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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어린 전술분석관 (64/270)

수상한 어린 전술분석관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경기가 끝나고 시즌이 시작되자, 동민의 일은 단숨에 늘어났다.

“동민 씨, 다음 경기 상대인 안양 타이거즈 보고서 어디 있어요? 내가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혹시 기억력에 문제라도 생겼어요?”

“그 보고서 분명히 메일로 아침에 보내드렸는데…….”

“나는 종이로 프린트해서 설명해 달라고 했는데. 설마 그새 까먹은 건 아니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물론 주안과의 관계는 겉보기에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크나큰 차이점이 있었다.

‘예전 같으면 애초에 이렇게 찾지도 않았겠지. 니가 뭘 하든 간에 니 말을 들을 일은 없을 테니 처박혀서 니 멋대로 분석을 하든 어디 틀어박혀 퍼 자든 맘대로 해라, 대신 짜증 나니까 내 눈앞에 띄지만 말아라, 하는 식이었겠지.’

동민은 옆에서 재촉을 하는 주안의 말을 적당히 흘리면서 생각했다. 서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관계에서 이렇게 으르렁거리면서라도 일을 하는 지금의 관계가 된 것이 그에게는 훨씬 나았다.

“좀 더 빨리 움직일 순 없나요? 지금 동민 씨 보고 하나 들으려고 제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면 그렇게 손이 느릴 수가 없을 텐데요.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상식 아니던가요?”

“…알겠습니다.”

단, 주안의 저런 말투가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동민은 생각했다.

‘무시당하는 것보다야 지금이 낫다는 거지, 이 인간 말투 거지 같은 거나 여전히 성질 북북 긁고 있는 건 마찬가지니까.’

동민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어, 동민 코치 어디 가는 거야?”

이른 시간부터 주안에게 보고를 겸한 시달림을 받고서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벤치에 앉아 쉬고 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일찍 나오셨네요. 오늘 훈련은 오후부터 진행되는 걸로 아는데요.”

동민이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한 사람은 성남 페가수스의 캡틴인 오명진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대화라고 생각하며 동민은 미소 지었다.

“집에서 가만히 있는 것도 좀이 쑤시니까 미리 나왔지 뭐. 저번에도 이런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글쎄요. 요즘 하도 정신이 없어서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명진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동민은 그런 그를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구, 엄살도 참.”

동민의 너스레에 웃던 명진은 이내 표정을 달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동민 코치, 지금껏 물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말이야.”

“네?”

“저번에 감독님이 나한테 개인 훈련시켰던 거, 그거 그만두게 된 거 동민 코치가 감독님한테 이야기한 거지?”

명진의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 농담을 주고받던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로 낮고 진지했다.

“네? 어떤 거요?”

동민은 짐짓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봤지만 뚫어져라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명진의 시선에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모른 척할 필요는 없지 않아?”

결국 다시금 다그쳐 오는 명진의 말에 동민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는 알겠지만 그거 제가 감독님한테 말씀드려서 된 건 아니에요. 감독님이 갑자기 저를 불러서, 장진운 선수가 없을 때 센터백 한 명한테 다 맡기기보다는 나눠서 맡기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면서 개인 훈련을 지시하셨으니까요. 결국 제가 한 게 아니라…….”

동민의 말은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가 제의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정호와 이주성 두 명에게 그 역할을 맡기기로 결정한 것도, 그 역할을 위한 개인 훈련을 그에게 지시한 것도 주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진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안이 이끄는 선수들 중 한 명으로서, 그리고 성남 페가수스 팀의 주장으로서 옆에서 너무나도 많이 보고 대화를 나누었던 명진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진은 확신했다. 주안은 아무 이유도 없이 혼자서 자신이 내린 결정을 뒤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고집불통이라고 말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별생각 없이 쉽게 쉽게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대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럴 사람이었으면 작년에 진운이 관련해서 내가 몇 번이나 감독한테 떠들어 댈 일이 없었겠지.’

지난 시즌, 명진은 팀의 에이스인 장진운이 계속된 선발 출전으로 지쳐간다는 것을 눈치채고 주안에게 말했지만, 주안은 당시 순위권 경쟁이 치열하다는 점을 들어서 진운에게 휴식을 줘야 한다는 그의 말을 묵살했다. 당시 주장인 그에게 온갖 말들을 쏟아냈던 것을 생각하면 주안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명진이 생각하기에 주안이 만약 자신의 의견을 수정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한 가지는 자기가 생각한 방법이 스스로 생각해도 잘 되었거나 더 좋은 방법이 있을 때, 두 번째는 누군가한테 완벽하게 논파 당했을 때. 그것도 아니면 둘 다거나.’

그전까지 계속해서 자신에게 빌드 업에 대해 말하던 것을 생각하면, 갑자기 스스로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고 자신의 훈련을 그만두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다른 방법이 생각났어도 일단 자신에게 시키던 것은 그대로 유지시켰을 확률이 높다. 그게 지금까지 그가 봐온 황주안이라는 감독이었다.

‘그러면 남은 건 두 번째, 그리고 감독한테 그렇게 말할 만한 사람은 역시 얘밖에 없단 거지.’

