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것과 달라지지 않은 것
“그래서 제 때는…….”
수연의 말을 듣자마자 동민은 노성을 터뜨리며 앉아 있던 스탠드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수연 씨한테도 비슷한 일을 했었다고요?!”
“쉿, 목소리가 너무 커요. 다른 사람들 들어서 좋은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목소리 낮춰요.”
동민은 수연의 말에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안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들어간 듯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수연은 다시 한숨과 함께 말을 뱉어냈다.
“어쨌든 맞아요. 제가 처음 왔었을 때도 비슷하게 대하더라고요. 어제 동민 씨 대할 때 뭔가 다른 사람들 대하는 것보다 저 처음 왔을 때 같은 느낌이 들어서 혹시나 했는데 결국 이런 식이었네요. 미리 말 못 해줘서 미안해요.”
“아녜요.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새로 들어오는 사람 기죽이고 자기 말 듣게 만드는 게 황 감독님 방식인가 보네요. 거참, 엄청나게 대단하시기도 하지. 국가 대표 시절에도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대하셨는지 궁금해지네요. 예전에 그렇게 유명했던 카리스마인지 뭔지는 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었나 봅니다. 어쩜 멋있으시기도 하지.”
동민은 최대한의 모멸감을 담아 비꼬아 말했지만, 그래도 그의 감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조금 전, 수연이 아까 동민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찾아왔지만, 어느샌가 두 사람은 주안의 사람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나마 조금이라도 알던 사이인 수연과 단둘이 있는 상황이 되자 동민의 입에서 조금씩 불평이 터져 나온 것을 그녀가 받아주면서 시작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연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단장님이 기대하는 사람이라는 점도 한몫한 모양이에요. 황주안 감독님을 이 팀으로 부른 건 정광호 단장님하고는 반대편의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그래선지 그 두 사람 보기보다 사이가 그리 좋진 않다고 해요. 정확히는 황주안 감독님이 정 단장님을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쪽에 가까워 보이긴 하지만요. 어쨌든 그것 때문에 저나 동민 씨를 보고서 더 심사가 뒤틀려서 그러는지도 모르죠.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단장님이 동민 씨 칭찬했을 때부터 이렇게 될지 모른다고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런 걸로 어떻게 알겠어요. 그나저나 아니, 들을수록 황당하네. 자기들 문제에 왜… 아이고, 맙소사… 뭐 저딴 인간이 다 있어.”
예상에 들어맞으면서도 오히려 본인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연의 말에 동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단장의 태도가 이유가 아닌가 싶었는데 거기에 더해서 단장과 감독의 불화라니. 상상이상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동민은 뒷골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단장 때문이었나… 거기다가 감독을 부른 쪽이 단장하고 반대편이라는 이야기는 알지도 못했어. 그것도 그럴게 그놈의 단장도 저 망할 감독한테 배워둬야 한다고 말했지 그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그렇다고 단장은 감독처럼 그렇게 티 나는 사람도 아니니… 사람 모이는 곳에 정치질 없는 곳 없다더니 무슨 이런 곳까지 정치 싸움이냐고…….’
예상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의 등장에 동민은 지금 당장에라도 다 때려 치우고, 집에 가서 씻고 자리에 눕고 싶었다. 그리고는 열몇 시간을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쉬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경태나 종환과 만나 본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정치 싸움에 끼어든 꼴이 됐다며 잔뜩 신세 한탄이나 하고 싶었다. 그 둘이라면 자신보다 저 화려한 욕설로 이 상황을 대신 표현해 줄 것임을 동민은 알고 있었다.
둘 중 어느 쪽이 됐든 지금 이 골치 아픈 상황을 내버려 두고 도망가고만 싶었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도 단장이 데려왔다고 했으니 나랑 비슷한 취급을 계속 받아왔단 거네. 나보다 몇 개월은 일찍 들어왔을 테니까.’
문득 본인에게서 생각이 확장되자 동민은 새삼 수연이 안쓰러워 보였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자신이 오기 전부터 이미 비슷한 상황을 계속 겪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이미 오늘 치 스트레스를 다 받아버린 두뇌는 파업을 선언한 듯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상황이 역겨우리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고, 더 이상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주안도, 이런 일에 대해서 조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광호도, 그리고 지금 이 길을 택한 본인마저도 지금은 그저 짜증이 날 뿐이었다.
천천히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럴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동민은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그때 동민의 생각은 수연의 한마디에 멈추었다.
“뭐, 지금은 어쩔 수 없잖아요. 일단은 버티는 수밖에.”
그 말에 동민은 무심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수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말하고 있었다.
“네?”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당장 감독님하고 뭔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바뀌진 않잖아요. 일단 버티면서 저쪽이 어떻게 변할지, 안 변하면 어떻게 변하게 만들지 생각해 봐야죠.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으니까.”
