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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의 시작 (57/270)

도박의 시작

“후… 생각대로 잘 넘어가 주긴 했는데, 긴장되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네.”

동민은 안도와 긴장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앉았다.

주안의 방을 나서 건물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동민은 당장에라도 무릎의 힘이 빠져 주저앉을 것 같은 다리를 이끌고서 자리를 옮겼다.

아직까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다리와 손은 그가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로 딱 생각한 대로이긴 한데… 저 사람 진심으로 화내는 건 진짜 상대하기 싫네. 인간 그 자체나 성격이 저 모양 저 꼴이지만 왜 현역일 적에 카리스마니 뭐니 했는지 조금 이해가 가긴 하는구먼.’

동민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라앉혔다.

주안과 정면충돌하긴 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동민이 유도한 그대로였다. 그는 일부러 주안의 자존심을 건드리고는 이번 친선경기에 이주성과 이정호가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것도 동민 자신이 원하던 대로의 역할을 맡은 채로.

“일부러 친선경기까지라고 흘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 제대로 물고 늘어질 줄은 몰랐는데. 다행은 다행인가.”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벤치에 옆으로 몸을 누이고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뒤에 있을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친선경기가 그가 성남 페가수스 팀의 전술 분석관으로서 맞는 마지막 경기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민은 미소를 지었다.

“잘돼서 지인-짜 다행이야.”

동민은 벤치에 기대 누워 떨리는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이정호 선수도, 이주성 선수도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친선경기에서 지금 훈련 중인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 경기를 토대로 감독님이 입지를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하셨으니까요. 말하자면 시험대죠.”

다른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수연을 두고 동민은 혼자서 주성과 정호에게 영상을 보며 설명하다가 생각났다는 듯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친선경기 이야기를 꺼냈다. 가벼운 어투와는 다르게 부담스러운 그의 말에 이주성과 이정호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어느 정도 깨닫기는 했지만, 지금의 위치나 움직임에 익숙해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 자리에서 제대로 플레이하는 것은 아직 먼 상태인데 벌써부터 경기에 선발로 나서는 것은 불안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동민은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감독님이 내일 있을 팀 훈련부터는 아예 다른 선수들이랑 같이 훈련하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다른 선수들, 특히 오명진 선수나 이영준 선수처럼 공을 자주 주고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하고는 확실하게 발을 맞춰봐야 해요. 아무리 프로 선수 분들이지만 미리 알고 모르고는 하늘과 땅 차이인거 아시잖아요.”

다 알고 있을 이야기를 길게 이야기하는 동민이었지만 두 사람은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투덜거리며 이야기하기에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부담감이 컸다.

그런 그들을 보며 동민은 뭔가 긴장을 풀어줄 만한 방법이 있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훈련이 끝날 때까지 그는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별말 없이 훈련을 마무리 지었다.

두 사람의 개인 훈련이 끝나고, 동민은 집에 돌아와 지친 몸을 침대에 뉘였다.

‘지쳤다. 진짜로 지쳤어. 아이고야…….’

주안과의 충돌로 원하던 결과를 이끌어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분노를 드러내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지치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래도 친선경기를 시험장처럼 만든 게 진짜 최대의 수확이야. 친선경기에서 두 사람이 잘 해내면 감독도 이제 시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동민이 건 도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주안이 동민의 부탁, 다시 말해 이주성과 이정호의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부탁의 결과를 보여주는 곳을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친선경기로 정하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가 성공한 이상 동민은 주안이 자신을 보는 시선을 바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가 이정호와 이주성이 친선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낼 거라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아직 나한테 포인트가 남아 있으니까.’

그가 지금 시점에서 믿고 있는 것은 두 명의 훈련도, 적성도 아니었다.

KFC를 이끌고 결승전까지 쓰고 남은 포인트가 3포인트, 그리고 결승전에서 승리 후 얻어낸 포인트가 또 3포인트.

총 6포인트가 아직 그에게는 남아 있었다.

‘컨디션을 올리는 데에는 한 사람당 1포인트니 포인트 양은 문제없고, 한 경기당 컨디션을 올릴 수 있는 인원수는 2명. 마침 딱 맞아. 그 두 명의 컨디션을 최대치로 만들어둔다면 분명히 경기에서 활약할 수 있겠지. 더군다나 친선경기라고는 해도 프로끼리의 경기야. 핵심이 될 두 사람의 컨디션이 최상이라면 충분히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지.’

신영대와의 결승전에서 지쳐 있는 체력으로도 전반전을 유리하게 마무리 짓도록 만들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컨디션 상승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며 동민은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만약 주안이 안다면 말도 안 되는 사기꾼이라며 동민을 매도할 테지만 알려질 일도 없거니와,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느정도 시험이야 필요했다지만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던 사람한테 다시 한번 내 능력을 써서 보여주는 건데 뭐. 난 질 내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동민은 분노에 차 아무 말도 못하고 이를 가는 주안의 표정을 상상하며 기분 좋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동민은 자신이 잊고 있던 것을 깨닫고 미소를 굳혔다.

