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투자
“그럼 정식 계약도 해야 하고 하니까 조만간 직접 연습장에 나와주셨으면 하는데, 혹시 언제쯤 시간이 제일 괜찮으신가요?”
“연습장예요?”
되묻는 동민에게 광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스태프들이나 선수들하고 미리 만나보시는 쪽이 좋잖아요?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중고등부 코치로 계약하게 되지만 실질적인 일은 1군 전술 분석관이니까 감독님이나 선수들하고 가능한 한 빨리 알게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중고등부 선수들이나 코치도 만나보시면 좋겠지만, 그쪽은 거의 이름뿐인 관계에 가까우니까 중요한 건 1군 쪽이거든요.”
“아, 그렇죠. 참, 그 전술 분석에 대해서 한 가지 따로 요청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하하, 벌써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어요? 어떤 요청이시죠?”
동민은 마른 입술을 핥고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비디오로 보는 것보다 직접 제가 눈으로 경기를 보고 분석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불가피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직접 보는 편이 훨씬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비디오로 보는 건 개인적으로 조금 떨어지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서요. 그, 직접 보러가는 교통비에 대해선 제가 사비를 들이는 일이 있더라도…….”
그는 자신 있게 말하려 했지만, 뒤로 갈수록 그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결국 말끝을 흐렸다.
동민의 능력은 본인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경기를 볼 때만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다. 경기를 녹화한 영상이든, 티비 생중계든 그가 직접 볼 수 없다면 그의 능력은 발동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능력을 자각한 이후 가장 먼저 확인한 것 중 하나다.
만일 직접 경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보고 분석하게 된다면 그의 가장 큰 장점인 스테이터스를 보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반쪽뿐인 분석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만은 확실해. 직접 보지 못하는 일이라면 내가 제대로 분석할 수 없어. 정말로 이건 양보할 수 없는 문제야.’
동민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가진, 사기에 가까운 능력을 쓰지 못한다면, 그는 그저 갓 B급 라이센스를 딴 애송이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이것만은 그가 어떠한 고집을 부려서라도 지켜야 하는 선이었다.
“아, 그런 이야기인가요?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임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데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리고 직접 돌아다니시는 교통비에 대해서는 구단에서 부담할 테니 그런 걱정은 마시죠. 감독님 요청에 따라서 분석하러 이동하는데 교통비를 지급하지 않을 리가 없잖습니까. 아, 그럴 일은 적겠지만 해외라면 그건 아직 좀… 나중에 혹시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라도 나가게 된다면 모를까…….”
“괘, 괜찮나요? 움직이는 게 꽤 많을지도 모르는데…….”
“당연합니다. 그리고 영상을 보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게 더 확실하다는 것은 비단 동민 씨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영상으로 녹화하고 분석하는 것은 더 자세히 꼼꼼하게 볼 수는 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아무래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 수도 있으니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동민은 최악의 경우에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계약하기 힘들다는 말까지 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우려와는 반대로 시원하게 승낙하는 광호를 보면서 다리의 힘이 풀렸다.
“그 이외에 다른 요청은 혹시 또 있으십니까? 어느 정도 선까지라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아, 아닙니다. 없어요. 감사합니다.”
생각한 것보다 가벼운 광호의 태도에 동민은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저번에 그가 말했던 것처럼 동민에 대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투자한다는 느낌에 동민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수로 뛰던 학생 시절과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미래까지 합쳐봐도 이 정도의 기대를 직접 받는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기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언제가 좋을지… 아, 다음 주 월요일 점심쯤 한 번 찾아오시겠습니까? 그때 계약도 진행하고 스태프들과 선수들도 만나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네, 네. 알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말씀이시죠?”
“네. 그럼 실례지만 저는 급히 또 가볼 곳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동민은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에 당황하면서 승낙했고 광호는 웃으며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동민은 홀로 자리에 앉아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그렇게 바라던 길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것도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조건으로.
“진짜로 꿈은 아니겠지……?”
그는 과거로 돌아온 첫날처럼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이것이 꿈이라면 깨지 않기만을 바랐다.
광호는 차 안에서 조금 전 보았던 동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어떤 식으로 일할지 꽤나 고민을 해온 느낌이었는데. 이 감독이나 하 감독이 말했던 본인의 가장 큰 장점을 어떻게 보여줄지…….’
신영대와 KFC간의 결승전 이후 광호는 병렬과 광규를 통해 동민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두 명에게 들었던 동민의 가장 큰 장점은 유연한 전술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침착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도 아니었다.
‘게임의 흐름이나 선수들의 특징, 장단점을 잘 잡아낸다.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 것도, 자신의 팀의 강점을 찾아내는 것도 능숙하다.’
다시 말해, 경기와 선수를 보는 눈이 탁월하다.
그 두 사람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남 듣기 좋은 말을 안 하는 것으로 유명한 병렬조차도 그렇게 말했고, 그에게 연습 경기까지 두 번이나 패배했다는 광규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들은 결과가 바로 전술 분석관이라는 자리였다.
