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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호의 제의 (40/270)
  • 광호의 제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감독님. 그리고 그 옆에 계신 분이 강동민 씨인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성남 페가수스 팀의 단장, 정광호라고 합니다.”

    식당에 들어서자 훤칠한 키에 안경을 써서 차분해 보이는 남자가 인사를 해왔다. 광호로서는 처음 보는 자리에서도 반갑게 인사를 해서 친밀감을 느끼게 할 생각이었겠지만 지금 동민에게는 역효과에 가까웠다.

    ‘날 보지도 않았는데 얼굴을 알아? 진짜로 계속 날 알아보고 있던 거 아냐?’

    병렬과 들어오는 사람이 약속 상대라는 것을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오기 전부터 오해와 불안감에 떨던 동민은 곧바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채로 오해만 깊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연락이야 종종 했지만 이렇게 찾아뵙는 건 두어 달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랜만에 뵈니 얼굴이 더 좋아보이시는군요.”

    “하하, 아닙니다. 요즘도 정신없이 살고 있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더 자주 찾아뵙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일이 근래까지 좀 바빴거든요.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가 드리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다들 그런 건 어쩔 수 없지요. 차라리 바쁜 게 더 나은 것이기도 하고요. 이놈아, 얼어 있지 말고 인사드려야지.”

    병렬의 손이 어깨를 강타하고 나서야 잔뜩 얼어 있던 동민이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던 그의 눈이 그제야 제대로 눈앞에 서 있는 광호를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강동민이라고 합니다. 만나뵈어서 반갑습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평소 동민을 아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잔뜩 위축되어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전부터 동민을 알아왔던 병렬조차도 평소 동민의 차분한 목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로 위축된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병렬은 동민의 반응이 페가수스 팀의 터무니없이 좋은 제안 때문에 생긴 부담감이라고 생각하고 원호 사격을 해주었다.

    “오면서 잠깐 이야기를 이놈이 드물게 긴장을 다 했나 봅니다. 허허. 가르친 지 오래된 제자지만 이런 모습은 저도 처음이거든요.”

    “그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우리 쪽과는 다르게 아무래도 동민 씨에겐 갑작스러운 이야기일 테니까요. 일단 앉으시죠. 자세한 이야기는 식사하면서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시간도 점심시간이 벌써 지나가고 있으니까요.”

    광호의 말에 함께 자리에 앉은 동민이었지만 그의 눈에 식사메뉴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금 눈앞의 상대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자신에게 제의를 한다는 것인지, 정말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동민 씨는 고르셨습니까? 고민되신다면 개인적으로 여긴 엔초비 피자나 홍합이 들어간 씨푸드 피자를 추천하는데…….”

    “그, 그럼 그걸로 하겠…….”

    “너 그런 거 좋아했었냐? 해산물은 별로 안 좋아하더니만.”

    “예? 아, 아뇨. 죄송합니다. 잘못 봐서요. 곧바로 고르겠습니다. 잠시만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려던 동민은 병렬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얼굴을 메뉴판에 고정시켰다.

    “이거 뭐 이렇게 얼어 있는지 나 참. 혹시나 더 심해질까 봐 늦게 이야기한 것도 있었는데 일찍 이야기했으면 며칠 내내 니놈이 무슨 짓을 하고 다녔을지 상상도 안 되는구나.”

    병렬은 굳어진 게 풀리지 않는 동민의 모습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차라리 미리 말씀드렸으면 더 좋았을지도 몰랐겠지만,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상황이 얼마 전까지 바빴거든요. 어쨌든 동민 씨 모습을 보니 가능하면 빨리 본론에 들어갈수록 좋겠네요. 식사 주문만 끝나면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반대로 광호는 얼어 있는 동민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본론에 들어간다는 말에 동민은 재빠르게 무난한 메뉴를 시키고는 광호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럼 오시면서 이 감독님한테 말씀 들으셨겠지만 정식적으로 제의하겠습니다. 강동민 씨, 내년 초부터 저희 성남 페가수스에서 유소년 팀 코치와 성인 팀 전술 분석관으로 일해 주십시오. 유소년 팀 일은 이미 대부분 코치가 다 붙어 있으니 실질적인 일은 성인 팀의 전술 분석관이 됩니다만…….”

    광호는 동민이 자신을 바라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의의 내용은 오면서 병렬에게 들은 것과 동일했다. 유소년 팀의 코치로 올라가되, 실제 대부분의 일은 성인 팀의 전술 분석관으로서 움직여 달라는 것이었다.

    “…저로선 감사한 일이지만 저는 아직 B급 지도자 자격증도 못 딴 애송이일 뿐입니다. 그런 저한테 이런 방법을 쓰시면서 까지 저한테 제의를 하시는 이유가 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솔직히 단순한 애송이한테 하시는 제의치고는 너무 조건이 좋아서 부담스러울 정도거든요.”

