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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터스의 의미 (53/270)
  • 스테이터스의 의미

    동민은 막다른 골목에 갇혀 있던 생각이 풀려난 듯 속이 시원해진 것을 느꼈다.

    “그래. 확실히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긴 하지만, 난 너무 내 능력에만 의존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선수가 자신의 스테이터스에 나온 플레이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그 선수가 하는 플레이가 모두 기록되는 것도 아니야. 이 당연한 걸 잊고 있었어!”

    평소엔 다른 방에서 주무실 부모님에게 방해가 될까 밤에는 통화할 일이 있어도 목소리를 낮추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지 이런 당연한 것을 잊고있었던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평정을 되찾은 동민은 냉정하게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걸로 어떤 선수들 적합할지가 딱 정해진 게 아니야. 오히려 스테이터스에만 신경 쓸 수 없으니 아예 모든 플레이어들을 다 고려해 봐야 하는 상황이지.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내가 할 일은…….’

    동민은 들고 있던 USB를 컴퓨터에 꽂고 파일들을 훑어봤다.

    “이 영상들을 다시 보면서 그 역할에 어울릴 만한 선수를 찾아야 한단 거지.”

    그 말을 하는 동민의 입가에는 다시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뭐?”

    주안은 예상치 못한 동민의 말에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런 주안의 표정을 보며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전혀 생각도 하지 않은 이름이 동민의 입에서 나오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는 주안의 표정은 걸작이 따로 없었다.

    “이정호 선수와 이주성 선수, 두 명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동민은 미소를 지으며 이정호를 떠올렸다.

    [이정호]

    26세

    잘 쓰는 발: 오른발

    성장 가능성 11.0/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0.8/20

    선호하는 플레이: 몸싸움 선호

    특성:

    장점 - 절묘한 위치 선정, 빠른 판단력

    단점 - 서툰 태클

    현재 컨디션: 6/10

    이정호는 성남 페가수스의 주전 쓰리백 중 우측을 맡고 있는 선수였다. 이정호의 스테이터스는 K2리그의 주전 수비수치고 보통 수준이며, 그가 장진운이 하던 빌드 업의 일부만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성이나 선호하는 플레이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동민이 지목한 것은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내 저번 시즌의 경기 영상들을 다시 따져보면서 얻은 결과였다.

    “이주성이야 그렇다 치고, 이정호라고? 그건 무슨 소리죠?”

    주안의 목소리는 어이가 없거나 화가 난 것보다는 순수한 의문에 더 가까웠다. 그 말을 들은 동민은 곧바로 대답을 시작했다.

    “지난 시즌 경기들을 보면서 장진운 선수가 있을 때나 혹은 없었을 때, 그를 제외한 다른 선수들의 전진 패스 시도와 패스 성공률 등을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 보고서죠.”

    동민은 보고서를 펼쳐 주안에게 건넸다. 그러자 주안은 지금껏 쳐다보지도 않던 보고서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이정호 선수는 지난 시즌에도 장진운 선수를 제외한 선수들 중에선 두 번째로 많은 전진 패스를 기록했고, 가장 높은 패스 성공률을 기록했습니다. 감독님께서 오명진 선수가 경험을 토대로 그 역할을 맡아주길 바라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정호 선수가 그 자리에 더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동민은 밤새 영상들을 돌려보고 아침에 출근해서도 자료들을 확인했던 탓에, 붉은 눈으로 주안을 바라보았다.

    ‘사실 하룻밤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지난 시즌 경기를 다 볼 수 없어서 강팀 상대 경기나 전방 압박이 심한 팀들 위주로 찾아보고 적당히 과장한 거지만, 그것만 봐도 이정호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원래도 위치 선정과 판단력이 장점인 선수였던 데다가 전진 패스 시도도 많으니 조금만 연습하면 분명 해낼 수 있겠지.’

    그런 동민의 생각을 모르는지 주안은 그저 조용하게 보고서를 읽고 있을 뿐이었다.

    ‘저렇게 조용히 생각하고 있다는 건 역시 긍정적으로 보는 건가? 확실히 이것만큼 딱 맞는 게 없긴 했지. 감독의 계획에서 크게 차이 나지도 않고, 이정호가 오명진보다도 오히려 더 잘할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동민의 입가에는 조금씩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이걸 나한테 주면서 이야기한 이유는 나보고 이걸 따르라는 이야기인가요?”

    “아닙니다. 저는 그저 조금 더 팀에 이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나보다 동민 씨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할 수 있는 말 아닌가요? 지난 시즌 직접 팀을 이끌고 지휘했던 나보다 고작 한 달 동안, 그것도 대부분을 지난 시즌 경기 영상이나 보던 자네가 더 잘 알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주안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다른 분노를 품고 있었다. 아까 주안의 목소리가 뜨거운 불같았다면, 지금은 차갑게 갈고 나온 칼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아니, 상관없어요.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말할 게 있나요? 본인 생각이 그렇다면 난 할 말 없습니다.”

