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 명과 열한 명 (48/270)
  • 한 명과 열한 명

    “이제야 도착인가. 하이고, 멀기도 하지.

    동민은 기지개를 펴면서 하품을 했다.

    장장 세 시간이나 버스 안에서 있었던 피로가 몸에 단단히 쌓인 듯 온몸이 뻐근했다

    “전주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어제 그냥 늦게 자고 오는 동안 자뒀어도 됐을 텐데.”

    동민은 작게 투덜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피곤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전주까지 온 이유는 어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일 전주 드래곤즈랑 상하이 레인저스 공개 친선경기가 있으니 그쪽 경기 좀 보고 와요. 전주 드래곤즈는 어차피 리그에서도 만날 상대이기도 하고, 상하이 레인저스는 전주 이후에 우리랑 연습 경기가 있을 테니까 어느 정도는 알아보는 편이 좋겠지.”

    주안은 간단한 이야기라는 듯 동민에게 말했다.

    주안의 급한 호출에 저번 시즌 K2리그 팀들의 동영상을 보다가 달려왔던 동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내일. 내일 2시에 전주에서 있을 거니까 아침에 바로 그쪽으로 가면 될 겁니다. 상하이 레인저스는 친선전이라고 느슨하게 나올지 모르지만 전주 드래곤즈는… 그 사람은 그럴 인간이 아니니까. 분명히 전력으로 상대하려 들 테니 의미 없는 경기는 아닐 거예요.”

    ‘그 사람’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눈살을 찌푸리는 주안이었지만, 당장 내일 전주까지 가라는 이야기를 이런 오후에 한다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동민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항상 이런 식이라니까.’

    주안이 동민을 대하는 태도는 처음 일하던 날부터 한 달간 거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동민이 일을 할 땐 무시하기 일쑤였고, 대화를 할 때마다 동민의 속을 슬슬 긁는 것도 똑같았다. 주안의 태도에 짜증이 치밀 때마다 그는 수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바뀌겠지, 바뀌겠지 하면서 지낸 게 어느새 한 달인데 바뀔 기미는 조금도 안 보이는구만.’

    동민은 주안의 태도에 오히려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아직 일을 많이 한 것도 아니니까.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바뀌겠지.’

    “동민 씨?”

    “아, 예.”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동민은 주안의 목소리에 정신을 되돌렸다.

    “이야기 끝났으니 나가보세요.”

    다시 떠올려 봐도 혈압이 오르는 상황을 생각하며 동민은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그 인간은… 뭐 별수 있나. 내가 빨리 익숙해져야지. 경기 시간 전에 빨리 가기나 하자. 전주 드래곤즈에 상하이 레인저스라…….”

    전주 드래곤즈는 K2리그의 팀 중 하나로 지난 시즌 리그 3위와 FA컵 8강이라는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차지했던 팀이다.

    ‘다른 것보다 빡빡하게 틀어막는 수비가 인상적이었지. 웬만한 팀에서는 뚫기 힘들어 보일 정도의 지역 방어에 협력 수비가 강점이었고. 개인이 혼자 힘으로 헤집는 건 진짜 개인기가 뛰어난 선수가 아닌 이상 불가능해 보이던데.’

    동민은 얼마 전에 보았던 전주 드래곤즈의 저번 시즌 경기를 떠올렸다. 4-4-2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자기 진영에 들어온 상대에게 강한 압박을 가해서 볼을 탈취 후, 빠른 속도로 역습하는 것이 전주 드래곤즈의 장기였다.

    ‘거의 한 달 내내 저번 시즌 리그 경기들 돌려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 덕분에 웬만한 같은 리그 팀들에 대한 파악은 어느 정도 해뒀지만 상대 팀인 상하이 레인저스는 딱 한 가지 말고는 사전 지식이 거의 없었는데…….’

