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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의 시작은 거짓말로 (55/270)
  • 훈련의 시작은 거짓말로

    “제가 공을 가지고 밑에서부터 풀어야 한다고요? 진운이 형이 하던 것처럼요?”

    이정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묻어나왔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장진운이 하고 있던 빌드 업을 자신이 맡으라는 이야기로 알아들었을 테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아뇨, 그렇게까지는 아니에요. 지금처럼 전진 패스 시도 계속 해주신다고 생각해 주세요. 다만, 어디로 어떻게 주는지는 조금 생각을 다르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동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정호의 옆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

    “이주성 선수도 마찬가지로 도와주셔야 해요. 혼자서 맡아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주성은 앞에 서 있는 동민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나름대로 준주전급 수비수인 정호와는 달리 아예 벤치 멤버인 자신까지 부르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장진운이 빠졌을 때 그가 맡고 있는 후방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가끔 맡는 주성이었지만,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고 결국 그의 출전 시간은 갈수록 줄고만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뭔가 맡기겠다는 말은 듣기에는 좋았지만.

    “…코치님, 여쭤볼 게 있는데요. 이건 감독님 지시예요? 그러면 왜 감독님이 직접 말씀 안 하시는 건데요?”

    주성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번 시즌에도 이런 식이면 이적을 생각해 보고 있었지만… 갑자기 왜? 그것도 경력도 얼마 없는 막내 코치랑 전술 분석관이라고 따로 처박혀 있는 사람, 감독한테 노골적으로 무시당하는 두 명이라니. 오히려 나가라고 돌려서 말하는 건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엔 정호 형이 있는 게 이상한데.’

    그는 감독도 아닌 동민에게 불려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입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은 정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차가운 반응을 보면서 동민은 순간적으로 뜨끔했다.

    ‘확실히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시작하자마자 말할 줄이야.

    동민도 선수들 앞에서 감독에게 안 좋은 대우를 받는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부르자마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예상 이상의 일이였다. 그렇지만 그런 말로 기죽을 순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이 의심을 가지게 하면 두 명의 변화는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날 리가 없었다.

    “감독님이 직접 저하고 수연 코치한테 이 일을 맡기셨거든요. 장진운 선수 부재 시에 그 역할을 이주성 선수와 이정호 선수 두 분이서 나눠서 맡아주셨으면 한다고요. 이주성 선수가 지난 시즌 그 역할을 혼자 맡으셨는데 스스로도 알고 계시다시피 그렇게 만족할 만큼 성공적이진 않았으니까요. 감독님이 더욱 확실한 대안을 고민하셨고 그걸 저희한테 말씀하셨습니다.”

    동민의 말에 이번엔 주성이 움찔거릴 차례였다.

    “감독님이 저번 시즌에 이주성 선수한테 맞지 않은 옷을 입힌 것 같다고 생각하셔서, 이번에 저한테 그 부분에 대한 일을 맡기신 거고요. 장진운 선수 부재 시에 팀의 경기력 자체가 안정되질 않고 오락가락하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팀 최대 단점을 이번 시즌까지 계속 두고 볼 수는 없단 거죠.”

    동민의 말에 주성은 울컥한 듯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주성을 보며 동민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성 자신도 저번 시즌 자신의 활약이 좋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지적당하면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동민에게는 다행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며 동민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 시즌에는 두 분으로 하여금 더 확실한 대안을 만들겠다는 게 감독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저한테 두 분을 맡긴 거고요. 다시 말해서 다음 시즌에는 두 분의 중요성이 늘어난다는 이야기예요.”

    동민의 자신 있는 태도에 두 사람은 가지고 있던 의심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저한테 맡기신 이상, 감독님이 지시하신 장진운 선수가 없을 때의 대안 정도 수준이 아니라 확실하게 자리 잡는 또 하나의 옵션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특히 이주성 선수 본인도 벤치 자리에서 만족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동민은 도발하듯 주성을 보면서 웃고는 말을 이었다.

    “확실한 성장을 위해선 두 분의 협조가 당연히 필요하고요. 그러니 두 분은 저를 믿고 함께 개인 훈련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개인 훈련의 시작은 모레부터니까 그렇게 알고 와주시면 될 거예요. 더 확실한 이야기는 개인 훈련 시작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질문 있으신가요?”

    동민은 부드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말을 끝맺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도 되는 거예요? 두 사람이 잘 해낼 수 있을지도 문제지만, 잘되더라도 감독이 그 둘이 훈련한 대로 잘 써먹을지는 모르잖아요. 특히 이주성 선수는 지난 시즌 말부터는 계속해서 벤치 멤버였는데… 감독님이 확언한 것도 아니라면서요? 너무 무책임한 이야기 아닌가요? 만약 그렇게 연습했는데 감독이 쓰질 않으면 아예 거짓말이 되는 거잖아요.”

    수연은 불안한 듯 말했다.

    그녀가 보기에 조금 전 동민의 발언은 문제투성이였다. 감독이 확실히 말하지 않은 것을 사실처럼 말하는 데다가 선수를 과하게 자극하는 말까지, 옆에서 듣고 있는 그녀로선 말을 막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괜찮아요. 사실로 만들면 되잖아요? 감독이 저 둘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거고, 아무리 제가 싫어도 쓰게 만들 거예요. 그리고 저 두 사람이 장진운 선수의 대체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옵션이 되어야 하는 건 확실해요.”

    동민의 말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결코 근거 없이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동민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충분히 있었다.

