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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과 선택 (41/270)

고민과 선택

“그래서, 하기로 했어? 내년부터 거기 코치로 있는 거냐? 말 멈추지 말고 이야기를 해봐, 이 화상아. 꼭 이런 클라이맥스에 말을 멈추고 술을 마시네. 너 일부러 반응 즐기는 거지!”

경태는 동민의 맞은편에 앉아 이야기를 멈춘 동민을 답답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든 술잔도 입가로 움직이다 말고 멈춰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잠시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서. 아직 B급 자격증 딸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아 있으니까 B급 합격하는 즉시 연락드린다고 했지… 그랬더니 알았다, 대답 기다리겠다고 하더라.”

경태의 열렬한 반응에 이 정도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듯 동민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걸, 미뤘다고?”

“응. 일단 시험 끝날 때까지만.”

“야, 이 멍청아! 아오!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 거기서 그 대답이냐! 아니, 대체 그 좋은 기회에 왜 시간을 달라고 한 거야?!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야, 그런 기회 놓쳤다가 잘못하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한다니까! 그런 기회가 살면서 계속 오는 게 아니야! 괜히 신중이네 뭐네 하다가 그런 거 놓치면 앞으로 20년간 잠자리에서 후회가 떠나질 않는다고!”

동민의 말에 경태는 말도 안 되는 것을 들은 양 분개했다.

갑자기 커진 목소리에 그를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태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동민이 잘되길 바라는 그였기에 이런 기회에서 망설이는 동민을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경태는 열을 식히려는 듯 급하게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듣기에 그게 그쪽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생각해 볼 게 여럿 생기더라고.”

그런 경태의 모습과는 반대로 동민은 침착하게 술을 마시며 말을 이었다.

“이야기 끝나고 나오면서 감독님이 혼잣말 하시는 걸 들으니까 단순히 내가 B급 자격증 따는 걸 기다린 것만은 아닌 것 같더라고.”

“그럼 당연한 소리지 뭔 소릴 하는 거야? 축구팀도 기업체인데 너 하나만 2년 동안 기다렸겠냐? 기업이라는 곳이 그렇게 개개인을 잘 생각해 주는 곳이면 내가 이 꼴로 생활하고 있겠어? 일주일 중 태반 이상을 야근하면서? 야, 넌 기업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동민의 입에서 나온 말에 경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동민은 야유하는 경태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고개를 저었다.

“에라, 이 인간아.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 단장이 자기가 하는 말처럼 구단을 대표할 만큼 힘이 있는 사람인지 좀 의구심이 들더라고.”

“또 뭔 소리야, 그건? 단장이면 구단 대표해서 일하는 사람 맞잖아?”

동민의 말에 경태도 술을 따르던 손을 멈췄다.

“아니, 그 말이 꼭 틀린 건 아니기도 한데……. 그 자리에서는 뭔가 너무 잘해준다니까 오히려 의심스러운 마음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긴 했는데, 감독님이 나오면서 그러시더라고.”

‘이름뿐인 단장이던 사람이 꽤나 바뀐 모양이구먼.’

동민은 병렬의 그 혼잣말을 듣고 자신이 가진 의심이 증폭되는 것을 느꼈다.

“그 단장이 그만큼의 힘이 없거나, 아니면 곧 교체되거나 하면 나는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도 있다 이거지. 왜 축구 선수들이 이적했다가 간 지 얼마 안 돼서 감독이 바뀌면 그냥 잉여 자원으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도 많잖아. 맨날 벤치에 앉아서 경기 나서보지도 못하고 그러는 선수들, 잘못하면 내가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 싶은 거지.”

“그러니까 니 말은, 그 사람 말만 듣고 들어갔다가 아예 붕 떠버리는 게 무섭다 이거구먼. 그래서 일주일간 고민하고 있던 거냐?”

동민의 말에 경태는 한숨을 쉬면서 다시 술잔을 손에 들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런 거지. 나한테 이렇다 할 인맥도 별로 없고, 선수로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그 팀에서 자리가 애매해진단 이야기야.”

동민은 그 이야기를 하고 한숨을 쉬며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나중에 튕겨난다고 해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거잖아? 야,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적으려고 난리치는 세상에 그 정도면 충분히 좋은 거 아냐? 그 한 줄 때문에 몇 달 동안 돈도 안 받고 인턴도 뛰는 사람들이 넘치는 판국이라니까. 나야 운 좋게 그런 거 거의 없이 취업했지만 아닌 사람들도 많아. 재원이 봐, 걔 지금 인턴이랍시고 몇 푼도 안 되는 돈 받으면서 일하는 건 나랑 비슷하게 일하고 있다고.”

경태는 그런 동민을 보면서 말했다.

그가 보기에 동민의 고민은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지금 당장 뭔가를 크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도 몇 년간 기다리면 기회가 올 수 있는 데다가, 혹시나 밀려난다고 해도 그만큼의 경력이 쌓이는 기회인 것이다. 얻는 것에 비해서 잘못된다고 해도 잃는 것은 적은, 그가 보기엔 부럽기만 한 것을 고민하는 동민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회가 온다면 곧바로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감독하고 스태프의 관계를 생각하면 글쎄. 내가 거기서 밀려났을 때 또 갈 곳이 있긴 할까? 내가 갔을 때, 그 팀 감독이 보기엔 그냥 낙하산 같은 느낌 아닐까. 그 상태에서 나가봐야 제대로 된 경력이라고 다른 곳에서 쳐줄지는… 글쎄, 내 생각에는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동민은 풀이 죽은 듯 조용히 말했다.