    그가 상하이 레인저스에 대해서 아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저번 시즌 C 리그 중상위권의 팀이라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얼마 전에 왕년의 슈퍼스타 공격수 웨인 베인스를 영입한 팀이라는 거지.’

    몇 년 전까지 좌우측, 중앙 공격수를 가리지 않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모두 특급 활약을 보여주었던 그는, 얼마 전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고 상하이 레인저스로 둥지를 옮긴 상태였다. 게다가 감독마저 과거 브라질 국가 대표 팀을 맡았던 마크 린델 감독을 데려오면서 몇 년 내로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노리겠다는 야망을 가진 팀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저께인가 웨인 베인스가 입국했다고 인터넷 기사에 떴던가. 요 몇 년간 아무리 실력이 떨어졌네, 늙었네, 해도 아예 사람이 바뀐 건 아니니까. 결국 오늘 경기는 웨인 베인스라는 개인을 필두로 하는 상하이 레인저스의 공격이랑 조직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주 드래곤즈의 맞대결인가.’

    상하이 레인저스의 나머지 선수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베인스에 비하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상하이 감독도 분명히 베인스의 돌파나 개인 능력을 위주로 공격을 구상했을 테고, 반대로 전주 쪽은 베인스를 경계해서 전술을 짰겠네. 기대된다.’

    동민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선수를 직접 볼 수 있단 것도 확실히 기대가 되지만, 그런 선수를 움직이는 것과 상대하는 전술을 짜낼 두 감독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한 달 동안 저번 시즌 페가수스의 영상만 보고 있던 그에게 이런 직관의 기회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려나.”

    동민의 목소리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주안의 태도가 실망스러워도 지금의 일이 즐거운 것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동민의 기대치는 경기가 시작되자 더욱 높아졌다.

    [웨인 베인스]

    35세

    잘 쓰는 발: 오른발

    성장 가능성 16.7/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6.7/20

    선호하는 플레이: 강한 슈팅 선호, 좌측면에서 안쪽으로 드리블 선호, 감아 차기

    특성:

    장점 - 드리블러, 오른발의 마법사, 캐논 슈터

    단점 - 노령화

    현재 컨디션: 7/10

    ‘확실히 단점에 노령화라는 특성을 보면 나이가 들면서 능력치가 줄어든 것은 확실하네. 저 나이에 아직도 다른 선수들보다 적합도나 가능성은 훨씬 더 상위야. 그에 반해서…….’

    동민의 눈은 베인스의 뒤에 서 있는 선수로 향했다.

    [장 샤오팅]

    26세

    잘 쓰는 발: 오른발

    성장 가능성 13.1/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2.4/20

    선호하는 플레이: 공을 잡고 템포를 조절, 아래쪽에서부터 공을 끌고 올라옴

    특성:

    장점 - 정확한 패스, 두 개의 심장

    단점 - 부정확한 태클

    현재 컨디션: 6/10

    ‘상하이에서 베인스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선수가 저 정도네. 차이가 크긴 크구나.’

    역시 나머지 선수들에 비해서 돋보이는 베인스를 제외하면 다른 인원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가며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를 노린다는 말이 의문스러운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친선전이라는 것을 의식한 듯 가볍게 준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장 샤오팅을 제외한 다른 인원들은 K2리그인 전주 드래곤즈랑 큰 차이가 나질 않는다. 결국 이번 경기에서는 진짜 말 그대로 장 샤오팅이 패스를 내주고 베인스가 혼자서 공격을 이끌게 되는 건가.’

    한 선수가 경기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동민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KFC를 이끌고 우승을 차지했을 때를 생각하면, 다른 인원들이 잘한 것도 물론 중요했지만 만약 박주현 이라는 재능의 덩어리 같은 선수가 없었다면 결과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한 명에게만 집중해서 경기를 이끌어 나갔을 때의 단점 또한 예상 가능했다.

    ‘결국 그 한 명을 막아버렸을 때나 나오지 못했을 때, 나머지 인원들이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느냐가 문제겠지.’

