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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회 (39/270)
  • 새로운 기회

    “모레요?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동민은 의아한 눈으로 병렬을 보고 있었다.

    오늘도 병렬의 조언을 들을 겸, 현성고를 찾아왔던 그는 갑작스러운 병렬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어떤 사람한테 너를 소개시켜 달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다. 어차피 매일매일 똑같이 보내고 있으니 주말에도 따로 약속은 없을 거 아니냐? 네가 할 일이 따로 없단 건 이미 알고 있으니 그냥 나오면 된다.”

    “소개요? 그건 또 무슨… 그리고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뭔가 좀 서글픈데요…….”

    “서글프긴 무슨. 어쨌든 모레 12시까지 여기로 와라.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가면서 해주마.”

    병렬의 말에 짐짓 우울한 표정을 지어보는 동민이었지만 병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이미 몇 번이나 본 동민의 연기였기에 속아주려고 해도 속아줄 리가 만무했다.

    “그나저나 어떤 건지 미리 말씀을 해주셔야 하는 거 아녜요?”

    병렬의 말이 짧은 것은 언제나 있던 일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아예 말도 안 해주고서 나오라고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민은 자신이 근래에 뭔가 잘못한 것이 있었는지 기억을 뒤져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방금 설명해 주지 않았냐. 너를 소개시켜 달라는 사람이 있다고. 오히려 행운이면 행운이지 너한테 있어서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다. 그러니 일단은 그냥 나와 봐라. 내가 너한테 나쁜 일을 말한 적이라도 있었냐? 이놈은 뭔 의심이 이렇게 많아?”

    병렬의 말에 동민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나쁜 일은 둘째 치고, 나쁜 말이야 고등학생 때부터 많이 듣긴 했지. 우리 감독님 말 짧고 험한 데다 표정까지 더럽게 험상궂은 거야 다른 학교 학생들 에게도 유명했던 거고…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이야기에 누구랑 만나길래 이렇게 말도 안 해주신담?’

    예전에 병렬에게 들었던 온갖 험한 말들을 생각하며 잠시 고개를 흔들던 동민이었으나 곧 생각을 되돌렸다. 중요한 것은 병렬의 험한 말이 아니라 당장 모레 있을 일이 무엇인가였다.

    “표정 보아하니 시덥잖은 생각이나 하려던 것 같은데 모레 가면서 이야기 해줄 테니 걱정 말거라. 하여간 이놈은 항상 말은 더럽게 안 들어먹는다니까. 어쨌든 오늘 해줄 말은 이걸로 끝이다. 모레 늦지 말고 나오려무나.”

    병렬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한번 이야기를 끝내버리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 병렬을 알기에 동민도 거기서 더 물어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병렬이 그렇게 말하지 않으려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증만은 계속 남아 있었다.

    “진짜 뭐길래 감독님이 그렇게 꽁꽁 숨기시는 건지 모르겠네.”

    동민은 욕조에 누워 병렬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다 싶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 감독님 때처럼 조언해 줄 분이라도 소개시켜 주시는 건가? 그게 그나마 가장 가능성은 높은데, 그런 걸로 이렇게 말씀도 안 해주신다고 생각하기엔 뭔가 좀 부족한데…….’

    아무리 병렬이 가끔 뜬금없는 장난을 쳐서 진땀나게 만든다지만 이번에는 그런 장난이나 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감독님이 나한테 나쁜 일은 아니라고 했으니까 상관없겠지 뭐. 더 이상 생각하고 있다간 머리 터지겠네. 그냥 나가보면 알겠지, 뭐.”

    결국 동민은 더 이상의 고민을 포기하고 욕조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동민의 궁금증이 해결된 것은 결국 이틀 뒤, 현성고등학교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왔구나. 타거라. 지각하면 어째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병렬은 동민이 오기가 무섭게 그를 차에 태우고 운전을 시작했다.

    “너 오기 전에 점심은 먹었냐?”

    “아뇨, 이 시간에 오라고 하신 걸 봐선 점심이라도 먹을 것 같아서 안 먹고 왔죠. 뭐, 아니면 감독님이 사주실 거라 믿고 있으니까요.”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병렬에 대한 소심한 복수를 겸해서 말했지만 병렬은 그저 동민처럼 오래 그를 본 사람이 아니면 못 알아볼 정도로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잘 했다. 그쪽에서도 안 먹고 오는 걸로 알고 있으니. 잠깐 만나는 게 되겠지만 기왕이면 돈 많은 양반한테 얻어먹는 게 편하겠지, 안 그러냐? 요즘 거의 집에 처박혀 있는 경우가 많아서 비싼 음식을 잘 못 먹고 다녔을 것 아니냐.”

    ‘돈 많은 양반? 도대체 누굴 만나는 거지?’

    동민의 의문은 더 깊어졌다.

    “이제 가는 중이니 말씀 좀 해주세요. 이틀 동안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다고요. 지금 누구랑 만나는데 그러시는 거예요?”

    “아, 잊고 있었구나. 그래, 말해줘야 되겠지. 혹시 성남 페가수스 팀이라고 들어봤느냐?”

    답답해하는 동민의 말에 병렬은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남, 페가수스요? 어… 근래에 연구도 할 겸 K리그 팀 경기는 다 찾아봤는데 상대편에서도 따로 못 본 느낌인데요. 아, K2리그 팀이에요? 맞죠? 그렇죠?”

    기억 속을 뒤지다가 자신의 표정을 보고는 답을 대충 눈치로 때려 맞추는 동민을 보고 병렬은 한심한 듯 혀를 차고 말했다.

    “하여간 내가 그렇게 온갖 팀들을 다 알아보라고 말했는데 이놈이. 내가 너한테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어! 어떤 팀이든, 어떤 감독이든…….”