    동민의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말속에는 의문과 의심이 가득 차 있었다. B급 지도자 자격증을 가지고도 갈 팀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은 많고, 성인 팀의 전술 분석관이라면 이미 A급 지도자 자격증을 얻어 경력을 쌓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광호는 직접 이런 뒷길을 마련해 가면서 동민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동민은 그 사실이 대체 어떤 이유에서 시작되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하, 당연히 그 이야기가 나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시작부터 곧바로 물어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보다 아주 직설적이시네요. 어쨌든 말씀은 드려야겠죠.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광호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 KFC와 신영대 축구부 간의 결승전을 제가 봤다는 사실부터 말씀드려야겠네요. 혹시 이 부분은 이 감독님께 이미 들으셨습니까? 그때 이 감독님께서 만나자고 하신 약속 장소가 그곳이었거든요.”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광호는 물을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결승전에서 저는 동민 씨가 상대 팀의 전술에 대응하고 결국 역전승을 거두는 것을 보면서 놀라웠습니다. 비록 당장 제가 찾던 차기 감독감은 아니어도 충분히 미리 끌어당길 만한 재능이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그때 동민 씨한테서 이만큼의 투자를 해도 될 법한 재능을 보았다는 겁니다. 이걸로 답변이 되셨습니까?”

    광호의 말은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이만큼의 투자를 감행할 정도로 그는 그 경기에서 동민의 가치를 높게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저는 팀을 지금의 자리에 머물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팬이나 리그에 미래를 위한 투자, 그리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는 거죠. 그리고 그 투자라는 건 선수나 시설에 대한 투자만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코치진도 마찬가지죠. 얼마 전에는 동민 씨랑 연배가 비슷한 여자 코치 분에게도 제의를 했고요. 저는 지금 동민 씨에게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말을 하는 광호의 눈빛은 매우 진지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런… 거였군요. 알겠습니다… 실례지만 전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금방 다녀올게요.”

    대답을 들은 동민이 화장실을 향하는 것을 지켜보던 병렬이 입을 열었다.

    “단순히 팀의 미래에 대한 투자만은 아닐 텐데요. 다른 이야기는 안 하시는지요?”

    “다른 이야기라 하시면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모른 척하는 광호를 보며 병렬이 웃었다.

    “K2리그가 K리그와 승강제를 시작한다는 소문이 있죠. 아마 다음 시즌부터요. 그것 때문에 감독도 그때 새로 구했던 것 아닙니까? 어쨌든 동민이 놈이나 그 다른 코치나 K리그에 승격했을 때 여론과 팬심을 위한 포석인 것도 아니라곤 말씀 못 하실 거 아닙니까.”

    병렬의 말에 광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서 그런 소문은 그렇게 잘 들으시는지, 협회에서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는데 소문 들으시는 속도가 너무 빠르신 거 아닙니까?”

    “나이가 드니 아는 친구들만 늘어나서 말이지요.”

    병렬의 말에 광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뭐, 말씀하신 것도 일부분 차지하지 않는다곤 못하겠네요. 그래도 확실한 것은 저는 진심으로 동민 씨한테 기대를 하고 있단 겁니다. 나중에 팀을 위한 투자의 개념으로요. 동민 씨를 팬들에게 보여주기 식으로만 채용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거든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보기엔 저런 녀석이어도 나름 소중한 제자거든요.”

    광호의 말에 병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애제자를 걱정하시는 건 이해하겠지만 저도 가볍게 생각하고 일을 진행하는 건 아니거든요. 팀을 K리그로 올리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게 우리 목적이니까요.”

    광호는 말을 마치고 눈을 돌렸다.

    “동민 씨도 거기서 서 계시는 것보다 자리에 앉으시는 편이 이야기하기 더 편하지 않을까요? 거기 그렇게 서 계시면 오히려 이야기 나누기가 더 부담스러워지니까요.”

    광호의 말에 병렬이 고개를 돌리자 뒤쪽에 가만히 서 있던 동민이 쭈뼛거리며 자리에 와 앉았다.

    “아하하,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두 분이 뭔가 심각한 말씀 중이신 것 같아서…….”

    동민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말을 흐렸다.

    자신이 없을 때 어떤 이야기들이 오갈지 궁금해서 슬쩍 엿들으려 했지만 걸려 버린 이상 그대로 자리에 앉는 것이 나아 보였다.

    “아뇨, 동민 씨도 관련된 이야기니까요. 말씀드린 대로 저를 포함한 구단에서는 다음 시즌에 K2리그에서 좋은 성적, 가능하면 우승을 해서 K리그 승격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지금 이런 투자를 하는 거고요. 저희의 궁극적인 목표는 K리그에서 수원 블루 데빌즈나 서울 레드 윙즈 같은, K리그에서 많은 팬들을 유치하고 경쟁적이 있는 구단을 만드는 겁니다.”

    거기에서 광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동민의 눈을 바라보았다.

    “강동민 씨, 저희의 목표에 동참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동민 씨가 나중에 저희 목표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생각했고, 지금부터 경험을 쌓고 배울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동민은 광호의 말에서 느껴지는 열의에 숨을 삼켰다.

    아무리 서른 중반까지 살다가 과거로 돌아왔다고는 해도, 이런 본격적인 일의 이야기나 사회생활은 아르바이트로만 연명하던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방향이었다.

    “허허,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이 늙은이까지 들어도 되나요? 제가 미리 자리라도 비켰어야 하는 게…….”

    “이미 이리저리 다 알고 오신 분한테 숨기려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르는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직접 말씀 안 드려도 결국 동민 씨를 통해서라도 전해질 것 같으니까요. 어쨌든 어떻습니까? 동민 씨에게도 절대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최대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동민은 다시금 숨을 들이켜고는 침을 삼켰다.

    “저는…….”

    동민은 머릿속으로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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