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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의 결단 (60/270)
  • 주안의 결단

    ‘무슨 하프타임 되기 전부터 칼을 빼 드냐. 아이고, 골치야…….’

    파블로와 웨인스를 보고 한숨을 내쉬는 것은 동민도 마찬가지였다. 벤치에 있는 이상 교체 투입이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나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전주 드래곤즈와 있었던 지난 경기보다 더 많은 후보 선수들로 구성된 명단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도 잠시, 생각보다 너무 이른 시간에 투입된 두 크랙을 보자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우리 감독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라는 거지. 평소라면 그냥 틀어막을 게 뻔하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하려나. 단순하게 수비 숫자 늘리면서 틀어막는 방법은 저렇게 수비진을 뒤흔드는 타입의 선수가 둘이나 있는 상하이를 상대로는 좋은 방법이 아니고…….’

    동민은 주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안은 평소보다도 더욱 얼굴을 찌푸리고 그라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러니까 더 독수리 같네. 마음에 안 드는 생쥐라도 노려보는 표정이구먼. 그나저나 저 양쪽 측면을 어떻게 막느냐……. 뭔가 방법을 알아내면 감독한테 이야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들어줄지 안 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뭔가 떠올릴 수 있다면…….’

    주안의 표정을 보면서 투덜거리면서도 동민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렇게 동민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상하이 레인저스가 자랑하는 두 명의 크랙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기의 흐름을 완벽하게 바꾸고 있었다.

    중앙에서 뺏기지 않고 점유율을 바탕으로 공격을 이끌던 성남 페가수스의 미드필더진은 둘을 의식해서 위험한 패스를 자제했고, 역습을 사전에 차단하는 미드필더진 덕에 양 측면에서 공격적으로 움직이던 양 윙백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이 나온 이후에도 성남 페가수스의 공의 점유율은 높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한 가지였다.

    ‘아까까지 있었던 공격적인 패스들이 확 줄어버렸어.’

    두 명이 투입되기 전에는 공을 가지고 어디로 공격할지 생각을 하고 공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저 뺏기지 않는 것에 급급한, 안전한 패스들이 대부분이었다. 언제든 수비진을 휘저을 수 있는 두 명의 존재는 단순하게 경기장 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수들의 플레이를 억압하고 있었다.

    ‘다들 완전히 쫄아버렸네. 당장 등 뒤에서 뒤 공간을 노리거나, 혼자서도 수비 여럿을 이끌고 다닐 만한 선수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위축될 수 있겠지만… 이건 너무 상태가 안 좋아. 그나마 이정호나 이주성은 덜해 보이지만 나머지가 다 비슷한 상황이어서는 의미가 없어. 저래서야 아까까지 막아내고 역습을 노리기만 하던 상하이 쪽도 여유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래서 단순하게 점유율 높이기만 하는 패스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건데.’

    동민은 입술을 깨물며 그라운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예측한 대로, 계속된 공격에 빠르게 대응하는 것만 생각하던 상하이 레인저스의 선수들은 점점 더 여유를 가지고 공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동민은 점점 더 꼬여가는 경기의 상황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렇게 가다가는 실점은 물론이고 역전도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리고 동민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주안의 머릿속에서도 똑같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경기 다 뒤집히게 생겼어. 저놈이 다 책임지는 상황도 아닌 입장에서 이건 곤란한데. 어떻게 해야 하지…….’

    주안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상대에게 분위기만 내주는 것이 아니라 경기 자체를 끌려갈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한영수랑 마재호, 두 명 몸 풀어요. 곧 투입할 거니까.”

    주안은 고개를 숙인 채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자신이 내린 결정을 행하는 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짜증이 난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투였다. 그러나 그런 표정 가운데에서도 주안은 무언가를 인정하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영수랑 마재호? 대체 어떻게 하려는 거지?’

    동민은 주안의 말에 머릿속에서 한영수와 마재호의 스테이터스를 기억해 냈다.

    [마재호]

    28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1.2/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7.8/20

    선호하는 플레이: 경기 템포를 조절

    특성:

    장점 - 정확한 태클, 캐논 슈터

    단점 - 느린 발

    현재 컨디션: 7/10

    [한영수]

    25세

    잘 쓰는 발: 오른발

    성장 가능성 11.7/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7.3/20

    선호하는 플레이: 등지고 서서 공을 받음

    특성:

    장점 - 강철 몸, 로켓 점프

    단점 - 트러블 메이커

    현재 컨디션: 6/10

    둘을 떠올리자 동민은 확실히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자신이 속한 팀의 선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스테이터스를 보는 순간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훈련하는 걸 봤을 때 자기 자리 아닌 곳에서 뛰고 있던 선수들이었지, 참. 마재호는 중앙 미드필더가 본래 자리인데 좌측 윙백으로, 스트라이커인 한영수는 센터백으로 뛰고 있었어. 일하는 첫날부터 열 받았던 일인데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네.’

