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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차이 (66/270)
  • 두 사람의 차이

    “골은 못 만들었어두 이 정도면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전반전이여. 특히 웅진이 너는 딱 훈련 때만치만 하면 되니께, 쫄지 말구 계속 그대루 혀.”

    하프타임을 맞은 안양 타이거즈의 조경화 감독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상한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상대의 공격 차단한 채 일방적인 경기를 펼치고 있던 것이다. 비록 골이 없다고는 해도 전반전 내내 경기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것은 누가 봐도 안양 타이거즈였다.

    “후반전도 별다를 건 없을 겨. 다만 이대루 계속 하다 보면 분명히 저짝에서 실수가 나올 테니께 그것만은 놓치지 말어. 이만 어여 나가봐.”

    조경화 감독은 말을 끝내면서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대부분의 팀들을 상대로 중원을 압살하면서도 결국 우승을 따내지 못한 것은 뒤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이 분산되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왕왕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점은 계속해서 그의 골칫거리였지만, 이번 시즌이 시작되면서 그 고민은 해결되었다.

    ‘웅진이 저놈이 참 물건이 되어서 돌아왔단 말이여.’

    지난 시즌 K3리그로 임대를 떠났다가 프리시즌에 돌아온 염웅진이 그 골칫거리를 말끔히 치워 버린 것이다. 조민섭과 오대민이라는 두 중앙 미드필더가 번갈아 가며 뒤에 머물면서 생기던 빈틈은 어린 나이에도 정확한 수비 위치 선정을 보여주는 염웅진이 아예 뒤에 머무르는 역할을 하면서 사라졌고, 조민섭과 오대민은 공격 작업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을 위해선 팀의 공격을 이끄는 강만엽이 빠지는 결과가 되지만 오늘 경기처럼 수비의 안정성에 중점을 두는 경기에서는 염웅진의 존재가 빛을 발했다.

    ‘황주안 그 양반이 뭔 바람이 불었는지 고집을 꺾은 것 같기도 하구 말이여…….’

    또한 조경화가 이번 경기에서 염웅진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강팀과의 원경 경기라는 것 말고도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지난 시즌, 미드필드 구역을 장악하는 안양 타이거즈에게 공격적으로 맞불을 놓던 얼마 되지 않은 팀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경기 상대인 성남 페가수스였다. 그 결과는 1승 1무로 확실한 우위였지만 비슷한 개성으로 달려들던 주안을 그는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좋게 말하면 뚝심 있고 나쁘게 말하면 미련한 주안의 방식을 예상했지만,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주안은 프리시즌에 들어 자신의 고집을 꺾은 것처럼 보였다.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친선전에서 보였던 역습형 4-4-2 전술이나 이번 시즌이 시작되고 먼저 있었던 두 경기에 나온 전술들을 생각하면, 저번 시즌의 꽉 막힌 주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성깔 깝깝한 양반이 그러면 일단 대비는 해봐야 하는 거니께.’

    그리고 그것을 본 조경화는 저번 두 경기 동안 꺼내 들지 않았던 염웅진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생각은 확실하게 맞아떨어져 빠른 공격으로 미드필더와 수비 사이의 공간을 노리려던 성남 페가수스의 전술을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이번 시즌이라면… 이번 시즌이라면 저번 시즌의 복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제. 제일 문제였던 곳은 웅진이 저놈이 꽉 잡아줄 수 있으니께 말이여. 거기다…….’

    조경화의 눈은 가만히 서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강만엽을 향했다.

    안양 타이거즈의 선수가 된 후 4년 차인 만엽은 처음 선발로 나서기 시작한 이후, 주전 경쟁에서 밀린 적이 없었다. 본인이 경기에 뛰고 싶어 하는 열망도 커서, 체력 관리를 위해 쉬게 할 때에도 뛰지 못해 아쉽다는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그런 만엽이 지금 처음으로 조금이나마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웅진이 가세하면서 완성된 경화의 4-3-3 포메이션에는 지금껏 그가 맡았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는 없었다. 비록 수비를 중요시해야 하는 경기에서만일지라도 자신이 밀려나는 것은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만엽이 저놈도 요즘 쬐끔씩 무뎌져 가는 것 같더니 잘된 거여. 본인은 아직 몰랐던 모양이지만. 결국 경쟁을 해야 발전이 있는 거니께.’

    경화는 만엽이 지금의 경쟁으로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기대했다. 어쩌면 지금 조민섭과 오대민이 맡고 있는 자리에서 뛰는 것도 고려할 수 있고, 어쩌면 본인이 익숙한 자리에서 4-3-3 포메이션이 가져오는 장점보다 더 큰 장점을 팀에 가져다줄지도 몰랐다.

    그는 만엽에게서 눈을 떼고 기분 좋게 밖으로 향했다. 아직 시즌 초반이지만, 어쩌면 이번 시즌은 지난 시즌처럼 준우승에 아쉬워하는 것 대신 우승컵을 들고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행복하게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싱글거리는 경화와는 달리 주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선수들을 보고 있었다.

    “…이걸로 후반전 전술 설명 마칠게요. 못 알아들은 사람 있나요?”

    주안의 물음에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을 표했다.

    “그럼 됐어요. 먼저 나갈 테니 곧 준비하세요. 만약 다른 전달 사항이 생긴다면 곧바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주안은 그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그라운드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엔 표정 변화라고는 없는 무표정이지만 그의 머릿속은 지금 골치 아프기 짝이 없었다.

