니죠? 별 기대는 안 하지만 평소처럼 또 거들먹거리면서 한마디 늘어놓지는 앉나 해서요. 그게 동민 씨 특기 아니었어요?”

    주안의 말에 동민은 그제야 주안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뭔가 도움 될 만한 게 있다면 입 밖으로 끄집어 내봐라 이거구만.’

    동민은 주안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주안이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결국 주안도 대응 전술을 생각했지만 뭔가 부족하거나, 혹은 걸리는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문제는 나도 확신은 없단 거지. 염웅진, 저 선수는 단점이라 할 것도 해봐야 패스뿐이고 장점은 위치 선정. 어떻게 해야…….’

    동민은 가장 걸림돌이 되는 염웅진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중원 뒤쪽에서 그가 버티고 있는 한 성남 페가수스가 노리는, 롱패스와 한영수의 머리를 이용한 역습은 제대로 먹히기 힘들었다. 결국 동민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어이구, 저 양반 성깔 그대로 돌아왔구먼. 그러면 그렇지.’

    조경화는 후반전이 시작되자 바뀐 성남 페가수스 팀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들은 전반전의 역습을 노리던 4-4-2에서 그들이 지난 시즌까지 가장 주 무기로 삼았던 쓰리백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려. 그 양반이 아무리 융통성이 생긴다, 뭐다 해도 결국 잘 안 풀리면 가장 자신 있던 쪽이 나온다니께.’

    상대는 하프타임 동안 두 명의 선수를 교체하며 전반전 내내 일방적으로 밀리던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은 경화에게도 매우 익숙한 얼굴이었다.

    ‘장진운이 저놈이 이제야 나왔구만. 저런 놈을 안 쓰고 역습 전술을 해보려니 그 양반도 좀이 쑤실 수밖에…….’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지난 시즌 성남 페가수스의 핵심 전력이 보였다. 그가 이끄는 안양 타이거즈의 강만엽과 포지션은 다르지만, K2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미드필더를 꼽으라면 누군가는 분명히 떠올릴 만한 인물이었다.

    비교적 전방에 머물면서 상대 수비들을 무너뜨릴 스루패스를 넣어주거나 직접 공을 몰고 다니면서 공격을 이끌며 찬스를 만드는 강만엽과는 달리, 장진운의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느 타이밍에 누구에게 주었을 때 가장 효율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뒤에서부터 공격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상대팀인 경화조차 감탄스럽게 만들었다.

    실제로 지난 두 번의 맞대결에서 한 번의 무승부라도 만들어낸 것은 장진운이 부상에서 복귀해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결과이기도 했다.

    ‘부상이 잦은 녀석만 아니었으면 아예 K리그 팀에서 부르거나 적어도 우리라도 한번 찔러보려고 했을 텐데 말이여… 애초에 저 양반이 보낼 리도 없고 우리 팀에 어울리는 스타일도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대단하단 말이지.’

    경화는 조금 아쉽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뒤에서부터 장진운이 공격을 시작하고, 그것을 받은 강만엽이 상대 수비를 들쑤시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 봤었지만 이미 예전에 그만둔 공상이었다.

    “어쨌든 저 양반이 익숙하게 나오면 우리 쪽도 맞춰서 움직여 줘야지.”

    경화의 미소를 더욱 짙어졌다. 성남 페가수스는 전반전에 밀리던 게임을 뒤집기 위해서 그들에게 익숙한 진형을 택했겠지만 그 결과가 지난번과 같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두 번 일어난 일은 세 번 일어난다는 말이 있던데 저 양반이 그건 생각을 못 했나.’

    두 번의 맞대결 동안 주안이 경화를 상대로 전술적인 승리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첫 대결에서 맞불 작전으로 나왔던 때에는 3 대 1이라는 스코어로 패배했고, 두 번째 대결에서는 진운의 활약으로 겨우 2 대 2로 비긴 것이다. 경화는 이미 익숙한 주안의 전술에 미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지난 시즌에 있었던 경기들 재방송이겠구먼.”

    경화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경기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게 보였다.

    ‘시즌 초라지만 다치지도 않았는데 벤치에서 교체로 나오는 건 확실히 어색하네.’