    동민은 새삼 떠오르는 기억에 이를 갈았다. 그러나 곧 그의 생각은 의문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지금 왜 저 둘을 투입하는 거지? 두 사람의 본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와 스트라이커인데 대체 누구를 빼고 넣으려는 건지 모르겠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양쪽 측면의 두 사람을 함께 막아줄 측면 자원일 텐데?’

    동민은 주안의 선택에 혹시 그가 실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또, 혹시나 일부러 경기를 지고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지금의 주안에게서는 그런 특유의 비릿한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선수 교체를 지시한 거지?’

    동민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로, 마재호와 한영수는 사이드라인에 서서 교체를 준비했다. 주안은 센터백인 황광우와 미드필더인 우정현을 빼고 그 둘을 투입하고는 진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동민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4-4-2?”

    동민은 주안의 속내를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한 주안은 4-4-2 포메이션을 즐겨 사용하는 감독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하이 레인저스를 상대로 하는 4-4-2 포메이션이라면, 얼마 전 전주 드래곤즈가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블로와 베인스라는 두 명의 크랙을 막지 못한 채 무너지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 둘의 투입에도 경기의 양상을 당장 바꾸지는 못했다. 성남 페가수스의 공격은 오히려 더 세밀함을 잃었고, 유효한 공격은 사라졌지만 그나마 우위를 점하고 있던 점유율마저 상하이 레인저스와 비슷해지고 말았다.

    ‘내가 건네준 보고서를 안 읽었나? 아니면 진짜 일부러 이러는 건가?’

    주안을 바라보는 동민의 눈초리에는 순식간에 의심이 커져갔다. 만약 정말로 모든 것을 동민에게 덮어씌우기 위한 보여주기 식의 대응이라면, 그는 감독과 코치라는 관계성을 당장 집어치우고 따지고 들 생각이었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 그라운드를 노려보는 주안에게 다가갔다.

    “저, 감독님. 방금 교체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자신의 말을 잘라내는 냉담한 주안의 대답에 동민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지금 교체는 어째서…….”

    “…내가 지금 그걸 당신에게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렇지 않아도 의심을 안고 있던 동민에게 그런 주안의 대답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주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말이었다. 주안의 대답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와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르려 했던 동민이었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주안은 말을 이었다.

    “지금 동민 씨가 뭘 말하려는지 짐작이 가지만, 제가 동민 씨라면 말을 조심할 텐데. 확실하지도 않은 걸로 큰소리를 치기엔 지금 모르는 게 많지 않나요? 설마 모든 연습을 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동민 씨 혼자서만 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다고 믿는 건 아니죠?”

    비꼬는 듯한 그의 말투에 동민은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기분이 그의 등골을 타고 올라온 것이다.

    그리고 주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반전의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긴 휘술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잘했다. 비록 득점은 없었지만 상대 경기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 것은 성공했으니까 전반전에 바란 최소한의 목표는 이뤄놓은 셈이다. 당황했는지 상대측 교체도 제대로 효과를 못 봤으니까.”

    린델은 라커 룸에서 상하이 레인저스 선수들을 모아두고 말했다. 그의 옆에서는 통역사인 량이 바쁘게 그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다만, 후반전에는 이걸론 부족하다. 분위기를 휘어잡았다고는 해도 골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거야. 상대가 경기 초반부터 경기를 압도하던 원동력인 42번과 24번의 후방 플레이 메이킹은 훨씬 줄어들었으니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도록 해. 경기의 흐름이 바뀐 이상 이제 후반전은 우리가 공격할 차례다.”

    린델의 표정은 경기 초반에 비해서 매우 밝아 보였다. 비록 베인스와 파블로라는 두 슈퍼스타를 빼고 경기를 이길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함께 경기장에 들어서기만 해도 얼마나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좋은 수확이었다.

    ‘파블로와 베인스가 교체 투입되자마자 상대 팀 선수들의 패스가 조심스러워졌으니까. 결국 저 둘에 대해서 아는 만큼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단 거지.’

    두 명의 교체 투입 직후 급격하게 줄어들었던 상대의 모험적인 패스들을 생각하면, 두 명의 존재는 단순히 대체하기 힘든 공격 자원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의 템포를 꼬이게 만드는 효과까지 기대할 만했다. 그러나 그런 만족스러운 결과에서도 아주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두 개 있었다.

    린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파블로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렇다 할 운이 덜 따라줘서 골을 못 넣긴 했지만 후반전에는 곧 상황이 바뀔 테니까. 저쪽 선수 교체 후엔 아예 수비가 줄어서 흔들거리는 걸 보니 아예 움츠려서 막을 생각도 없는 거 같던걸, 뭐. 아, 우리 늙은 아저씨는 살- 짝 고생하는 것 같았지만.”

    “이유는 모르겠는데 저쪽 수비수 한 명이 아주 이를 악물고 달려들던데. 그 사람만 보면 지금 경기가 친선전이 아니라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라도 되는 줄 알 정도라니까.”

    자신을 보면서 농담을 하는 파블로에게 베인스는 짐짓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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