어떻게 들으면 포기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동민은 조금도 그런 생각을 느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포기하지 않고 하다 보면 뒤집을 수도 있잖아요. 추가시간에 역전승하는 것보다야 쉽겠죠 뭐. 경험자로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때 했던 것보다는 쉬울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수연의 미소가 굉장히 눈부셨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보다 더 경험도 쌓이고, 시간도 지나다 보면 어떻게든 저 더럽게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인간도 바뀌지 않겠어요? 본인이 안 바뀌어도 우리한테 이딴 식으로 취급을 하긴 힘들어 지겠죠.”
어제 동민을 보면서 말하던 것과는 다르게 중간중간 말투는 거칠었지만 그녀의 미소는 어제 이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렇죠. 그렇겠죠.”
“에이, 뭘 그렇게 힘없이 말해요. 제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건 다 동민 씨 보고 배운 건데요.”
동민은 수연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상황에 분노하고 한숨만 내쉴 줄 알던, 그리고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자신과는 다른 그녀의 모습이 아프도록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어쨌든 둘 다 상황은 비슷하니까 그 감독한테 인정을 받든, 그 사람을 구슬리든 바꿔보자고요. 저도 동민 씨도 여기서 배워야 할 게 한참 많잖아요. 황 감독 전술적으로 대단하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역시 선수 생활 오래하면서 약간 감각적으로 처리하는 부분은 역시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같이 힘내 봐요! 계속 하다 보면 분명히 그 사람도 바뀔 거예요! 둘 다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람 태도를 바꾸자고 약속해요.”
그 말을 하는 수연을 동민은 더더욱 바라볼 수 없었다.
동민은 그 후 어떻게 자신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밝게 이야기하는 수연에게 들키지 않고 어서 도망치기만을 바란 건지도 모른다.
더 이상 수연의 웃는 표정도, 밝은 목소리도 접하고 싶지 않았다. 접할수록 그는 스스로가 더러운 쓰레기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수연의 말에 기계적으로 답변하고 수긍하다가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온 것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
“아, 그 사람 확실히 좋은 사람인데, 진짜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긴 한데, 그래서 더 껄끄러워. 아오, 돌겠네, 진짜.”
동민은 침대에 기댄 채로 투덜거렸다.
어제와 똑같은 장소에 똑같은 자세로 누워 비슷한 이유로 고민에 잠겨 있다는 것이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
“아, 진짜. 뭘 날 보고 배워, 배우기는! 결국 그건 내가 했던 일이 아니라 나도 주현이한테 끌려서 했던 일인데! 그리고 왜 그렇게 착실해서 나만 되레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 같냐고!”
침대를 굴러다니며 베개를 붙잡고 소리쳐봤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수연이 동민에게 배웠다며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때, 동민은 또다시 스스로가 30대 중반의 패배자였던 강동민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녀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언제나 도망 다니기만 하고, 포기하기만 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만 지금의 자신과 겹쳐졌다.
몸은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왔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조각은 아직도 변한 것이 없었다.
“진짜 중증이네, 중증이야. 이게 트라우마인가 뭔가 하는 건가. 하이고야. 결국 어제보다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달라진 게 없잖아. 이놈의 정신머리야, 왜 마음대로 되질 않는 거냐… 왜 알고는 있는데 자꾸 이런 생각만 하면 우울해지는 거냐고.”
벌러덩 누워 천장을 보면서 한탄하던 동민은 ‘어제’라는 단어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또 어제처럼 우울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부모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 나이 처먹고 안 좋은 일로 부모님한테 말씀드리고 싶진 않으니까. 자식새끼로서 보여 드리고 싶은 모습은 그래도 당당한 모습이지 이런 꼬라지는 좀 아니잖아.’
아무리 스스로가 삼십 대 중반의 강동민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그런 바보 같은 실수를 다시 하고 싶진 않았다.
좋은 일은 나눌 수 있지만 나쁜 일은 나누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그랬다간 그땐 정말로 다시 자괴감과 열등감투성이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진짜 스스로 생각해도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별게 다 난리구먼. 아이고, 두야…….’
그런 생각을 하며 살며시 방문을 열고 밖을 보자, 다행히 자신이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에 부모님이 돌아오시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일단 씻고 눕든가 아니면 다른 일이라도 하든가 해야지. 계속 이런 걸 생각해 봐야 뭐하겠어. 이럴 땐 그냥 뭔가 다른 일에 열중하는 게 제일 낫지.’
그제야 그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것을 멈추고 욕실로 발을 옮겼다.
지금 아무리 잡생각이 들어도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머릿속에 남지 않을 테고, 지금 기분이 어떻든 내일도 나가 수연이나 주안의 얼굴을 보아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동민은 다시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내 버리려 애썼다.
‘그래, 내일도 어차피 나가서 일해야 하는 건 같으니까. 정신 차리자, 정신.’
동민은 뺨을 두드리고는 앞으로 이어질 자신의 코치 생활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의 마음속에 벌어진 옛 상처는 조금도 아물지 않았지만, 동민은 일에 집중하는 것으로 그것을 잊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