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민의 고민
동민은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나설 문제는 아니지만, 괜히 오명진이 그런 플레이 신경 쓰다가 어정쩡해질까 봐 신경 쓰인단 말이지.”
본인에게 어색한 플레이를 하려다가 본인의 장점마저 사라지는 경우도 많기에 동민은 명진의 변화 시도가 불안하기만 했다.
‘오명진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로 그 자리를 채울 수는 없나? 감독이 굳이 오명진을 고집한 이유는……….’
쓰리백의 가장 핵심이면서 동시에 정 가운데 자리를 맡고 있는 오명진이 앞으로 나서면서 경기를 풀어준다면, 전체적인 전술은 그전과 같은 3-5-2에서 공격 시엔 오히려 변형된 4백의 모습에 가까워질 것이다.
‘감독의 계획은 그런 쪽인가 본데 그 계획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동시에 오명진이 그 역할을 맡지 않으려면…….’
동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수첩에 뭔가를 적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생각을 해보자 어디. 오명진이 괜한 스트레스 안 받고, 지금 감독이 생각하고 있는 전술 변화에서도 큰 변화 없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야.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보다는 분명히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생각을 정한 그에게는 이제 행동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동민의 방에는 그날 밤부터 아침이 될 때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감독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음 날 오전, 동민은 밤샘으로 붉어진 눈으로 주안의 방 앞에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졸음을 이기려 커피를 마신 탓에 아직도 속이 좋지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곧 주안과 담판을 지으려는 지금 상황이 더 신경 쓰였다.
“들어와요.”
짧은 주안의 대답에 동민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열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로 왔어요? 영상 확인하라고 내가 말 안 했었나? 아니면 이렇게 돌아다닐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았나?”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하나 건의드릴 거라고 해야 하나, 그저께 전주 드래곤즈랑 상하이를 보고서 생각해 둔 게 하나 있는데요.”
들어가자마자 야유하듯 말하는 주안을 보고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이젠 익숙하게 흘려 넘긴 동민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건의? 내가 그런 걸 생각하고 말하라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을 텐데요.”
“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지금 우리 팀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비아냥대는 그의 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하는 동민을 보면서 주안은 의외라는 듯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요. 그 생각이 뭔지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말해 봐요.”
주안의 말에 동민은 들고 있던 몇 장의 보고서를 그에게 넘기며 말했다.
“현재, 우리 팀의 전술적인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장진운 선수에 대한 의존성이 너무 크다는 겁니다. 감독님도 그걸 알고 계시니 저번 시즌 장진운 선수가 빠지거나 심하게 부진하는 경기에선 평소 쓰던 전술이 아니라 다른 전술을 쓰실 수밖에 없었고요. 그건 지난 시즌 경기 영상과 현재 훈련을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동민은 말을 돌릴 생각 따위는 없다는 듯 처음부터 정면으로 치고 나갔다.
동민의 말에 주안이 뭔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동민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바뀐 전술에서는 경기력이 비교적 떨어져 보였습니다. 장진운 선수만큼 혼자 힘으로 뒤에서부터 플레이를 만들어갈 선수가 없는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저번 시즌 내내 고치려 노력했고, 이번 시즌에는 확실히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고요. 무엇보다 지금 그게 동민 씨가 말할 필요가 있는 사항인가요? 내 전술에 대한 생각과 평가, 그리고 그 단점에 대한 수정은 내가 할 일입니다. 당신은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다른 팀 경기를 보고 보고서나 작성해서 올리면 돼요.”
동민의 말이 퍽이나 기분 나빴던지 주안의 목소리는 날이 서서 날카로웠다. 동민에게 받았던 보고서는 보지도 않고 옆으로 밀어 넘기며 가열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 맡긴 일이나 확실히 신경 쓰는 게 나을 텐데요. 아니면 단장이 입 발린 말 좀 해줬다고 자신이라면 해결할 수 있다는 헛소리나 할 생각인가요? 주제도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 주제에. 그렇게 생각이 있다면 어디 말해봐. 뭐 본인이 생각하는 방법이라도 있나? 아니면 그냥 입만 나불대는 거였나?”
뒤로 갈수록 더욱 열이 오르는 주안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동민은 으르렁대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요. 그저 이런 방법을 한번 고려해 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지, 결코 감독님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차분한 그의 말에 급격하게 흥분했던 주안도 조금씩 평정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요. 어디 들어봅시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방법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지.”
아직도 씨근덕대는 주안을 보면서 동민은 주안에게 밀려 떨어진 보고서를 펼쳤다.
“…어쨌든 다시 말씀드리자면 지금 현재 문제는 장진운에게 후방 빌드 업이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고,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선 다른 선수들에게 이 부담을 나눠서 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방향과 동일하군요. 혹시 그 결과가 오명진에게 그 빌드 업의 부담을 함께 지게 해서 의존을 떨어뜨리는 방법이라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그거거든요. 보기보단 보는 눈이 있나보군요.”
자신의 생각과 맞아떨어지자 주안의 목소리는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건방진 녀석이지만 자신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그에게는 동민을 나름 평가해 줄 만한 거리가 되었다.