    동민의 예상대로 전주 드래곤즈는 휘슬이 울리자마자 베인스에 대한 집중 견제를 시작했다. 베인스가 공을 잡을 때마다 사방에서 세 명에서 네 명의 선수가 에워싸고 공을 탈취하기 위한 수비를 한 것이다. 베인스가 아무리 개인 능력이 대단한 선수라고 해도 몇 번이나 계속된 집중 견제를 뚫고서 공격을 이끌기는 힘들었다.

    ‘이 경기, 베인스가 아무리 잘해도 결국 한 방이 터지지 않으면 전주가 유리하겠는데.’

    베인스라는 특급 스타에게 의존이 강한 상하이와는 달리, 전주는 뛰어난 에이스가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도 혼자서 상대를 막거나 뚫으려 하지 않는 대신 모두가 한 팀이 되어서 수비를 하고 공격을 하는 방식이었다.

    전주의 경기는 동민이 얼마 전에 보았던 저번 시즌의 영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4명의 수비수가 깊게 내려앉고, 그 앞에 다시 4명의 미드필더가 블록을 세웠다. 그리고 그렇게 두터워진 수비 진영에서 공을 탈취해, 발 빠른 두 투톱을 노리는 패스로 공격에 집중하느라 허술해진 상대의 수비를 노렸다.

    총 8명의 블록은 서로서로 간격을 조절해 가며 그물을 만들듯 베인스의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봉쇄하고, 뚫리더라도 그 인접한 지역의 선수가 곧바로 그다음 길목을 막아 세웠다.

    ‘친선전에서 이 정도로 준비를 잘 해온 것도 대단하지만 저런 팀을 리그에서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진짜 만나기 싫은 팀인데. 저런 팀의 약점을 알아내야 한다고? 아이고야…….’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만 전주의 수비진을 보면서 동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명 한 명의 선수들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 정도로 잘 짜여진 팀을 이기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과연 상하이는 저 단단한 수비를 어떻게 뚫으려나. 지금처럼 베인스 한 명만 믿고 있다간 베인스 혼자서 계속 무리하다 턴 오버 당해서 오히려 역습당하는 그림밖에 안 그려지는데.’

    동민의 눈은 상하이의 벤치에 앉아 있는 마크 린델 감독을 향했다.

    ‘고작해야 2부 리그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잘 짜여 있어. 베인스가 이렇게 봉쇄당하는 건 예상 못 한 결과다. 저번 시즌 K2리그 3위라고 했던가.’

    상하이 레인저스의 감독인 마크 린델은 전주 드래곤즈의 끈질긴 협력 수비에 번번이 막히며 고전하는 웨인 베인스를 바라보았다.

    한두 명의 수비수 정도는 가볍게 제치며 들어갈 수 있는 개인 능력을 가진 베인스였지만 이 정도로 탄탄한 협력 수비에는 그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고작 친선전에서 이런 경기력을 보여준다고? 이게 2부 리그 팀이라는 게 믿겨지지가 않는군.’

    브라질 국가 대표 팀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독일 분데스리리가 등 온갖 강팀과 유명 리그들을 거치며 경력이 화려 한 그조차도 이런 광경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친선전이라는 생각에 시즌 시작 전의 선수들 몸 풀기 정도로 생각하던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준비하고 나온 팀을 상대하려면 이쪽도 여유 있게 경기해선 안 되겠는데.’

    유럽에서의 긴장감 넘치는 생활에 지쳐 중국으로 온 그지만, 전주 드래곤즈가 만들어낸 분위기는 그런 그의 마음에도 다시 경쟁심을 싹트게 했다.

    ‘이런 식으로만 계속 흐르면 결국 역습에 당해서 질지도 모른다. 느슨한 팀 분위기를 뭔가 바꿔야만 해.’

    린델은 고작해야 친선전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곧바로 어떻게 해야만 상대의 수비를 뚫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