    “그 여우 같은 늙은이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저런 식으로 나온 거지?”

    만약 경화가 듣는다면 똑같은 말을 돌려줬을 혼잣말을 하면서 주안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상대를 분석하고 그 약점까지 말했던 동민에게 한마디 하기 좋은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도 들지 않았다.

    상대 쪽 두 명의 미드필더가 번갈아 가면서 뒤에 남는 타이밍에 생기는 미드필더와 수비진 사이의 공간을 노리자는 동민의 말은 주안 스스로 생각했을 때에도 타당했고, 그 말을 토대로 전술을 짠 것은 주안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기껏 써먹으려고 마음을 먹은 마당에 이런 일로 더 찔러대는 것은 잘못하면 황금 알을 낳을지도 모르는 거위의 목을 자기 손으로 비트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저놈한테 뒤집어씌우기도 애매하고… 저 망할 늙은 여우가 내놓은 잔꾀를 어떻게 한담…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먼저 집중력을 잃는 게 우리 쪽이 될 가능성이 더 큰데.’

    아까 동민이 했던 고민은 주안 또한 하고 있었다.

    4-4-2 전술을 처음 선보였던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도 결국 집중력 부족을 보여준 것은 성남 페가수스의 수비진이었고, 점유율을 기반으로 하는 공격적 쓰리백을 기본 전술로 삼다가 역습형 4-4-2라는 전혀 다른 전술을 택한 이상 실수가 나올 확률은 상당히 높았다.

    결국 주안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실수가 벌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선수들의 동기부여를 시키면서 지금의 전술을 이어간다. 두 번째, 익숙한 점유율을 기반으로 하는 공격적인 쓰리백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두 방법 모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그가 아무리 동기부여를 하고 선수들의 집중력을 촉구한다고 해도 결국 실수 그 자체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으며, 수비에서는 지금 상황이 계속된다고 해도 상대의 골문을 공략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두 번째는 익숙한 진형이니만큼 선수들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도 쉬웠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대응하는 것 또한 익숙하다는 점이다. 지난 시즌 두 번의 맞대결에서 성남 페가수스가 단 한 번의 승리도 챙기지 못한 것은 경화가 주안의 맞불 작전에 대처하는 것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상대에게 익숙한 전술로 달려드는 것은 또 한 번의 승리를 쉽게 건네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둘 중 뭘 고르든 위험이 크다는 건데 그 이외의 방법이 뭔가 떠오르질 않는단 말이지. 일단 선수들에겐 그대로 유지하라고 말해 뒀지만… 마음에는 별로 안 들지만 그 놈한테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지 들어봐야 하나.’

    주안이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자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연은 조금 전 이야기를 마치고 먼저 그라운드를 향하는 주안의 뒤를 쫓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벌써 몇 번이나 주안에게 이야기를 무시당했는지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그것에 기죽을 수는 없었다. 아니, 요즘 들어서 기죽은 적은 있었지만 그것에 질 수는 없었다.

    ‘그래, 나만 계속 뒤처져 있을 수는 없어.’

    수연은 머릿속에서 자신보다 늦게 팀에 들어온 동갑내기 남자 전술 분석관을 떠올렸다. 처음 들어온 날부터 자신처럼 주안에게 무시당했고, 그 속내가 비치는 특유의 태도 탓에 자신보다도 더 싸늘한 눈초리를 받았던 그는 어느새 자신과는 달리 주안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보다 반년이나 먼저 팀에 들어왔지만 계속해서 제자리걸음만 걷고 있던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과는 반대로 일방적인 관계를 넘어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변한 그.

    그것을 떠올리자 수연의 마음속에서는 뭔가 흐릿한 불쾌함이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서로 힘내기로 했잖아. 그 사람은 벌써 그렇게 변했는데 나만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

    수연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 배에 힘을 주고서 주안을 향해 달려갔다.

    “감독님!”

    “…뭔가요?”

    뒤를 돌아보고 수연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더욱 차가워진 주안의 목소리는 저절로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들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다시 힘을 주고 등을 곧게 폈다. 그녀는 차가운 주안의 목소리마저 녹이려는 듯 열정적으로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안양 타이거즈의 전술에 대해서 말씀 드릴 것이…….”

    “제가 수연 씨한테 그걸 부탁한 적이 있었나요?”

    그러나 그런 그녀의 말은 곧바로 날아온 주안의 대답에 잘려 나갔다. 주안의 차가운 말에 입이 얼어붙은 듯 멈춰 버린 그녀에게 곧바로 주안의 다음 말들이 쏟아져 내렸다.

    “지금 묻고 있잖아요. 제가 그걸 수연 씨한테 부탁한 적 있었냐고요.”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런데 왜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멋대로 하려는 거죠? 수연 씨가 맡은 일이 상대 전술에 대한 해결책 찾기였나요? 아니면 주제에 안 맞게 감독에게 충고랍시고 말하는 거였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것도 아니면 지금 왜 이야기하려는 건데요? 난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고, 그러고 싶은 기분도 아닙니다. 알겠어요?”

    주안의 말은 매섭게 몰아치는 한겨울의 북풍보다도 차가웠다. 지금의 복잡한 상황 때문에 느끼는 짜증을 전부 그녀에게 풀기라도 하듯 주안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폭력에 더 가까웠다.

    “…네, 죄송합니다.”

    수연의 표정은 아래로 숙여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꽉 쥐어진 양손만으로도 처참한 그녀의 기분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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