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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밖의 재회 (44/270)
  • 예상 밖의 재회

    “이쪽부터 정상수 골키퍼 코치, 여긴 존 데이먼 체력 코치, 그 옆이 통역인 김상훈, 황지우 코치, 그리고…….”

    민호는 한 명씩 줄줄 이름을 말해주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여기가 우리 팀 막내이자 유일한 여자 코치 한수연 씨. 동민 씨랑 나이는 같은 걸로 기억하는데 맞지?”

    민호의 말에 동민의 눈은 상훈의 뒤에 있던 사람을 향했다. 그리고

    “어?”

    “아, 안녕하세요.”

    그곳에는 본 적 있는 얼굴의 여성이 서 있었다.

    2년 전에 본 뒤로 그 후엔 만난 적도 없었지만 보자마자 동민은 알아볼 수 있었다. 대회 때 자신과 경쟁했던 사람 중 한 명인 수연이었다.

    “여기에서 뵐 줄은 몰랐네요. 단장님이 전술 분석관을 새로 영입한다는 이야기는 있었는데 그게 동민 씨일 줄은 몰랐네요.”

    “저도 여기 계실 줄은 몰랐어요.”

    웃으면서 인사하는 수연을 보고 동민은 생각지 못한 재회에 당황했다.

    “응? 두 사람 아는 사이였어?”

    아는 체하는 두 사람을 보며 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2년 전에 사회인 축구 대회에서 만난 적 있었어요. 그때 제가 매니저로 있던 팀이 동민 씨가 감독으로 있던 팀한테 져서 떨어졌고요.”

    “감독? 동민 씨, 2년 전에 아마추어 팀 감독도 맡았어?”

    수연의 말에 민호와 다른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민을 바라보았다.

    “아, 아뇨. 그게 맞기는 맞는데 정식적인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동아리에서 선수들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비슷한 일을 한 것뿐이지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요…….”

    동민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들에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팀에 온 첫날부터 이런 과도한 관심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가뜩이나 감독한테 뭔가 처음부터 아니꼽게 보인 상황에서 이렇게 관심 받는 건 영 안 좋은데. 거기다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다 나보다 경험 많은 사람들일 텐데 그런 걸로 높게 평가해 봐야 같잖다는 평가밖에 더 받겠냐…….’

    그러나 동민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때 동민 씨가 있던 팀이 결국 우승까지 했잖아요. 그때는 정말 대단했어요. 후반 막판에 두 골이나 몰아넣으면서 밀리던 경기를 재역전극을 쓰고 우승했잖아요. 보면서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아, 그, 그 결승전 때 보고 계셨어요?”

    신이 나서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수연을 보면서 동민은 당장 머리를 부여잡고 싶었다.

    ‘이 사람 이런 성격이었나? 이 사람 못 보는 사이에 갑자기 왜 이렇게 나에 대한 평가가 좋아졌지? 분명히 지난 2년 동안 본 적도 없을 텐데.’

    못 보는 동안 자신에 대한 수연의 평가가 왜 이렇게 심하게 고평가로 바뀌었는지 그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물론 칭찬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광규가 이끄는 신영대와의 결승전에서 동민과 KFC가 보여준 모습은 수연에게 큰 영향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나라면 순식간에 경기가 뒤집히고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 상황에 절망했을지도 몰라, 아니, 아마 내심 포기했을 거야. 그 정도로 후반전 들어서 신영대의 경기력은 대단했으니까. 그런데 저 사람은 달랐어.’

    수연은 결승전에서 마지막까지 선수들을 독려하던 동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이미 끝나가는 경기 막바지에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그를 보며 받은 그 감동은, 자신이 가장 응원하는 수원 블루 데빌즈가 극적으로 우승을 한다고 해도 받지 못할 커다란 충격이었다.

    C급 지도자 자격증까지 땄지만 동아리에서 단순히 잡무나 도와주는 매니저로만 취급받는 상황에 지쳐 있던 그녀에게, 동민의 결승전은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며 롤모델이 되었다.

    Մ니다. 적어도 네가 다른 사람, 그것도 너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사람 앞에서 네가 옳다고 설득하려면 그 사람이 믿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니면 적어도 상대가 너에 대해서 인정하는 부분이 있게 해야지. 같은 말을 해도 일을 시작한 지 고작 몇 달 뿐인 애송이보다는, 적어도 좀 더 오래 보면서 믿을 만하다고 느낀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테니까.”

    kʔ데.’

    물론 그런 사실을 모르는 동민은 수연의 칭찬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이야, 수연 씨가 이렇게까지 신나서 말하는 건 처음 보는데. 그때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네.”

    “그러게요. 지금까지 조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 그렇게 막 대단한 건…….”

    수연의 계속되는 칭찬에 다른 이들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동민은 진땀을 흘리면서 말을 흐렸다.

    “뭘, 단장님도 어리지만 실력 있는 친구가 올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수연 씨 이야기 들으니까 더 기대되네. 앞으로 잘 부탁해.”

    동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호는 기대한다며 동민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수연 씨가 동민 씨 좀 여기저기 안내해 줘. 연습 마무리 짓는 건 우리가 할 테니까.”

    “예? 아니, 그건…….”

    “괜찮아, 괜찮아. 이건 어차피 우리 할 일이니까 수연 씨는 동민 씨 안내나 부탁해. 그럼 이따가 봐. 감독님이 찾거나 하면 연락할 테니까.”

    수연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민호와 다른 사람들은 손을 흔들고는 먼저 자리를 떠나 버렸다.

