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을 걸어라
“이런 플레이가 제가 해야 하는 거라고요?”
동민이 보여주는 영상을 보며 정호는 고민하고 있었다.
간간히 진운을 거치지 않은 전진 패스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하지 않았던 그에게 패스 루트를 직접 보고 그곳으로 동료들을 유도하는 것은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저번 시즌에 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요. 아니면 제가 센터백이라도 서보라는 말씀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다시 한 번 시도해보고 못하면 벤치에 그냥 뼈를 묻어라 그런 건가요?”
정호의 말을 뒤이어 주성의 빈정대는 목소리가 동민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주성은 이정호와는 반대로 전형적인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하는 선수들의 영상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전형적인 후방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하지 못해서 벤치로 밀린 그에게 또 그런 역할을 맡으라는 것은 그를 놀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저는 저 영상에 움직이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그대로 가져가라는 이야기를 하진 않았는데요.”
그러나 차가운 동민의 말이 주성의 빈정거림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럼 지금 이걸 우리한테 보여준 건 무슨 의미인데요? 당신네들은 이렇게 못 할 거다? 그런 의미라도 있나요?”
“아뇨, 이건 참고하라는 것밖에 안 됩니다. 저런 식의 플레이를 똑같이 해봐야 저번 시즌 이주성 선수가 했던 거랑 다를 바 없으니까요. 제가 이걸 보여 드린 이유는 이런 식으로 패스 루트를 보고 그 시작점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알려 드린 것뿐이에요.”
계속되는 도발에도 동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종환이 형에 비하면 갓난아기가 투정 부리는 거나 다름이 없는걸 뭐. 꼬장 부리는 쪽으로는 스페셜리스트를 이미 알고 있으니 이건 귀여운 수준이지 뭐.’
마음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동민은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이주성 선수는 시야도 넓고 패스도 좋아요. 패스를 어디로 주고 그 패스가 어디로 이어져야 할지도 깨닫고 있죠. 다만 머릿속에서 생각이 많아서 그렇지. 그러니까, 아래쪽으로 내려와요. 다른 선수들이 보호해 주기 쉽고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아래쪽이라면 그 생각을 정리할 만한 시간도 생기겠죠. 아래로 내려와서 긴 패스로 더 직접적으로 찬스를 노릴 수도 있고요.”
동민은 화이트보드에 주성의 이름을 쓰고 아래쪽으로 화살표를 그었다.
“그리고 이정호 선수는 반대로 판단이 빠르고 위치 선정이 좋아요. 위로 올라가서 짧고 빠르게 내주는 플레이로 경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어요.”
반대로 정호의 이름은 위쪽으로 화살표를 그어, 두 명의 화살표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교차되게 만들었다.
“두 분이 해야 할 건 이런 움직임이에요. 두 명 다 경기를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되, 두 명이 자리를 바꾸면서 서로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단점을 상쇄시키는 거요. 물론 경기에 들어서면 두 사람만 움직이는 게 아니겠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충분히 두 분이서 경기를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민의 말이 끝나고 주성과 정호에게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주성이 입을 열었다.
“그 계획,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 맞나요? 지난 시즌 내내 자기 위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지시하셨는데, 이런 식으로 큰 위치 변화를 지시하시는 건 생각도 못 한 일이네요. 무슨 바람이 부신 건지.”
주성은 주안이 생각을 바꾸었다는 사실에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동민은 주성의 말에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끄덕이는 체를 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감독님도 자기 고집을 꺾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는지도 모르죠. 그, 뭐야, 좋은 쪽으로의 변화를 위해서라면 결단이 필요하긴 하잖아요?”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동민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생각보다 눈치가 너무 좋은데. 감독 그 노친네가 자기 고집을 그리 쉽게 꺾을 리가 없지. 오명진한테 이 역할을 맡기려고 했던 것도 결국 큰 위치 변화 없이 자리만 메우려고 한 결과였으니까.’
주성의 생각처럼 실제로 주안은 선수들이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는 것을 최대한 막고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각자의 위치에서 머물면서 수비를 튼튼히 하면서 점유율을 가져가는 것이 주안의 전술 특색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에 대답을 잘못하면 단숨에 자신이 했던 말이 거짓이라는 게 들통 날 위기인 만큼, 동민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하며 넘기려 했다. 다행히 그 말을 꺼낸 주성과 가만히 듣고 있던 정호도 큰 의심 없이 그대로 지나가는 듯했다.
“어쨌든 이걸 위해서는, 이주성 선수는 롱패스에 대한 훈련과 낮은 위치에 대해서 익숙해지는 게 필요하고, 이정호 선수는 더 직접적인 압박을 받는 자리니까 공을 뺏기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니 영상을 본 뒤에는 그 점을 중점적으로 훈련할 거고요. 앞으로는 계속 이런 식으로 개인 훈련을 진행할 테니 알아두세요.”