    동민은 뭔가 이상하게 변하는 분위기에 이야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주안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동민은 상대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단순하게 경력도 경험도 없는 놈이 자기 계획에 반대해서? 단순히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엔 아까랑 분위기가 너무 다른데?’

    주안과 적당히 대화로 잘 풀어서 오명진이 맡고 있는 역할을 이정호에게 넘기게 할 생각이었지만, 급작스럽게 차가워진 주안의 반응은 동민의 머릿속에서 짜두었던 모든 계획을 전부 새하얗게 지워 버렸다.

    “감독님 저는 그럴 생각이…….”

    “아뇨, 말씀드렸잖아요? 동민 씨가 그렇게 생각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고요.”

    평소의 빈정거림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에 혼란스러워하며 굳어 있는 동민을 보고 주안은 말을 이었다.

    “다만,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야 본인이 말한 대로 이정호가 빌드 업을 맡을 수 있도록 훈련시켜보지 그래요?”

    “네?”

    이어지는 이야기에 동민은 더욱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말을 잃고 있는 동민을 자극하듯 주안은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한 달 만에 팀에 대해서 파악이 끝났고, 약점을 보완할 방법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동민 씨라면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요. 안 그래요?”

    “감독님, 제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라…….”

    “아뇨. 더 이상 이야기는 필요 없겠네요. 동민 씨가 맡아서 그 훈련 진행하시면 됩니다. 동민 씨는 그 정도 능력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한 거잖아요. 그러니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나가보세요.”

    말을 끝마친 주안은 더 이상은 할 이야기조차 없다는 듯 동민의 옆을 지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아직도 혼란에 빠져 멍하니 서 있는 동민의 귓가에 주안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그만큼 자신이 있고 확신이 있어서 이야기를 한 거였을 테니 잘 안 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신다고 봐도 되겠죠?”

    그 말을 끝으로 주안과 동민의 대화는 끊어졌다.

    “이런 망할…….”

    주안은 자신의 방에서 나와 휴게실에 앉아 작게 한숨을 쥐고 있었다. 아직도 조금씩 떨리는 그의 손은 그가 조금 전까지 얼마나 흥분하고 있었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그놈은 당황스러워하고 있겠지.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으니까.’

    동민의 얼빠진 표정을 생각하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스스로도 방금 그가 그렇게까지 화를 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모른 척하고 있었다. 단순한 동민의 제안에 주안이 격렬하게 반응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었다.

    ‘그놈 말을 듣고서… 나도 그놈이 말한 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스스로도 믿을 수 없지만,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 장진운 혼자서 맡고 있던 후방 빌드 업에 대한 부담을 나눠지게 하도록 한 자신의 생각보다도, 이정호와 이주성이 그 역할을 나누어 맡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주성은 제외하더라도 지난 시즌 내내 자신의 지시와는 관계없이 이정호는 많은 전진 패스들을 시도했고, 그것이 공격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던 것도 기억나고 있었다.

    자신이 일 년 동안 이끌던 팀을 고작 한 달 만에 자신보다 더욱 정확하게 평가하고, 단점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했다는 것이 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깟 애송이 놈 주제에 나보다 더 정확하게 팀을 보고 있었다고? 아니야, 경험도 없는 머저리가 그럴 리가 없어. 그냥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꼴일게 분명해. 저런 어린놈이 해봐야 겉멋만 든 게 뻔하지. 전술이 어쩌고 뭐가 어쩌고 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떠들었을 뿐인데 괜히 신경 쓴 걸 거야.’

    동민의 이야기를 듣던 내내 그는 머리 한구석에서 그것이 우연의 일치라며 동민을 폄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반대되는 생각들이 맴돌았다.

    ‘만약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그 녀석이 정말로 나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는 거라면? 그 빌어먹을 단장 놈이 말했던 굉장한 재능이네 뭐네 하던 게 그냥 립 서비스나 허황된 소리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렇다면 언젠가 저놈이 내 위치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서로 상반되는 두 생각은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맴돌면서 충돌했고, 그는 결국 차갑게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눈앞에 서 있는 동민에 대해서 생각하다가는 스스로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걸어갈 때까지도 그의 머릿속에 자리한 두 생각은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 경험도 없는 머저리가, 단장한테 낙하산으로 들어온 애송이가 그럴 리 없어. 그냥 우연의 일치일 거야.’

    ‘박 이사가 분명히 큰 사고만 저지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감독 자리를 유지시켜 준다고 했는데…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그 눈엣가시 같은 단장도 빠르게 끌어내려 주겠다고 했는데… 만약 이 새끼가 이런 식으로 내 자리를 넘보면 어떻게 하지? 단장이 끌어내려지기 전에 내 자리를 차지하려 들면 어쩌지?’

    어느 순간 두 생각은 단 하나의 결론에 다다랐다.

    ‘저놈이 내 자리를 노리기 전에 쫓아내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전까지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그의 입이 스스로의 의지로 열렸다.

    “그만큼 자신이 있고 확신이 있어서 이야기를 한 거였을 테니 잘 안 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신다고 봐도 되겠죠?”

    그 말을 하는 주안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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