    장진운은 가볍게 공을 받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시즌만 해도 성남 페가수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그지만 이번 시즌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프리시즌부터 주안은 점점 진운의 의존도를 줄이는 방향으로 팀을 재정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진운도 주안이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놈의 몸이 항상 문제지, 몸이.’

    부상이 잦은 진운이 그라운드에서 뛰는 시간보다 병원에 누워 있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것이 주안이 진운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 하는 이유였다.

    ‘부상으로 못 나올 때 팀이 못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변하니까 이건 이거대로 복잡해지네.’

    이번 시즌 앞선 두 경기 중 한 경기에서도 그 대신 주성이 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진운은 복잡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내가 부상 안 당하면 더 좋은 거니까. 그리고 감독님도 교체하면서 나보고 믿는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눈은 바쁘게 패스를 건네줄 동료들을 찾고 있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공을 전달해야 할지 안다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 장점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안도감이나 씁쓸함이 교차하는 지금도 그의 플레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충분한 휴식을 취한 상황에 더 활기차면 활기찼지 떨어지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럼 지난 시즌의 설욕전이 되도록 제대로 힘내볼까.”

    진운의 그 말을 주안의 바람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었다.

    ‘여기까진 우리 페이스이긴 한데 저 망할 영감탱이가 언제 칼을 빼 들지가 문제인가…….’

    주안은 진운의 투입 이후로 급격히 살아나는 분위기를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성남 페가수스는 장진운을 중심으로 하는 쓰리백이라는 익숙한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그들의 페이스를 찾고 있었다. 전반전 내내 그들의 진영에서 돌고 있던 공은 이제 안양 타이거즈의 골문을 노리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동안 장진운을 뺀 플랜 B를 연습했다고 해도 본래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전술만큼 자연스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전술로 돌아간 지금, 혼란스러워진 것은 오히려 안양 타이거즈였다.

    “저 녀석들도 아직은 이쪽이 더 편할 테고, 장진운이 들어간 만큼 이주성보다는 더 안정적이고 공격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겠지만…….”

    주안이 기억하는 경화는 상대의 대응에 결코 늦장 부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저 늙은 여우의 가장 무서운 점은 벌써 감독으로서 황혼을 맞이할 나이에도 조금도 굳어지지 않은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안이 내놓은 선택에 경화는 분명 미소 지으면서 대책을 내놓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분명 그 대책은.

    ‘저쪽도 분명히 주로 쓰던 4-2-3-1로 돌리는 거겠지. 어차피 서로 치고받고 싸움으로 가는 거라면 강만엽이 계속 벤치에서 쉴 이유가 없으니까.’

    주안에게 진운이 있는 것처럼, 경화에게는 만엽이 있었다. 수비진의 앞쪽에서 직접 헤집어 다니고 패스를 보내는 그는 안양 타이거즈의 핵심이라 부를 만한 선수였다. 경화가 전반전 동안 그를 투입시키지 않고 4-3-3을 유지하고 있던 것은 그만큼 성남 페가수스의 역습을 대비해 수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지만, 성남이 아예 공격으로 나온 상황에서는 굳이 지금까지의 전술을 고집할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딱 예상대로인데 그 경우에 저놈의 생각이 얼마나 들어맞을지…….’

    주안의 눈은 옆에서 정신없이 경기를 바라보고 있는 동민을 향했다. 지금까지는 도움이 되던 동민이었지만 이번에는 위험 부담이 꽤나 컸다. 만약 이번 경기에서 지게 되면 승격권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는 데다 또 한 번 안양 타이거즈를 상대로 무 승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리그의 상위권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약팀을 확실하게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팀과의 경기결과도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원정이라면 모를까 홈에서의 패배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계속 수비적으로 이어나가는 것도 애매한 선택이고, 아예 나한테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지만…….’

    결국 주안은 불안해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와 동민의 예상처럼 안양 타이거즈는 교체로 염웅진을 빼고 강만엽을 투입시키면서 더욱 공격적인 평소의 포메이션으로 바꾸었다.

    ‘저 여우 같은 늙은이 생각이 그러면 그렇지. 이제 남은 건 이정호 저놈이 얼마나 잘 해주냐, 란건데…….’

    주안의 눈은 스리백의 우측에 있던 정호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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