    “제가 보고 배울 것은 차고 넘친다는 말씀이셨죠. 죄송해요. 좀 더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팀이 왜요?”

    “으이그, 말이나 못 하면. 어쨌든 지금 보러 가는 사람이 그 팀 단장이다. 정광호라고 하는 양반인데 그쪽에서 널 만나고 싶다고 했거든.”

    “예?”

    병렬의 말은 예상을 뛰어넘는 말이었다.

    K2리그 팀인 성남 페가수스에서 동민을 능력을 높이 사, 다음 시즌부터 전술 분석관이라는 자리를 맡기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였다.

    “예? 그렇지만 저 아직 B급 지도자 자격증도…….”

    “곧 시험 보잖아. C급 시험때 5% 이내의 우수한 성적이었으니 시간도 줄고 떨어질 확률도 적겠지. 그리고 만나는 건 오늘이지만 저쪽이랑 계약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 내년 초가 될 거다. 시간은 충분하지. 물론 네가 시험에 통과한다는 가정하에지만.”

    “그래도 분명 성인 팀은 A급부터라고 알고 있는데요. B급이 지도할 수 있는 건 중, 고등학생 등의 청소년일 텐데…….”

    “나도 혹시 내가 잘못 기억하나 확인해 봤는데, 그쪽에서 운영하는 유소년 팀 코치로 계약하면서 동시에 능력이 되면 성인 팀 전술 분석관으로 해달라는 이야기더라. 나쁘게 말하면 꼼수고, 좋게 말하면 지들이 안 걸리려고 잔대가리 굴린 거지. 2년 동안 유소년 코치로 두고서 네 A급 지도자 자격증을 기다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더구나.”

    계속된 병렬의 이야기에 동민은 숨이 막힐 듯 놀랐다.

    아직 B급 지도자 자격증도 따지 못한 20대 초중반의 애송이에게 내거는 조건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들이었다.

    “저는 아직 B급도 못 딴 상태인 데다 경험도 없는데 대체 그쪽에서 저한테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아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잖아요?”

    “니가 까불거리는 건 늘었어도 스스로에 대한 판단은 확실하니 다행이구나. 사실 나도 그쪽에서 이렇게까지 붙잡으려고 나설 줄은 몰랐다. 내가 알려줬지만 이렇게 조건들을 내세우면서 달려들 줄이야. 예상 이상이야.”

    ‘내가 알려줘? 예상?’

    병렬의 말에 동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독님께서 그쪽에 알려줬다니 그건 무슨 말이에요?”

    “…예전에 사회인 축구 대회 우승했을 때 있잖느냐.”

    “그게 왜요?”

    “그쪽에서 당시에 나한테 차기 감독 제의가 와서 거절은 했는데 뭔가 그때 갑자기 딱 생각나는 게 있더라고. 마침 결승전에 광규도 있겠다, 너도 있겠다 해서 광호 그 양반을 불렀는거든. 그런데 그때 그 양반이 니가 하는 걸 보더니 너에 대해서 한참을 물어보더구나. 그래서 이거 잘됐구나 싶어서 이야기하고 그 이후로도 종종 연락이 오긴 왔었는데 이런 조건들까지 내밀어가면서 널 붙잡으려 드는 건 예상외구나.”

    병렬의 말대로라면 페가수스 측은 2년 가까이 동민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알아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사실에 동민은 혼란스러움이 더 커졌다.

    “그래도 그쪽에서 널 그렇게 얻고 싶어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너처럼 어린 나이에 빠르게 지도자 자격증을 따는 사람은 별로 없거니와,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재능이 있어. 물론 그걸 가지고 자만에 빠져서 헤헤거리고 다니면 안 되겠지만 그때 그 말은 진심이었다.”

    병렬은 예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하려니 쑥스러운 듯 재빨리 말을 끝냈다.

    동민은 병렬의 말에 다시금 감격해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표정을 굳혔다.

    병렬의 말 중에서 ‘재능’이라는 말이 걸렸기 때문이다.

    ‘사부님이 말하는 재능이라는 건 역시 내 능력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단순히 그때 결승전에서 하는 걸 보고 2년이나 기다렸다는 건 말이 안 돼. 솔직히 그 경기에서 주현이를 눈여겨봤다면 믿겠지만 나라니. 대체 나한테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그쪽에서 혹시 내 능력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동민은 혼란을 넘어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능력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자신의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다는 것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약 자신의 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좋을 것이 전혀 없다는 생각이 커졌다.

    ‘남들이 믿고 안 믿고의 가벼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갈수록 느꼈으니까.’

    단순히 상대 팀을 분석해서 약점을 파고들고, 강점을 막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단 한 명으로 경기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컨디션 변화도,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완전히 뒤바꿀 수도 있는 특성 변화도 존재했다. 자신의 능력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것임을 깨닫자, 능력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감독이거나 선수인데 상대 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반칙이나 다름없을 텐데. 같은 팀으로 끌어들이거나 아니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쫓아내려고 들지 않을까. 애초에 이런 게 반칙인지 어떤지 규정에 있을 리가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 지금 만나러 가는 성남 페가수스 단장이라는 사람이 무서워졌다. 그가 동민의 능력을 확실하게 아는지, 모르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2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자신을 주시하던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2년 동안 바라봐왔다는 말이야. 드라마에서나 로맨틱하지 진짜 소름 돋는데. 뭐, 조심스러워서 나쁠 건 없겠지. 그나저나 그런 걸 생각하니 뭔가 갑자기 속이 아픈데…….’

    조금 전까지 배가 고프던 그였지만 어느새 공복감이 싹 가시고 말았다.

    ‘일단 상대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알고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으니까.’

    걱정에 뒤틀리는 속을 부여잡고 동민이 탄 차는 약속 장소인 식당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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