    “지난 시즌 후반기로 갈수록 장진운 선수가 나와도 빌드 업에 고전하는 경기가 많았잖아요. 한 명한테 의존하는 팀은 그 선수의 컨디션만 흔들려도 팀 경기력 자체가 들쑥날쑥하니까요. 더군다나 그 한 명만 막으면 경기 자체가 잘 안 풀리는데 압박 넣기 쉬운 편인 정중앙에 자리 잡은 플레이어면 말 다했죠.”

    동민은 수연의 말을 가볍게 받으면서 자료들을 정리하고 수연에게 넘겨주었다.

    “거기다가 그런 생각은 감독도 똑같이 하고 있을걸요. 한 명에게 전부 맡기는 일은 위험하다는 거 말이에요. 그러니까 빌드 업 작업을 오명진 선수한테 시키려고 했지. 장진운 선수 보다는 아예 더 뒤쪽에서 시작하는 게 더 방해하기 어려우니까요.”

    동민의 말에 수연은 자료들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감독이 그런 말을 했어요? 따로 그런 말은 없었는데.”

    “그때 그러더라고요. 제가 이정호 선수한테 시키려는 걸 감독은 오명진 선수를 생각했다고. 아, 이것도 있네요.”

    동민은 수연에게 말하면서도 정신없이 자료들을 보면서 쓸 것들을 찾고 있었다. 수연은 그런 동민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요?”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고개를 들자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이 보여 물었다.

    “아뇨, 얼마 전까지는 뭔가 지쳐 보였는데 확 의욕이 늘어나신 것 같아서요. 솔직히 요즘 들어서 감독 태도가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요.”

    “글쎄요. 뭐, 일단 이게 제가 하고 싶던 일이니까요.”

    동민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주안에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런 방법도 생각 못 하고 허둥대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동민은 입을 다물고는 자신을 보고 있는 수연을 외면한 채 마지막으로 찾던 자료를 손에 들었다.

    “이거면 되겠네요. 돌아가죠.”

    주머니에는 USB를 쑤셔 넣고 가방 가득 비디오와 CD들을 든 채 발걸음을 옮기는 동민의 옆에서 수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

    “당연히 그 둘한테 보여줘야죠. 자기들이 해야 할 플레이가 어떤 건지 일단 보여줘야 하기 쉽잖아요. 패스 연습이나 그런 게 필요하다기보다는 시야나 지능이 필요한 거니까 보고 스스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어요.”

    동민은 당연한 말을 묻는다는 듯 수연에게 대답했다.

    “아뇨, 영상을 보여줄 거야 당연한 거지만 이렇게 많은 영상들에서 어떻게 다 골라내야 할지를 물은 건데요.”

    “고를 거 없어요. 전부 관련된 거니까.”

    “네?”

    동민의 말에 수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두 사람에게 보여줄 것만 골랐다고 보기엔 너무나도 많았다. 주머니에 들어 있을 USB들에, 가방 가득 들어 있는 비디오테이프까지. 작정하고 하루 온종일 봐도 다 못 볼 정도의 양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대전 이글스의 한진철, 울산 시티즌스의 홍진성과 장민복, 부천 유나이티드의 송원진. 지난 시즌 K2리그만 따져도 이 정도 선수들이 위치는 다 다르지만 롤 모델로 잡아야 할 선수들인데 자료가 많을 수밖에 없죠. 그 이전이나 아예 K리그로 눈을 돌리면 더 많고요.”

    동민의 말에 수연은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민은 그 많던 영상들을 보고, 거기서 관련된 선수들을 다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도 그 많은 걸 전부 다 보여주시게요?”

    “개인 훈련 때마다 보여줄 거니까 양이 그리 많진 않을걸요. 한동안 팀 훈련 시간 일부분까지 받았으니까 시간이 모자랄 것도 아니고요. 그 이후 훈련에 대해서는 수연 씨랑 이야기해 봐야 할 테지만요.”

    동민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이정호와 이주성에게 동민이 찾아낸 자료들을 보여주고 그 자료들을 토대로 해야 할 플레이를 설명한다. 그 이후 두 사람에게 필요한 움직임을 연습시킨다.

    “단순히 움직임을 보고 따라하는 것을 넘어서 둘 사이에서 해야 할 움직임도 있으니까요.”

    “둘 사이에서라니요?”

    “수연 씨도 아시다시피 이주성의 단점은 판단이 느려요. 대신에 패스나 시야는 확실하죠. 반대로 이정호의 최대 강점은 판단력이고요. 이정호가 이주성의 단점을 커버해야만 시너지가 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공격 시작 지점에 이정호가 앞으로 나서고 이주성은 뒤로 물러난다. 앞쪽에서 빠르게 판단하고 내주는 작업은 이정호에게, 뒤에서 긴 패스로 방향을 전환하거나 활로를 찾는 것은 이주성에게 맡긴다.

    이것이 동민이 생각한 계획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 간단해 보이는 동민의 계획은 듣는 수연조차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이었다.

    ‘동민 씨가 팀에 온 지 이제 한 달, 생각해 보면 길지 않은 시간인데 벌써 장단점 파악이 끝났다니. 게다가 생각해 보면 동민 씨는 실제 연습 때 팀을 보는 시간보다 지난 시즌 영상을 보는 시간이 더 길었을 텐데 그것만으로 여기까지…….’

    그녀는 어쩌면 감독이 동민에게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게 일단 제 생각인데 어떠세요? 여기에 맞춰서 어떤 방식으로 훈련을 해야 할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저 혼자만 생각하기에는 확실히 어려워서요.”

    그 말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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