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월동주 (61/270)
  • 오월동주

    ‘걸리는 건… 일단 첫 번째, 묘하게 베인스한테 달려들던 24번인데…….’

    린델은 베인스가 투입되자 눈빛을 달리하면서 그를 수비하던 정호를 생각했다. 베인스와 파블로가 투입되고 나서 상대의 경기 템포를 완전히 망쳐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상하이 레인저스의 골이 나오지 않은 것은, 파블로의 말처럼 그들에게 운이 따라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생각보다 베인스에 대한 견제가 심한 탓도 분명히 있었다.

    우측에서 계속 상대 좌측 윙백의 혼을 빼놓고 있는 파블로와는 달리, 베인스는 꼭 결정적인 순간이나 중요한 타이밍에 어떻게든 비집고 나타나 방해를 해내는 정호 때문에 특유의 플레이를 펼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베인스가 워낙 유명한 녀석이다 보니까 슈퍼스타한테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달려드는 선수들도 꽤 있지만, 그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상대 감독이 경기 초반에는 전방에서 플레이 메이킹의 보조를 하고 베인스 투입 이후에는 수비에 중점을 두라고 지시했나? 그런 것치고는 상대 감독이 그 24번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을 불러서 지시하는 건 따로 못 봤는데… 아예 처음부터 베인스가 나올 거라고 상정하고 짠 작전이었나. 그래, 차라리 그게 가능성 있겠군. 경기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선택할 두 카드 중 하나니까.’

    린델은 그것이 정호의 동기부여를 위해서 동민이 베인스를 팔아먹은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그는 그 이유가 상대 감독이 베인스에 대한 대비를 최대한 해놓은 것이라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린델은 베인스를 보면서 말했다.

    “저런 선수 한 명이 달라붙었다고 제 실력을 내지 못할 네가 아닐 텐데? 자신이 늙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면 그 말은 그저 허풍이었던가?”

    놀리듯 말하는 린델을 보며 베인스는 입을 삐죽거렸다.

    “마크, 말했다시피 이상하게 그 녀석은 내가 세계 제일의 미녀라도 되는 것처럼 죽어라 따라오더란 말입니다. 더군다나 분명히 뚫었다 싶은 상황에서도 뭔가 묘하게 운이 좋은지 계속 발 끄트머리에 살짝 씩 걸려대는 느낌이라서 솔직히 말해 골치 아픈 존재예요. 당신도 지켜보고 있었으니 알지 않습니까?”

    베인스의 말에도 린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선수가 지금껏 한두 명이 아니었을 텐데 이제 와서? 엄살이 너무 심하지 않나? 옛날에 자네가 상대했던 선수들이 어떤 선수들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우리 늙은 아저씨가 몸이 옛날 같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지. 늙으면 하루만 지나도 몸 상태가 쭉쭉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는 소리도 있잖아? 뭐 어쩔 수 없는 노화라는 건가 보지.”

    린델의 말에 파블로도 끼어들어 지원사격을 해대기 시작했다. 결국 몇 번이나 이어진 두 사람의 장난 섞인 야유에 베인스는 짐짓 짜증을 섞어 대답했다.

    “어휴, 알아먹었습니다. 후반전에는 저 찰거머리 같은 24번을 바보 꼴로 만들고 판타스틱한 골을 쑤셔 박아 줄 테니 그만들 좀 해요.”

    린델은 그런 베인스의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아직 그의 머리에는 또 하나의 걸리는 점이 남아 있었다.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 나왔던 상대 교체, 그건 대체 뭐지? 그렇게 익숙한 포메이션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아예 이쪽의 허를 찌르는 것도 아니야. 아예 게임 외적인 부분에서 봐도 교체로 나온 두 선수가 관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스타성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인데…….’

    전반전 막판에 한꺼번에 두 명이나 교체하면서 포메이션을 바꾸었지만, 오히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메리트까지 잃어버린 그 변화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어떻게든 안정적으로 전반전을 마무리 짓고 후반전과 동시에 반전을 꾀했을 테지만, 상대는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이라는 애매한 시간에 변화를 준 것이다.

    ‘그냥 전술 변화가 제대로 먹혀 들어가질 않은 건가. 그렇다고 보기엔 타이밍도 이해가 가질 않아. 그냥 실수라고 보기엔 너무 허술해서 오히려 더 이상해.’

    더 고민해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린델은 더 이상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지금 굳이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를 고민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선수들의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어쨌든 우리 늙은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으니 기대해도 되겠네. 안 그래?”

    “알았다고, 이 녀석아.”

    아옹다옹거리는 두 사람을 보면서 린델은 슬슬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농담은 그쯤 해두고 다들 준비해라. 그리고 왕 류첸, 너는 조금 더 앞으로 나가서 베인스와 파블로 간의 중간거리에서 공을 연결해주 고. 단 한 골만 터지게 되면 경기는 이긴 거나 다름없어. 후반전에는 그대로 분위기 이어나가서 밀어버리면 되니까 현재 스코어에서 밀리고 있더라도 부담 없이 경기에 임해라.”

    경험 많은 노감독은 다시 한번 선수들을 격려했고, 그것으로 상하이 레인저스의 라커 룸 대화는 끝이 났다.

