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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의 고민 (51/270)
  • 노장의 고민

    “그래서 이게 그 두 팀에 대한 전술 보고서인가요?”

    주안은 자신의 의자에 앉아 동민이 가져온 보고서를 팔락거리며 훑어보고 있었다.

    “네, 특히 리그가 시작되면 더 확실해지겠지만 전주 드래곤즈의 전술 선택은 상당히 위험해 보였습니다. 상하이 레인저스가 웨인 베인스와 파블로 다 실바를 모두 내보내면서 양쪽 측면을 모두 흔들기 전까지는 오히려…….”

    “지금 읽고 있으니 조용히 해주면 안 될까요? 아니, 다 읽고 나서 나중에 뭔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게 생기면 다시 부를 테니 지금은 나가주시겠어요? 난 보고서를 작성해서 달라고 했지, 내 앞에서 일일이 다 설명하고 있으란 이야기는 안 했던 것 같은데요.”

    동민의 흥분한 목소리는 차가운 주안의 말에 잘렸다. 주안은 자신의 앞에서 흥분해 이야기를 쏟아내는 동민이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라는 듯 평소보다 칼날을 세우고 말하고 있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안에게 사과를 한 동민은 입을 다물고 그대로 주안의 방 밖으로 나왔다.

    “어제 하루 직접 안 보니까 더 짜증나게 변한 느낌인데.”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분통을 터뜨리며 동민이 향한 곳은 자판기 앞이었다. 그는 주안 때문에 타는 속을 음료수로라도 식히려는 듯 캔 콜라 하나를 뽑아 정신없이 들이켰다.

    “아으, 진짜. 진짜 축구가 즐겁고 이 일이 좋다고 생각을 해도 저 인간 태도는 자꾸 열이 받네. 저렇게 사람 성질 긁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재능의 일종 아닌가.”

    동민은 한숨을 내쉬며 자판기 옆에 설치된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제만 해도 전주 드래곤즈와 상하이 레인저스의 뜨거운 경기를 보면서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고 싶은 길에 대한 결의나 고민을 했지만, 어제 밤새도록 작성한 경기 보고서를 주안에게 전달하자마자 의욕이 다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진짜 언제까지 저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는지 두고봐야지. 나 참 더러워서 진짜.’

    동민은 주안의 태도에 투덜거리면서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일어나 휴게실을 나섰다. 어제 전주까지 내려갔다 오면서 확인하지 못한 나머지 자료들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꺼억, 저 망할 늙다리 시즌 시작하고 나서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자고.”

    수연에게 주안의 승부감이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번 시즌 영상만으로 그것을 확인하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동민은 주안에게 불신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동민은 투덜거리며 다 마신 콜라 캔을 근처 쓰레기통으로 던졌지만 캔은 쓰레기통 가장자리를 맞고 튕겨져 날아가 버렸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또… 응?”

    떨어진 캔을 주우려 발걸음을 옮기던 동민의 시선이 벤치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고 있는 남자에게 가 닿았다. 연습장 근처 벤치에 누가 앉아 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가 동민의 시선을 빼앗은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저 사람, 오명진 아냐?’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성남 페가수스의 캡틴이자 수비진의 리더인 오명진이었다. 스리백의 핵심인 그가 없으면 성남 페가수스의 전술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만큼, 그는 팀의 정신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지주인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혼자 벤치에 앉아서 수심에 잠겨 있는 것은 당연히 신경이 쓰일 법한 일이었고, 또 한 가지 동민의 시선을 끈 이유는 오늘이 선수들에게 주어진 휴식일이라는 점이다.

    ‘어제 감독이 전술 훈련 빡세게 굴리고, 4일 뒤 상하이 레인저스와의 경기 대비해서 오늘은 다들 쉬게 한다고 들었는데?’

    쉬는 날까지 명진이 연습장에 나와 있다는 점이 동민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었다. 쉬는 날까지 개인 훈련이라고 생각하기엔 나이도 노장이라는 말이 가까운 명진인 만큼 체력관리에 까다로운 주안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동민이 명진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사이 명진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동민을 알아채고 아는 체를 해왔다.

    “아, 동민 코치. 여기서 뭐하고 있어?”

    코치와 전술 분석관이라는 직함에도 나이가 꽤 차이 나는 동민이나 수연에게 편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인 서글서글한 아저씨 같은 면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감독님한테 상하이 레인저스랑 전주 드래곤즈 경기 보고서 드리고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오늘 휴식하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신 거 아니었나요?”

    동민의 말에 명진의 얼굴엔 잠시 씁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맞지. 근데 집에서 그냥 있기엔 좀이 쑤시기도 하고 그래서 나왔거든. 근데 막상 나오니까 할 게 없어서 말이야. 감독님이 오늘은 무조건 다 쉬라고 하셨으니 개인 훈련이나 할 수도 없어서.”

    웃으며 말하는 명진이었지만 동민은 그 말 이면에 뭔가 무거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감뿐이었지만 동민에게는 그 말로 뭔가를 그냥 지나치려 한다는 어떠한 확신이 들었다.

    “뭔가 고민하고 계신 것 같던데요? 지나가다가 한숨 쉬고 계시던 걸 봐서…….”

    “고민까진 아니야. 그냥 이제 애도 커가니까 나와 있는 게 더 편한 거지. 애 엄마도 시끌시끌하니까…….”

    “저한테는 그냥 편하게 말씀하셔도 될걸요. 짬도 안 되는 제가 감독님한테 뭔가 말씀드릴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햇병아리이긴 해도 저도 뭔가 도와드릴 수 있으면 돕고 싶어서요.”