생각보다 더 복잡한 동민의 말에 두 사람은 조금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마음을 다잡은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팀 훈련에서도 그 역할을 맡게 해 달라 이건가요? 팀의 중심축이 되는 선수가 지금 버젓이 있는데, 교체 카드로도 쓰기 애매한 선수와 센터백 중 한 명이 며칠 그거에 익숙해져서 대신할 수 있으니까 그 자릴 내어달라? 그것도 당장 며칠 후가 상하이 레인저스하고의 친선경기인데? 지금 나랑 장난합니까?”
주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동민은 그런 주안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 할 수 있으니 자릴 내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이정호 선수랑 이주성 선수뿐만 다른 선수들도 함께 그것에 반응하고 움직여 줘야 한다는 것은 감독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그 역할에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다른 선수들도 그 두 사람의 변화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두 사람의 갈등은 동민이 내일 있을 팀 훈련에서 주성과 정호를 넣고 그들에게 빌드 업을 부탁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됐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이 훈련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나머지를 희생시키라는 말을 해요? 동민 씨 진짜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주안의 기분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말에서 점점 존댓말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민은 여기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고작 며칠이지만 두 사람 다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지는 이해하는 것 같았어. 지금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도 그 둘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패스를 내줄지 익숙해져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그냥 팀에서 따로 놀게 될 거야.’
아직 익숙해지려면 갈 길이 먼 두 사람이었지만 가능성이 보이는 만큼 지금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됐다. 동민은 마음을 다잡고 주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번 일만은 저한테 맡기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제가 다 책임지라고 말씀하시면서까지요. 그러면 이번에는 절 믿으시면 안 됩니까?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친선경기 때까지 어느 정도 역할에 맞게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주안도 어안이 벙벙한 듯 말을 멈췄다. 고작 해봐야 한 달 정도의 경험을 가진 애송이의 건방진 말에 주안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그렇게 말 했겠다?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봐. 이주성이고 이정호고 너 하자는 대로 해줄게. 상하이하고 친선경기 때에도 아예 그 둘 선발로 내보내 줄 테니까 최대한 연습시키든가 지랄을 하든가 마음대로 해.”
주안의 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지난번 동민에게 크게 화를 냈을 때와 같은, 조금의 온도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잠시 숨을 들이켠 주안은 말을 이었다.
“대신에, 그 둘이 친선전에서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빌빌댄다? 그랬다간 내가 니 새끼 모가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잘리게 만들 거다. 니 뒤에 단장 놈이 있든, 누가 있든 간에 무조건. 알아들었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줄 테니까 니가 책임져 보라고.”
주안은 동민을 보며 윽박지르고는 문을 박차고 나섰다.
‘저 어린 애새끼가 대체 뭘 안다고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를 말하는 거지? 감독은 나인데. 고작해야 한 달 굴러먹은 주제에 또 나한테 도전을 해?’
주안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단 일분일초라도 저 건방진 놈과는 같은 장소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저놈이 나를 무시해? 지금까지 한 거라곤 그깟 지도자 자격증 하나 딴 새끼가 감히.’
주안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얼마 전에 일어났던 극심한 분노가 열등감에서부터 피어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감독인 자신이 고작 코치 따위에게 무시당했다는 것에서 나오는 분노였다.
“지도자 자격증 하나 빨리 땄다고 뭐라도 된 것처럼 감독인 날 무시하고 지껄여 대는 건가. 그까짓 게 있으니까 지가 당장에라도 감독이라도 된 것처럼… 쓸모도 없는 지푸라기 하나 들었다고 설치는 꼴이라니.”
해봐야 자신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할 동민이 자신에게 기어올랐다는 사실에 주안의 눈은 희번덕거리고 그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욕설이 흘러나왔다.
‘고작 며칠 연습시키고서 뭐? 친선경기 때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맡을 수 있게 해? 지랄하고 자빠졌네. 제대로 된 선수 경력도 없는 새끼가. 내가 지금까지 선수로 해온 것에 발톱의 때만큼도 못 이룬 머저리 놈 주제에 뭘 안다고.’
주안의 손은 분을 참지 못한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조금씩 그 떨림은 잦아들었다.
‘아냐. 좋게 생각하자. 프로 경험도 없는 주제에 건방진 그 눈엣가시 같은 새끼를 이 기회에 쫓아낼 수 있는 기회다. 지 놈 입으로 책임지겠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단장 그 새끼도 할 말은 없겠지.’
이를 악물고 있던 주안의 입은 조금씩 미소로 바뀌고 어느새 찢어질 듯 이를 보이며 웃는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이참에 동민을 내쫓아 버릴 수 있는 기회라면 이 정도의 분노 정도야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튕겨져 나가봐야 내가 여기저기 소문 퍼뜨리고 다니면 자리 구할 수도 없을 거다, 이 어린놈의 새끼야. 군대를 안 다녀와서 사회생활을 모르는 모양인데 이참에 제대로 교훈이나 얻는 것도 좋겠지. 그래, 이건 저 위아래도 모르는 놈이 자기 혼자서 날뛰다가 큰코다치는 일로 생각하면 된다.’
주안은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 짓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 분노로 씨근덕거리던 호흡은 금방 안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주안의 상상 속에서 이미 동민은 죽을상을 지으며 떠나는 모습으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곧 이뤄질 일이라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