‘상하이 레인저스에서 조심해야 할 사람은 역시 그때 봤던 웨인 베인스나 파블로겠지. 감독이 그 두 사람을 잘 막아낼 수 있을까? 만약 이정호나 이주성이 잘해도 수비가 그 두 사람한테 완전히 말려들면 도로 아미타불 아닌가?’

동민은 부디 친선경기에 베인스와 파블로가 벤치에서 휴식이나 취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기도가 통하긴 통한 건가.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님, 천지신명님, 온갖 잡신님들 감사합니다.”

친선경기가 펼쳐지는 날, 동민은 상하이 레인저스의 선발 명단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경기에서만큼은 베인스와 파블로 두 명의 에이스에게 최대한 휴식을 주겠다는 듯, 상하이는 두 선수를 모두 벤치에서 시작하게 한 것이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자 수연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뇨, 상하이 측 선발 명단을 방금 봐서요. 공격의 중심인 웨인 베인스랑 파블로 다 실바가 안 나왔거든요. 친선경기지만 경기 결과를 기대하고 보면 다행이죠 뭐.”

“베인스가요?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전주 드래곤즈랑 하던 경기 보고 오셨죠? 어땠어요? 도저히 못 막을 것 같아 보였어요? 베인스가 나이가 들었다, 들었다 하는데 아직도 굉장히 위협적이라는 이야기는 맞는 것 같은데…….”

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그 경기 관련해서 웬만한 건 다 보고서에… 아…….”

보고서에 대부분 적어놓았다고 답하려던 동민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주안에게 낸 보고서를 하물며 받은 주안 본인도 안 읽었을 것 같은데 수연이 그 내용을 알 리가 없었다.

‘밤새 죽어라 고민하고 다 쓰면 뭐하나. 보지도 않은걸. 저 인간 오늘 한번 큰코다쳐 보라지.’

동민은 멀찍이 떨어져 민호와 대화를 나누는 주안을 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수연에게 대답했다.

“베인스는 나이 들어도 베인스더라고요. 뭣 때문에 유럽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짓지 않고 중국으로 갔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어요. 좌측에서 혼자 힘으로 공격 이끌 때도 수비진 하나둘은 우습더니, 우측에 파블로가 들어가서 좀 활로가 열리나 싶으니까 곧바로 휘젓고 다니던데요. 이영준 선수나 이정호 선수가 같이 막아내야 할 텐데…….”

동민은 전주 드래곤즈의 숨 막히는 수비 안에서도 최대한 움직이며 공간을 만들어내고, 기회를 만들어내던 베인스를 생각하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전반전에 벤치에서 쉰다고 해도 후반전에 교체로 나오게 되면 이쪽은 분명히 고전하게 될 텐데. 이정호랑 이주성 두 명 컨디션 올린 걸로 대응이 될지 모르겠네. 두 명이 잘해도 경기 결과가 안 좋으면 난리칠 것 같단 말이지.’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수연의 말에 동민은 마음속으로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며 투덜거렸다.

어느덧 경기 시작이 다가오고 동민의 머릿속 고민은 상대 에이스에 대한 걱정에서 ‘어떻게 하면 주안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지 않고 이주성과 이정호의 컨디션을 올릴 수 있는지’로 바뀌었다.

‘경기 시작 전에는 아예 스테이터스가 안 보이니 컨디션을 올릴 수 있을 리가 없고, 예전에 하던 것처럼 경기 중간에 불러서 하자니 난 선수들을 부를 만한 핑계도 없고… 스로인 할 때를 노릴까 생각해도 애초에 두 명 다 스로인 던지는 포지션도 아니고. 이건 생각 못 한 난관이네.’

동민은 생각지 못한 걸림돌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동민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주안이 입을 열었다.

“동민 씨.”

그러나 생각에 빠진 동민은 그 부름을 듣지 못한 채로 더욱 해결 방법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내가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고… 그렇다고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에 어떻게든 상황을 보자니 전반전을 다 날려먹는 게 되어버리고…….’

“동민 씨.”

“네, 네?”

두 번째로 그를 부르는 주안의 말은, 수연이 동민의 옆구리를 찌르고 나서야 동민의 귀로 들어갔다.

“동민 씨가 경기 중에 내 말을 선수들 불러서 직접 전해줘요. 성남 페가수스 팀에서 전술 분석관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오늘로 끝날지도 모르는데 최대한 이것저것 움직여 보는 게 추억에는 남잖아요. 안 그래요?”

‘이 인간 또 저런 식으로 나오네. 나도 확 그냥 지를…….’

요 며칠 동안 조용하다 싶다가 다시 빈정거리기 시작하는 주안을 보면서 동민은 똑같이 비꼬는 것으로 대응하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지. 오히려 감독의 저 못난이 짓이 나한테는 기회야. 감독이 하는 말을 전하는 척하면서 두 명의 컨디션을 올릴 수 있으니까.’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떠내려 온 구명보트를 보는 심정으로 동민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전달하죠.”

동민은 미소로 대답하면서 속으로 주안을 보며 성격이 그렇게 꼬여 있어 오히려 다행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정해지고, 어느새 양 팀의 선수들은 각자의 진영에 서서 심판의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그리고 심판의 휘슬 소리와 함께 동민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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