“아니요, 저는 그 역할을 오명진 선수가 아니라 이정호 선수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예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지난 밤, 동민은 오명진을 대신해 다른 인원이 그 역할을 맡아줄 수는 없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솔직히 가장 좋은 건 아예 다른 선수가 그 자릴 채우는 거겠지만 그게 쉬워 보이진 않고…….”
동민은 성남 페가수스 선수들의 스테이터스를 적어두었던 수첩을 펼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람이 저번에도 보았다시피 이주성인데 얘 혼자서는 도저히 커버가 힘들단 말이야.”
[이주성]
25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1.2/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0.9/20
선호하는 플레이: 수비의 틈 사이로 침투, 정확한 슈팅 선호
특성:
장점 - 넓은 시야, 정확한 패스
단점 - 느린 판단력
현재 컨디션: 8/10
동민은 이주성의 스테이터스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패스와 시야가 장점이라고 해도 이주성을 장진운의 자리에 그대로 쓰기엔 너무나도 타입이 달랐다.
“그렇다면 결국 그 자리에서 혼자 다 맡아서 해주는 역할이 아니라 분담이어야 해. 이주성을 도와서 함께 빌드 업을 해줄 만한 녀석이 누가 있냐는 건데……. 미드필더진이나 수비진 중에서 누구를 그 짝으로 두느냐가 제일 문제구만. 아니면 공격진에서 내려오거나…….”
동민은 수첩을 뒤적거리면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딱 알맞은 특성이나 선호하는 플레이는 가진 선수는 보이지 않았다.
‘감독이 옳았던 건가. 그 역할에 맞는 선수가 없으니까 그나마 경험 많은 오명진한테 그 역할을 맡긴 건가. 아무리 스테이터스를 봐도 이래서야 결국 아무 의미가 없는데.’
한숨을 내쉬며 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기지개를 켰다. 피곤한 눈을 돌려 시계를 보자 어느새 시간은 새벽 두 시를 훌쩍 넘고 있었다.
“하이고,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생각해 보면 오명진도 자신이 노력하겠다고 했는데 괜히 내가 혼자 불안하다고 이러고 뻘짓을 하는 건지도 몰라. 혹시 알아? 감독이 옳아서 오명진이 진짜로 단점을 극복하고 빌드 업까지 완벽한 수비수가 되어줄지?”
그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려는 듯 소리 내어 혼잣말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가 몰려왔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했던 자신감은 줄어들고 불안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의 불안감은 한 가지였다.
‘사실 감독이 옳은 거 아닐까? 내가 감독을 싫어하고 인정을 못 해서 혼자서만 고집을 피우는 걸지도 몰라.’
독버섯처럼 자라난 생각은 머릿속을 점점 뒤덮고 있었다.
‘그냥 관둘까.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방법은 떠오르지도 않는데. 내일 일할 걸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잠이나 자는 게 낫겠네.’
결국 그 생각들에 진 동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속해서 훑어보던 수첩을 가방에 던져 넣었다.
“에휴, 모르겠다. 답이 안 나오네. 그냥 잠이나 자야지. 지금 자면 그래도 네 시간 정도는 잘 수 있겠지.”
그러나 수첩은 열려 있는 가방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옆으로 빗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 어제부터 왜 이렇게 던지는 것마다 다 이따위냐. 일도 안 풀리고 졸려 죽겠는데 아주 별게 다 스트레스를 주는구먼.”
동민은 결국 바닥에 떨어진 수첩을 줍기 위해 가방 앞으로 다가갔다.
“응? 이게 왜 나와 있지? 아까 수첩 꺼낼 때 같이 빠진 건가?”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저번 시즌 영상들을 담아 둔 USB였다. 주안에게 이야기를 듣고서 일을 위해 받아둔 USB가 가방에서 꺼내져 굴러다니고 있던 것이다.
‘한 달 내내 계속 보다 보니 이제 USB 생긴 모양만 봐도 피곤하구만. 이런 걸 보고 확인하는 게 내 일이긴 하지만 확실히 직접 보는 것보다는 지루하단 말이야. 전술이나 선수들 각각 움직임이야 알아볼 수 있지만 그거 외에 현장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모르는 게 큰 흠이라니까.’
동민은 마음속으로 푸념하며 USB를 넣으려 했다. 그때, 동민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잠깐, 방금 뭐라고? 선수들 각각 움직임?”
그는 자신의 말에 갑자기 눈이 뜨이는 듯했다. 그는 곧바로 넣으려던 USB를 들고 컴퓨터 앞으로 뛰어갔다.
‘그래,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전부 스테이터스에 나타나진 않을 거야. 예전에 박주현이 측면에서 파고드는 움직임을 주로 했을 때에도 선호하는 플레이에 그런 건 없었지, 경태 형이 양 측면으로 벌려주는 패스를 종종 시도해도 그게 스테이터스에 나오지는 않았어. 결국 이 스테이터스에 나오는 것은 그 선수가 좋아하면서 굉장히 자주 시도하는 플레이 정도는 되어야 뜨는 거겠지. 그렇다면…….’
조금 전까지 축 처져 있던 그의 몸은 흥분에 떨리고 있었다.
‘스테이터스에 나오지 않아도 그 플레이를 할 수는 있는 거겠지!’
동민은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자신의 머리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