    “흠… 어쩌죠?”

    동민은 곤란스러워하는 수연을 보면서 혼자서라도 돌아볼까 고민했지만, 수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다른 분들이 정리해 주신다니까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럼 일단 어디부터 보여 드리면…….”

    웃는 얼굴로 동민을 안내하려는 수연이었지만 동민은 그 웃는 표정 직전에 스친 곤란한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티는 안 내도 안내해 주기 귀찮은 건가? 뭐, 본인도 엄연한 코치인데 막내라고 자기보고 연습 끝내고 하는 마무리 대신 새로 오는 사람 안내나 부탁하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들긴 하겠지. 그래도 막상 저런 표정을 보는 건 역시 좀 그런데……. 그냥 혼자 돌아보는 게 더 마음 편하겠네.’

    “다른 할 일 있으시면 그냥 혼자 돌아볼게요. 바쁘신데 괜히 방해하는 것보다는…….”

    “아녜요. 정말 괜찮아요! 그럼 가실까요?”

    동민의 말에도 수연은 고개를 저으며 먼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 계실 줄은 몰랐네요.”

    수연에게 안내를 받으며 걷고 있던 동민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뒤를 돌아보자 동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2년 전에 같이 대회에 나갔었는데 여기서 보니까 뭔가 신기해서요. 그러고 보니 단장님이랑 이야기할 때 저보다 먼저 제의한 젊은 코치가 있다고 했었는데 그게 수연 씨였나 보네요.”

    동민은 얼마 전 광호와의 대화에서 들었던 ‘자신과 연배가 비슷한 여자 코치’가 누군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 단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동민의 이야기에 수연은 얼굴을 붉혔다. 코치로서의 길을 다시금 결정하게 하는 계기가 된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부끄러운 그녀였다.

    “네. 저한테 이야기할 때 그러시더라고요. 그럼 언제쯤 여기에 들어오신 거예요?”

    “저도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어요. 해봐야 반년 정도니까 아직도 다른 분들 보면서 배우는 중이에요. 1군에 여성 코치는 드무니까 아무래도 조금 힘든 면도 있지만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즐겁죠.”

    그녀의 말이 뒤로 갈수록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고 다시금 그녀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스쳤지만, 이번에는 동민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저도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니 놀랐어요. 결승전 때 경기 보고서는 진짜 인상 깊었거든요. 경기 끝나고 만나 뵙고서 말씀드릴까 했는데 워낙 바빠 보이셔서…….”

    “아하하… 그냥 신경 안 쓰셨어도 되는데…….”

    다시 예전 이야기를 시작하며 말이 많아진 수연을 보며 이번엔 동민이 곤란한 듯 웃었다. 대체 그 결승전의 무엇이 그녀에게 하여금 이렇게까지 이야기하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칭찬이야 당연히 기분 좋고, 그때가 추가시간에 역전이었으니 드문 경기긴 하지만 2년이나 지나고도 이런 반응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따지고 보면 이 사람 BU가 이긴 3, 4위전을 더 기억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그때 결승전에 계셨을 줄은 몰랐어요. 그 뭐야, BU가 있던 3, 4위전 직후이기도 해서… 아 참, BU도 그때 3위였죠? 너무 늦었을지 모르지만 축하드려요.”

    동민은 뒤늦은 축하의 말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그 연도의 대회는 굉장히 드물게도 1위부터 3위가 모두 대학교 팀이라는 상황으로 끝났다. 그 결과 앞으로는 사회인 축구 대회라는 말이 무색하게 대학 팀이 계속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당장 다음 연도에도 상위권에 머무른 팀은 신영대 단 한 팀뿐이었다.

    “너무 늦은 거 아닌가요? 사실 저희 쪽 경기 끝나자마자 보러 갔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경기를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2년이나 늦은 동민의 말에 수연은 작게 웃었다.

    그 화사한 웃음에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 동민이었지만 아까부터 의문이었던 것을 입에 담았다.

    “그렇게까진… 그때 경기에 대해서 너무 고평가하시면 제가 부끄러워서요. 후반전 들어 상대 쪽에 계속 끌려가던 경기였으니까요.”

    동민에게 결승전은 후반 막판에 뒤집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운도 따라준 결과였지, 후반전의 시작과 함께 광규의 노림수에 걸려 넘어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던 경기였다.

    “아뇨, 그래도 대단한걸요. 사실은…….”

    수연은 그때를 회상하며 그렇게 자신이 그 경기에서 느낀 것을 동민에게 그대로 전했다.

    축구 코치라는 자신의 꿈이 조금씩 흔들릴 때 그것을 정면에서 바꾼 계기가 바로 그 경기였고, 그중에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선수들을 독려하던 동민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때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수연의 모습을 보며 동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와 같은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이번에는 동민의 가슴을 따끔거리게 만드는 미소로 보였다.

    ‘그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건 사실 내가 아니었는데…….’

    신영대에게 압도당하는 경기를 보면서도 동민이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았던 것은 컨디션과 체력이 바닥을 보이면서도 혼자서 빈 공간을 찾아 달리던 주현을 보고 나서였다. 주현이 끝까지 열정을 가지고 뛰는 것을 본 뒤에야 동민도 흔들리던 본인의 마음을 다잡고 팀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기억하는 그에게 밝게 빛나는 수연의 미소는 양심을 찌르는 가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수연에게 이야기하기엔 그녀의 미소가 너무 눈부시기도 했다.

    결국 수연의 말 이후 동민은 안내가 끝날 때까지 어색한 미소로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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