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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 (62/270)
  • 동상이몽

    주심의 휘슬 소리로 경기가 시작하고 얼마 후, 동민은 그제야 주안이 나름대로 대비를 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반전 막판하고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구성이지만 확실히 저 둘에 대한 방책이긴 하네.’

    상하이 레인저스의 가장 큰 무기라고 할 수 있는 파블로와 베인스, 양쪽의 윙을 막고 있는 것은 양 측면의 미드필더와 풀백이었다. 그것이 윙백 단 한 명에게 측면의 공격과 수비 대부분을 맡기던 쓰리백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거기다 양 측면을 맡고 있는 건 중앙 미드필더가 주 포지션인 마재호와 빠른 발하고 활동량이 특기인 공격수 서영준, 제 포지션 아닌 선수들까지 이용해서라도 어떻게든 방해하겠단 거네.’

    [마재호]

    28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1.2/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9.6/20

    선호하는 플레이: 경기 템포를 조절

    특성:

    장점 - 정확한 태클, 캐논 슈터

    단점 - 느린 발

    현재 컨디션: 6/10

    [서영준]

    24세

    잘 쓰는 발: 오른발

    성장 가능성 12.5/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8.9/20

    선호하는 플레이: 상대를 압박함

    특성:

    장점 - 두 개의 심장, 스프린터

    단점 - 새 가슴

    현재 컨디션: 7/10

    교체 직후 어수선한 상황과는 달리, 확실하게 정리가 된 지금은 두 명의 스테이터스와 역할이 확실하게 보였다.

    발은 느리지만 수비력이 좋은 마재호가 왼쪽을, 속도와 활동량을 주 무기로 삼던 서영준이 우측을 맡아 파블로와 베인스를 방해하겠다는 것이 주안의 계획이었다.

    ‘물론 확실한 대비책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데다가 적합도를 보면 선수들이 아주 익숙해 보이지는 않지만 보고서를 읽긴 읽었구나.’

    동민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양쪽 공격 루트를 압박하는 주안의 방식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스테이터스를 보는 그조차도 이런 방식을 떠올리지 못했지만 주안은 비록 불완전하다고는 해도 대응책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보니 마재호의 스테이터스를 보니까 윙백보다는 차라리 측면 미드필더에 가깝게 움직이는 게 더 익숙한가 보네. 윙백으로 돌렸을 때의 적합도가 7.8인데, 지금이 9.6인 걸 보면… 아무리 이번 경기를 대비해 측면에서 움직이는 훈련을 했다고는 해도 너무 차이가 커. 아니면 측면 미드필더라기보다는 측면하고 중앙 사이 애매한 위치에서 움직여서 그런 건가. 아예 측면으로 내몰린 것 보다는 지금이 훨씬 본래 움직임에 가깝긴 하지.’

    동민의 눈은 좌측면에서 파블로의 저지선 역할을 하고 있는 마재호를 향했다. 측면에서 안쪽으로 수비수들을 끌고 들어오는 파블로의 성향상, 측면에서 공을 잡는 일 자체보다는 안쪽으로 들어오는 움직임이 더 문제라는 것을 파악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플레이였다.

    반대로 베인스를 막는 서영준은 자신의 장기인 넓은 활동 반경으로 계속해서 공을 잡은 베인스가 자신의 플레이를 하지 못하도록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주안이 그의 보고서를 안 보고 버린 것이 아니란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였다.

    ‘안쪽으로 파고들어 흔드는 타입에겐 바깥을 내주고, 안쪽 공간을 미리 막아낸다. 반대로 직접 슈팅이나 패스로 수비를 부수는 타입에게는 아예 모기처럼 달라붙게 만든 건가. 베인스 쪽이 좀 불안하긴 하지만 확실히 효과가 없진 않을 거야.’

    동민은 주안이 꺼낸 카드들을 볼수록 자신이 너무 그를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두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한 가지는 어째서 전반전 마지막에 교체를 단행했는가 하는 경기 내부적인 의문과, 나머지 한 가지는 어째서 친선전이라며 지금까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만을 보이던 그가 이런 방책을 들고 나왔는지 였다.

    ‘첫 번째는 제대로 된 대응은 아예 후반전에 기대하고 미리 경기에 익숙해질 시간을 줬다고 생각하는 것 외엔 답이 없는데… 그 효과를 누리자고 안 그래도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는 전반전 막판을 버리는 도박 수를 날리는 사람이 있긴 있나? 있다면 그건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라고밖에 말 못 하겠는데.’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이유들 중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이유지만 동민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결정이었다. 후반전에 있을지 없을지 모를 효과 하나만 믿고서 분위기가 완전히 무너져 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동민이라면 절대로 취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내가 과소평가했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네. 저 인간 미친놈은 맞아. 그딴 짓을 하는 게 정신병자지 뭐야.”

    동민은 주안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전에는 확실한 모멸감을 가지고 말했던 말이지만 지금은 그저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주안이 생각보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이내 두 번째 의문에 대해 생각해 보려 했지만 애초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행동을 생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됐다. 뭐 갑자기 자기 꼴리는 대로 움직인 거겠지 뭐. 아니면 내가 마음에 안 드니까 지면 내 탓, 적당히 유리해지면 자기 탓으로 만들 생각이었던 건지 내가 알게 뭐람.’