    동민은 적당히 넘어가려 얼버무리던 명진을 구슬리듯 말했다. 만일 팀의 주장이 무언가의 이유로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시즌 시작 전에 곧바로 대처해야만 하는 것임을 동민은 잘 알고 있었다.

    ‘보아하니 감독한테 말한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본래 고민 상담을 한다면 감독인 주안에게 하는 것이 맞았지만 지금 명진의 상태를 보니 주안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선수들이 뭔가 말하면 제대로 들어주긴 할지 의심스러운 인간이지만.’

    속으로 다시 한번 주안의 흉을 보고 있자, 명진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동민 코치 안 그래 보이는데 생각보다 눈치가 좋네.”

    “안 그래 보인다니 너무하신데요. 결국 무슨 일이 있으신 건 맞나요?”

    그다음에 이어진 명진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주안이 얼마 전부터 명진에게 따로 개인 훈련을 시키기 시작한 것이 있는데 영 익숙해지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었다. 감독인 주안이 선수에게 플레이에 대한 새로운 훈련을 주문하고 선수가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누구나 잠깐씩은 할 수 있는 고민이었다. 다만.

    ‘그 플레이라는 것이 오명진한테 안 맞는 발재간과 탈압박, 패스 플레이라는 점이지.’

    동민은 얼마 전에 보았던 명진의 스테이터스를 다시 떠올렸다.

    [오명진]

    31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2.8/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2.8/20

    선호하는 플레이: 수비진 컨트롤

    특성:

    장점 - 강철 몸

    단점 - 부정확한 패스

    현재 컨디션: 7/10

    ‘단점이 아예 부정확한 패스인데 이런 선수한테 발밑하고 패스를 요구했다고? 그것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힐 만큼 어린 선수도 아닌데?’

    동민은 명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었다.

    “감독님은 진운이가 안 풀리거나 못 나오면 그때 아래쪽에서 풀어나가는 일을 내가 같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던데, 이게 영 쉽지가 않더라고. 예전부터 그렇게 자신 있는 부분이 아니어서 그런지 참 어려워.”

    명진은 푸념하듯 말했다.

    “장진운 선수가 밑에서 푸는 걸 같이요?”

    “그래. 그리고 진운이가 빠지는 상황이 되면 내가 위로 올라가면서 그 부분을 해결해 달라고 하신 거지. 노력해 보고 있긴 한데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쉽게 변하지는 않더라. 감독님은 자기는 서른넷까지 감독이 말하는 플레이가 다 가능했는데 너는 왜 안 되냐고, 노력이 부족한 거니 주장 직을 걸고서라도 해보라고 하시던데 참 어렵네.”

    주안이 진운이 빠진 상황을 상정하고 그 단점을 극복하려는 것은 다행이지만 이런 식으로 극복하려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가능한 사람한테 가능한 플레이를 시켜야지! 그 인간이 진짜…….’

    당장에 찾아가서 제정신이냐 따지고 들고 싶었지만 동민은 일단 참고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감독이 생각한 건 나쁘지 않아. 주 전술인 쓰리백에서 장진운의 역할은 엄청나게 중요하고 그 자리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장진운이 빠지게 됐을 때 장기에서 차포 떼고 하는 경기나 비슷한 수준이란 거니까. 감독도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그걸 고치려는 건 좋은데…….’

    지난 시즌 장진운이 빠진 경기를 보았을 때, 주안은 전술을 바꾸어 전형적인 후방 플레이 메이커를 쓰지 않고 경기를 이끌어 나갔지만 결국 주로 쓰던 전술에 비하면 어색한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 역할을 하필 왜 오명진한테 맡기려 드냐는 거지. 체격적인 우위랑 수비 라인 컨트롤로 이미 수비진의 핵심이면서 할 일을 다 하는 선수한테 단기간에 억지를 요구하다니… 어린 선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플레이스타일이나 습관이 다 굳어버렸을 이런 노장한테?’

    명진이 주안의 요구에 힘겨워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동민이었다. 자신의 오랜 단점으로 남았던 패스를 당장 장점으로 바꾸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근데 본인이 할 수 있었으니까 너도 하라? 이 꼰대는 정말 무슨 생각인지를 모르겠네.’

    동민은 이제 확신했다.

    주안은 선수로서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오히려 그 탓에 감독으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뛰어난 선수가 명장이 되긴 쉽지 않다더니만 딱 그런 케이스인가 보네.’

    동민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머릿속에서 주안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한 번 내렸다.

    “에휴, 내가 동민 코치한테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었네. 어쨌든 하다 보면 되겠지, 뭐.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다 나를 믿어서 하는 말씀이실 테니까 계속 연습해 봐야지. 어쨌든 듣기나 들어줘서 고마워. 이런 이야기는 누구한테 하기도 뭐한테 왜 이야기한 건지 나도 모르겠네. 적당히 잊어주고, 어쨌든 수고해.”

    그렇게 말을 마친 명진은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동민은 그런 명진을 보며 최대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확실히 장진운의 부담을 덜어주거나 장진운이 빠졌을 때 후방에서 빌드 업을 도와줄 방법이 필요하긴 해. 그런데 이대로 가다간 괜히 지금까지 자기 플레이로 잘하던 오명진만 꼬여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될지 몰라. 그렇다고 감독한테 관두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이를 어찌한다…….’

    동민은 다시 주워들었던 캔을 버리는 것도 잊고서 생각에 몰두했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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