가장 동민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감독과 자주 접촉할 수 있어 팀을 이끌어 나가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자리. 그것이 광호가 동민에게 전술 분석관으로 일해 달라고 말한 이유였다.
‘이론상으로 가능한 최단 시간 내에 B급 지도자 자격증을 딴 것을 보면 확실히 그 두 사람이 허풍을 떤다고 보긴 힘들지. 과연 그 황 감독 밑에서 기대에 맞춰줄 수 있을까?’
동민의 앞에서는 적극적으로 그의 재능을 신뢰한다고 말했고 그 말이 거짓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 광호에게 동민은 미래를 위한 투자에 가까웠다.
‘적어도 3년 내에 K리그에서 자리를 잡는 팀이 되기 위해서의 준비도 필요하지만, 그 이후에 대한 준비도 필요하니까. 이 투자가 제대로 된 결과를 가져왔으면 좋겠는데.’
그는 동민이 나중에 K리그의 강팀으로 자리 잡은 페가수스 팀을 이끄는 감독으로 커주길 바라고 있었다. 젊은 나이와 깔끔한 외모, 그리고 팀에서 키워낸 감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프랜차이즈 스타로 만들어질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건 나머지 한 명도 마찬가지지. 똑같이 젊은 나이, 나이에 비해 높게 평가되는 재능, 그리고 그쪽은 남자 프로 축구에 드문 여성 코치라는 점도 눈에 띄고. 확실히 그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성공한다면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될 가능성은 충분해. 성공한다면, 이지만.”
광호는 혼잣말을 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재능 있는 어린 선수가 대형 스타가 되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그 두 사람이 광호의 바람만큼 성장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재능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채로 선수 생활을 마치는 선수들처럼, 감독이나 코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성남 페가수스는 그 두 사람에게 투자한 것 몇 배의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일단은 황 감독 밑에서 잘 버티고 배운다면 좋겠는데.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능력 자체는 그렇게 바닥을 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아직도 이름값 때문인지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광호는 현재 성남 페가수스 팀의 감독인 황주안을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그 두 사람이 주안의 밑에서 잘 성장해서 나중에 팀을 K리그에서 손꼽히는 강팀으로 만들어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오늘이 단장으로서 자리를 잡는 2년 동안 생각한 비전의 첫 걸음인가. 이제 중요한 건 그 두 사람이 얼마나 성장을 하느냐, 그리고 팀이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두느냐.’
광호는 머리를 흔들어 더 이상의 생각을 털어냈다. 아직 기대에 빠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빠르게 차를 몰아 다음 약속을 향했다.
“그래서, 결국 승낙한 거냐?”
전화기 너머 병렬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거칠었지만 동민은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기쁨은 알 수 있었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놓치기 아까운 기회니까요. 성남 페가수스 팀도 나름 알아봤는데 정원 건설에서 밀어주는 것 같더라고요. K2리그에서 저번 시즌은 5위지만 어린 선수들 영입도 활발하게 시도한다는 소식도 있고, 주로 다음 시즌이 기대된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그 단장이 말한 대로 야심이 있단 거겠죠. 저한테 기대를 거는 것도 그 일환이란 거잖아요.”
대답하는 동민의 목소리도 흥분으로 아직까지 떨리고 있었다.
“확실히 여러모로 알아보긴 한 모양이구나. 저번에 말한 대로 연결시켜 주는 것까진 해줄 수 있지만 결정을 하는 것도,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니가 지는 거니 난 해줄 말이 없다. 이제 그저 열심히 하거라. 내가 지금 해줄 말은 그것뿐이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모로 생각도 해봤고요. 그래도 직접 경험할 만한 자리는 드물고, 전 빠르게 현장에서 배우고 싶으니까요.”
동민의 욕심에 병렬은 작게 웃었다.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일을 사랑하는 그지만, 예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팀을 이끌고 여러 대회들을 휩쓰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지금 와서야 어릴 때의 꿈이고 나한테는 어린 녀석들 가르치는 게 더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 젊은 놈을 보자니 가끔은 그쪽으로 가는 것도 어땠을까 생각이 드는구먼.’
제자에 대한 기쁨과 흐뭇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아쉬움을 다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고 병렬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니가 뭘 하든 이제 니가 책임지는 거다만, 그래도 너무 욕심 부리기보다는 차근차근 배워가는 걸 더 생각해라. 마음만 급해서 헛돌지 말고. 그리고 전술 분석관 일도 일이지만 이름뿐이라도 중고등부 코치니 그쪽도 신경 쓰는 걸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이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야죠. 현 감독이나 코치들 보면서 배울 것도 많을 테니까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뭔가 또 고민거리나 그런 게 있으면 찾아와라. 적어도 들어는 줄 수 있지 않겠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힘주어 말하는 동민의 대답에 병렬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