명진은 눈앞에서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동민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면 온 지 두 달이 가까워지는 이 어린 코치는 묘하게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차가운 주안의 태도를 감안해도 주안이 동민에게 취하는 태도는 분명 다른 이들보다 더 냉랭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렇게 주안에게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시즌이 시작된 지금은 주안이 계속해서 찾고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눈앞의 강동민이었다. 또한 명진은 그것이 대충 언제쯤부터였는지 알 수 있었다.

‘상하이 레인저스하고 있었던 친선경기, 그 이후로 감독이 묘하게 틱틱거리고 갈구면서도 써먹기 시작했지. 전까지는 보통 훈련 때 부르지도 않고, 나와도 말도 안 걸던 사람이 이제는 몇 번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그리고 명진은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렸다.

‘정호랑 주성이가 진운이 대신 후방 플레이 메이킹을 맡았던 첫 경기가 상하이와의 친선경기였지. 감독이 그 경기 전 훈련부터 나한테 맡겼던 역할을 갑자기 정호랑 주성이한테 시키는 걸로 바꾼 것도 그렇고. 분명히 얘가 관련이 되어 있을 게 분명해.’

물론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직감은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이제 노장이라 할 만한 명진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그러니까 저는 그저 감독님 이야기나 따랐을 뿐이에요. 들어온 지 이제 고작 두 달 되어가는 햇병아리인데요 뭐.”

명진은 장황하게 떠들어대던 말을 마무리 짓는 동민을 보며 다시 입가에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고 말했다.

“뭐, 아니면 됐지 뭘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어. 만약 그랬으면 고맙다고 하려고 했었지. 확실히 나한테 자신 있는 쪽은 아니었으니까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동생들이 맡아주면 나야 땡큐인 거고.”

표정이나 말투로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명진의 특기였기에, 방금 전까지 왠지 모르게 둘 사이에 흐르던 냉랭한 기류는 어느새 다시 평소와 같이 변했다.

“제가 받을 감사가 아니니까 됐어요. 감독님도 이번 시즌부터는 승격이 걸려 있으니 달라지신 거겠죠. 계속 그렇게 고집부리는 것보다 어느 정도 유연성을 갖추려고 하시는 게 아닐까요?”

다시 가벼워진 분위기에 동민 또한 마음이 편해졌는지 가볍게 말을 받았다.

“뭐, 알았어. 그럼 나중에 감독님한테 감사하다고 말해야겠네. 어쨌든 그럼 가볼게. 동민 코치 수고하고 이따가 보자고.”

“넵, 감사합니다.”

명진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동민도 그런 명진에게 인사를 하고는 슬슬 다시 들어갈 채비를 했다.

“들어가서 다시 영상 자료를 좀 정리해봐야지, 아이고야.”

조금 전, 동민이 명진이 아닌 주성과 정호에게 그 역할이 주어진 것이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고 우긴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첫째로, 주안은 자존심이 강하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주안이 자신에게 화를 냈을 때나 그 이후 주안을 도발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한다든지 자신의 영역에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사람이 관련되어 있는데 생각 없이 ‘그거 제가 낸 아이디어입니다’라고 말하면 기껏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간 주안과의 관계가 다시 흔들릴 것만 같았다.

‘애초에 그 인간도 그때 일을 묵인한다고 했었지. 까놓고 말해서 나도 없던 일처럼 해줄 테니까 어디 가서 까발리지 마라, 하는 식이었는데 뭐.’

동민은 웬만하면 그때처럼 완전히 뚜껑이 열린 주안을 보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이유는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고작 한 달 좀 넘게 있던 전술 분석관이 더 좋은 방법으로 고집쟁이 감독을 설득해서 경기를 준비시켰다. 그걸 과연 사람들이 믿어줄까?’

믿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주안에 대한 악성 루머라고 생각될 확률이 더 높았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졌다가는 주안이 폭발할 것이 분명했다. 동민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고서도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성은 지금 전혀 없었다.

‘나중에 내가 그 인간 밑에서 나갈 정도로 머리가 굵어진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 나 좀 알아줍쇼! 하고 뛰어다닐 것도 아니고 뭐. 어차피 내가 이 팀에 속한 동안은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든 감독이 했든 결과적으로 팀에 좋은 옵션만 생겼으면 된 거지. 누가 했네 쟤가 했네 따지면서 위험부담을 안고 이야기할 만큼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그거 하나로 저 성격 더러운 늙은이가 그나마 이야기가 통한다면 싸게 먹히는 거니까.’

동민은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명진은 개인 훈련을 위해 미리 옷을 갈아입으면서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감독 그 양반이 고집이 세다는 말은 전혀 한 적이 없는데 걔는 뭐라고 말했더라.’

명진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동민이 했던 말이 그대로 떠올랐다.

-제가 받을 감사가 아니니까 됐어요. 감독님도 이번 시즌부터는 승격이 걸려 있으니 달라지신 거겠죠. 계속 그렇게 고집부리는 것보다 어느 정도 유연성을 갖추려고 하시는 게 아닐까요?

‘애초에 감독이랑 제대로 이야기 안 해봤으면 그 양반이 성격 더러운 건 알아도 고집 센 줄은 모르지. 분명히 어디선가는 부딪쳐 봤으니까 그걸 아는 걸 테고.’

명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니지만, 분명 이번 시즌을 특별하게 만들 만한 무언가가 그 어린 친구에게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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