감독과 코치들의 관계는 단순히 직장 상사와 직원과의 관계와도 다르다. 감독을 영어로 head coach라고도 할 정도로 감독과 코치의 관계는 가깝다. 감독이 팀을 옮길 때 그의 코치들도 함께 떠나거나 부임할 때 같이 가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만큼 코치와 감독이 하나로 묶여 움직이는 것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런 상황에서 동민이 만날 1군 감독과 잘 맞지 않거나, 팀에서 밀린다면 그 전보다도 다른 팀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좋은 기회라고는 해도 위험성은 확실하단 말이지…….’

동민은 마음속으로 작게 푸념을 내뱉었다.

“결국 조금 더 생각을 해보기는 하려고. 그래 봐야 자격증 시험 때까지의 시간이지만. 아, 불합격하면 아예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아, 잊을 뻔했네. 그러고 보니 아직 합격도 아니었지.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이미 합격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뭐, 자신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일이란 게 모르는 거니까…….”

동민은 말을 흐렸다.

D급 자격증에서부터 이론적으로 할 수 있는 최단 시간을 찍어온 동민이었지만, 그래도 합격을 자신하고 있었다가 떨어지면 그만한 창피함도 없을뿐더러 모든 게 틀어진다.

‘뭣보다 감독님이 날 가만두지 않을걸…….’

동민은 노발대발하는 병렬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자신이 떨어진다면 병렬이 얼마나 화를 내고 어이없어할지 제대로 상상도 되지 않았다.

‘교육하던 사람도 이렇게까지 단기간에 올라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도 했었고. 이렇게 나중 일만 잔뜩 고민하다가 자격증 시험에서 삐끗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야. 괜히 이런 쪽으로만 고민할 시간에 시험이나 확실히 준비하고 나서 생각해야지.’

동민은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네. 일단 시험부터 생각해야지. 김칫국 마시는 게 일러도 너무 일렀네. 그런 의미에서도 일단 뒤로 미루는 게 나은 선택이었어.”

“저번에 본 지 얼마 안 됐는데 연락해서 술 한잔하자고 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결론은 그거냐.”

경태는 동민의 결론에 입을 삐쭉였다. 동민이 기회를 곧바로 잡지 않고 미룬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저번에 모였을 때 나보고 따로 연락도 안 하고 산다고 뭐라고 하길래 연락했지. 그리고 혼자 생각하는데 머리가 좀 복잡하기도 했거든.”

“하여간 시험 끝나고 다시 생각해 볼 때도 웬만하면 그 연락 놓치지 마. 정말로 그렇게 좋은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닐걸.”

경태는 마지막 잔을 따르며 혀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끝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진심으로 동민이 그런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뭘 해도 후회할 선택은 안 할 테니 그만 걱정해. 취했어?”

“이게 끝까지 꼭 말로 초를 쳐요. 이거 마시고 일어나자고. 내일도 회사 나가야 하니까.”

“하이고, 축하드립니다. 진짜로 취한 거 같으니까 빨리 마시고 가자고.”

“이게 다 팀장 그 인간이 지 일 나한테 떠넘기는 바람에 그런 거라니까! 그 인간 진짜 나중에 밤길에 만나기만 하면 그냥……!”

경태의 목소리는 낮아질 줄을 모르고 술집 안에 울려 퍼졌다.

얼마 후, 동민은 카페에 앉아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에 B극 지도자 자격증을 딴 기쁨은 지금 그의 표정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며 긴장을 풀어보려 노력했다.

“미안합니다. 생각보다 길이 좀 막히는 바람에. 오래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아뇨, 제가 만나뵙자고 말씀 드린 거니까요. 바쁜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을 열고 등장한 광호의 모습에 동민은 웃으며 말했다.

자격증 시험이 끝난 후 결국 그는 마음을 정하고 광호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아뇨, 필요한 일에 시간을 쓰는 건 당연한 거니까요.”

광호는 가볍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일단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B급 지도자 자격증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 감독님도 말하셨겠지만, 역시 동민 씨는 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재능이 있다니까요. 이렇게 빨리 B급 지도자 자격증까지 따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대단하십니다.”

“감사하지만 너무 비행기 태우시는 거 아닌가요, 하하.”

광호는 곤란한 듯 웃고 있는 동민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연락을 주신 것을 보면 이제 결정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했는데 맞으신가요? 분명히 슬슬 시험이 끝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나 연락이 안 올까 조금 걱정했었거든요.”

광호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이면에 깔린 말은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은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저번에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던 제 억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저한테 신경 많이 써주시고 계셨는데 또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 같아서…….”

“아뇨, 그만큼 신중하신 쪽이 더 믿을 만하니까요. 그래서 혹시 답변은…….”

다시금 답변을 재촉하는 광호의 말에 동민은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이미 마음은 정했지만 긴장과 흥분으로 떨리는 목소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네. 성남 페가수스 팀에서 열심히 해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동민은 그의 인생에서 손꼽힐 만큼 큰 도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이 동민이 프로라는 큰 바다에 들어서는 첫 항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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