    “잘하고 있어요. 스코어는 그대로 1 대 0이고, 저쪽이 자랑하는 베인스랑 파블로라는 두 날개를 잘 막아내고 있었으니까.”

    주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전반전 마지막까지 골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행운과 베인스를 어떻게든 붙잡고 늘어지고 있는 정호의 수비가 함께 만들어낸 것이었지만, 후반전이 되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안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

    “이제 남은 건 후반 45분인데… 한영수, 마재호. 둘은 내가 왜 투입시켰는지 알고 있나요?”

    주안의 질문에 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주안의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어렸다.

    “그럼 후반전에는 변화를 줘봅시다. 전반전 끝나기 직전에 했던 대로 한영수와 이재영, 두 명이 최전방을 맡고 왼쪽부터 마재호, 김용성, 이주성, 오진수가 미드필드 자리를, 이문성, 오명진, 이정호, 이영준으로 포백. 연습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상대 양쪽만 잡아내면 충분히 경기 이대로 끌고 가서 이길 수 있으니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이걸로 후반전 이야기는 끝냈고 먼저 나가 있을 테니 휴식 끝나면 곧바로 나오도록 하세요.”

    그렇게 짧게 브리핑을 끝내고 주안은 몸을 돌려 그라운드를 향했다. 그리고 이를 보고 있던 동민은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찬 채 주안의 뒤를 따랐다.

    ‘연습? 감독이 4-4-2 포메이션을 연습시킨 적이 있었나? 내가 알기로는 없는데? 그리고 분명히 빠른 역습이나 조직적인 지역 방어를 자랑하던 전주 드래곤즈도 그 정신 나간 이인조를 막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의 동민을 보며 주안은 입을 열었다.

    “하나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네요. 내가 동민 씨가 생각했다는 계획 하나만 믿고서 그냥 손 놓고 있을 줄 알았나?”

    주안의 말에 동민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이 경기를 망쳐놓을 거라고 생각이라도 한 모양이죠? 자의식 과잉이 너무 심하지 않나? 물론 마음에 안 드는 건 별개로 나도 그냥 손 놓고 질 수 없는 사정은 있거든. 그러니까 같잖은 당신 보고서라도 계속 읽고서 내가 대응을 생각해 낸 거고.”

    주안의 말은 동민에게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주안이 자신의 보고서를 읽은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가 이 경기를 제대로 준비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동민에게 생각 외의 일이었다.

    그런 동민을 보면서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주안은 말했다.

    동민이 주성과 정호에게 개인 훈련을 시키는 동안 그는 그와는 별개로 경기를 준비했던 것이다. 물론 동민의 시도가 실패하면 곧바로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고 내쫓을 생각이었으나 그렇다고 경기를 준비하지 않을 수는 없던 것이다.

    “어쨌든 당신이 말했던 책임을 지니 마니는 이미 전반전으로 지나갔으니 내 결정에 토 달지 마세요. 그리고 가능하면 다음번부턴 감독을 무시하는 그따위 발언은 좀 그만뒀으면 좋겠군요.”

    그 말을 남기고 주안은 먼저 발걸음을 재촉해 벤치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동민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에게 방금 주안의 말은 충격적일 정도였다. 지금껏 자신을 내쫓을 궁리만 하는 무능 그 자체라고 생각하던 주안이 따로 대응책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한 시간 전쯤의 나한테 누가 귀띔해 줬다면 제정신이냐고 물어볼 정도였을걸. 그런데…….’

    지금껏 주안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과는 동떨어진 지금 상황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서로 얕보고 있었단 건가. 저 인간은 나를 말만 앞서는 건방진 놈으로 봤고, 나는 저 인간을 아무 능력도, 생각도 없는 금치산자 취급을 했으니까. 이런 망할. 생각해 보니 수연 씨도 저 인간이 성격은 뭐 같아도 나름 배울 점은 있다고 이야기했었지. 그렇게 들어놓고 저 인간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때문인지 완전히 잊고 있었어. 아니면 그래도 감독이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내가 너무 얕본 건가…….’

    동민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씁쓸한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라 벤치를 향했다.

    ‘전반전에 이정호와 이주성이 움직이는 걸 보면 평소보다 컨디션도 좋아 보이긴 하지만 저 건방진 놈이 나름대로 실력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가 없네.’

    주안은 벤치에 앉아 쓴 무언가를 씹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 동민의 실력은 인정할 수 있어도, 그와 자신이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양보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역시 그놈도 날 무슨 병신 같은 놈처럼 보는 표정이었단 말이지. 기분 엿 같게 시리.’

    그리고 그와 동민이 전혀 맞지 않는 타입이라는 것은 동민조차도 100퍼센트 동의할 거라 생각했다. 서로 상대를 끔찍이 싫어하기에 그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한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이상 대충 쫓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광호가 뒤에 버티고 있는 동민이기에 무능함을 지적해서 내쫓으려던 계획이 완전히 뒤틀린 것이다.

    결국 주안은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저 건방진 놈이 실력은 있다면 일단 이용해 먹는 수밖에. 마음에 안 들어도 쫓아내지도 못할 거라면 차라리 그게 낫겠지.’

    주안은 이를 갈면서도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 중에서 그나마 그것이 가장 스스로에게 좋은 선택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게 가장 서로를 싫어하면서도 한 배에 탄 두 사람은 이제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