    결국 동민은 무엇 때문에 주안이 이 경기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가 더 머리를 싸맸어도 그 이유가 다음 시즌 승격을 대비한 인지도 관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전반전에 흔들리던 수비가 다 안정화되어 있어. 전반전 막바지에서 사람이 바뀐 것도 전술이 바뀐 것도 아닌데 하프타임에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마크 린델은 후반전에 들어서자 급속도로 안정적으로 변한 성남 페가수스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분명 전반전 막바지 때에는 익숙하지 않은 전술에 오히려 자멸하는 것만 같았던 그들은, 후반전이 시작되자 어느샌가 제대로 발을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처럼 개인 한 명의 끈질긴 수비로 막아내는 게 아니야. 파블로가 위아래의 종적인 움직임보다는 안쪽으로 공을 끌고 들어오는 것도, 베인스가 나이가 들면서 속도가 떨어졌다는 점도 모두 파악하면서 그걸 노리고 다같이 움직이는 방식이야.’

    린델은 어렵지 않게 압도할 것이라 생각한 후반전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자 초조한 눈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우측의 파블로는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쪽에서 대기하던 수비 때문에 고전하고, 좌측의 베인스는 계속해서 붙어대는 상대 수비수들 때문에 빠른 타이밍의 패스나 슈팅을 가져가기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대책을 고심했다. 쉴 새 없이 붙어서 측면으로 밀어내려는 윙어를 제치면 풀백이, 그리고 거기까지 뚫어내면 온몸을 던져서 막아내는 24번이 베인스를 붙잡고 있었다.

    ‘이렇게 나올 수 있으면서 전반전 막판에 그렇게 허술했던 건 대체… 아니, 그때 엉성하게라도 전술을 바꾸면서 저 둘을 파악했으니까 나온 결과인가. 만약 그걸 위해서 전반전이 끝나기 전에 교체를 한 거라면… 거의 도박 수를 던진 거였군.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 도박 수가 효과적으로 적중하고 있고.’

    그는 시선을 돌려 상대 벤치를 바라보았다. 무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주안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후반전의 대응을 위해서 그런 도박 수를 던진 상대 감독을 바라보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경기가 뒤집힐 위험성이 있는데 그런 방법을 택하다니. 축구 감독보다는 카지노라도 가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배짱이야. 원 참, 이 나라에는 뭐 이런 재밌는 감독들이 많은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표정을 바꿨다.

    상대의 도박 수 같은 대응에 감탄하는 것과 이대로 경기를 계속 내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상대의 배짱에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뚫어낼 비책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볼까…….’

    노 감독의 눈은 즐거움과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주안은 상대 감독과 악수를 하러 일어났다.

    경기 결과는 1 대 1.

    전반전에 얻은 선제골을 지키려 노력한 성남 페가수스였고, 후반전 내내 잘 해내고 있었지만 결국 그들의 승리를 막은 것은 상하이의 변화와 단 한 번의 실수였다. 계속된 견제에 측면에서 안쪽으로의 돌파를 포기한 파블로가 올린 크로스가 수비를 맞고 튕겨 나온 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상하이의 주장인 장 샤오팅이 그대로 중거리 슈팅으로 연결하여 골을 만들어낸 것이다.

    후반전 내내 잘 틀어막았던 성남 페가수스지만 84분경에 단 한 번 흐트러진 집중력이 화를 부르고 말았다. 전주 드래곤즈가 그랬듯 90분 내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전력 차이로 보았을 때 분명히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타이틀을 노리는 팀과 대등하게 맞서 거의 이길 뻔한 경기력을 보여준 성남 페가수스를 보며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상하이 레인저스의 감독 마크 린델과 웃으며 악수를 하는 주안의 속내는 보이는 것처럼 마냥 좋지만은 못했다.

    누군가 그것을 눈치챈다면 다 잡은 승리를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늘 경기 내용만 생각하면 성남 페가수스의 선수들은 자신의 생각보다도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다만

    ‘내 생각보다 너무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게 문제지.’

    주안은 웃는 얼굴을 하면서도 내심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늘 경기에서 자신이 상대의 주 공격 루트인 파블로와 베인스, 양쪽 윙어들을 막아낼 방법을 떠올린 것은 맞지만 그것은 그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 망할 녀석 보고서 덕분이었지.’

    전주 드래곤즈와 상하이 레인저스의 경기가 끝나고 주안에게 전해졌던 동민의 보고서, 결과적으로 그것이 주안이 짜낸 전술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 보고서를 바탕으로 경기를 준비하고, 실패하면 동민의 보고서를 핑계로 쫓아낼 계획까지 있었지만 지금 와서는 이미 떠나 버린 열차나 다름없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면 애초에 오지도 않을 열차였을지도 모르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동민의 모습에 주안은 더 이상 그를 쫓아낼 명분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 그의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건 안 들건 곧 시작될 이번 시즌에서 저놈을 얼마나 잘 써먹느냐, 그거지.’

    자신을 칭찬하는 린델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면서 주안의 머리는 바쁘게 회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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