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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의 막이 내리고 (38/270)
  • 대회의 막이 내리고

    “늦는다고? 형이 늦으면 어쩌라고? 종환이 형이나 영우 형도 바쁘다고 못 온다며. 어? 왔다고? 알았어. 다른 사람들한테 늦는다고 이야기는? 하이고, 알았어. 일단 먼저 들어가 있을게.”

    동민은 전화기를 들고서 투덜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서 지각 통보나 하는 경태를 생각하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만에 보는 거지? 1년도 더 됐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KFC가 우승을 한 것도, 동민이 환희에 차서 선수들을 껴안고 소리를 질렀던 것도 벌써 1년 반 가까이 된 옛날 일이었다.

    동민은 그때 뒤풀이에서 눈물을 흘리던 경태의 모습을 추억하며 웃음을 지었다.

    ‘이따가 오면 그 이야기나 계속 해서 놀려먹어야지.’

    그리고 오늘은 수환의 취업 자리가 정해진 것을 축하할 겸, 그때의 멤버들끼리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동민은 약속 장소인 식당이 눈에 들어오자 괜히 긴장하는 자신을 느꼈다. 얼굴을 마주한 지 1년도 더 된 사람들을 본다는 사실에 혹시나 어색하지 않을지, 많이 달라지진 않았을지 조금은 걱정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뭐 하냐? 안 들어가?”

    뒤에서 들리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동민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돌아갔고, 그대로 멈췄다.

    그곳에는 종환이 양복을 입은 채로 서 있었다.

    “뭐야? 왜 멍하니 보고 있어? 누가 니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갈겼냐?”

    “어… 아니, 그게…….”

    동민은 생각도 못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취업했단 연락을 받긴 했지만…….’

    이렇게 양복이 안 어울릴 줄은 몰랐다는 사실을 입 밖에 꺼내도 될지 고민을 하는 그를 보며 종환은 그 뜨뜻미지근한 눈빛을 이해한 듯 분통을 터뜨렸다.

    “뭐야, 너도 양복 안 어울린다는 헛소리나 하려고 그러는 거냐? 나도 알고 있거든!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여간. 됐고 들어가기나 하자고.”

    “말 안 해도 알고 있었어? 다들 생각이 비슷비슷한가 보네.”

    동민은 웃으며 식당으로 향하는 종환의 뒤를 따랐다. 두 명이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왔네. 이야, 감독 얼굴 보기 참 힘들구먼.”

    “종환이 양복 입은 건 봐도 봐도 익숙해지질 않네. 대체 회사에선 저런 걸 보고 어떻게 뽑은 건지 참.”

    “감독, 오랜만.”

    각양각색의 인사들을 보자 시간을 흘렀어도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들 오랜만이야. 수환이 형 취업 축하해.”

    “아주 볼 때마다 시비네. 뭐야, 경태 형은? 아직이야?”

    “응? 우린 너랑 같이 올 줄 알고 있었는데. 너야말로 경태 형은 어디에 두고 온 거야?”

    인사를 하며 자리로 향하는 동민과는 달리,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종환이 묻자 영우가 반대로 물었다.

    “뭐야? 연락 안 왔었어? 좀 전에 전화로 들었는데 급한 일 생겼다고 좀 늦는다면서 이미 연락했다고 하던데?”

    “뭔 소리야? 우리한테 연락 없었는데? 이 인간은 진짜 연습 때 말고는 옛날부터 똑같다니까.”

    동민의 이야기에 다들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혹시나 어색하지 않을까, 라는 동민의 걱정과는 달리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지각생인 경태가 자리에 도착하자 더욱 활기를 띠었다. 아무리 여유 있는 성격의 경태라도 사회 초년생이라는 입장은 어쩔 수 없는 듯 동민의 기억보다 조금 더 말라 보였다.

    “형도 되게 바쁜가 보네.”

    “…아까 전화도 그랬지만 니가 아예 말 놓으니 아직도 가끔 어색하네.”

    “뭐? 아니 자기가 놓으라고 해놓고 항상 뭔 소리래.”

    대회가 끝나고 있던 뒤풀이 자리에서 다들 말을 놓기로 하자는 억지를 주장의 권한으로 통과시켰던 경태지만, 아직도 가끔 연락할 때마다 어색하다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요즘 어떻게 지내는 건데?”

    “말도 마라. 힘들게 취업한건 좋은데 팀장 때문에 죽을 맛이야. 그 인간은 맨날 지 일은 남한테 미뤄두고 결과만 쏙 빼간다니까. 오늘 일도 원래 지가 가야 할 일을 떠넘겨 가지고 인천까지 다녀왔다니까. 진짜 그 인간은 일 그따위로 해서 안 잘리는 게 신기하다니까.”

    동민이 옆자리에서 지친 듯 술을 들이켜는 경태에게 말하자 열이 뻗치는 듯 술잔을 비우는 속도를 늘렸다.

    “그나저나 넌 어때? 그때 이후로 휴학 때리더니 연락도 뜸하고. 그 감독님 밑에서 지도자 자격증 공부는 잘 되고 있어? 힘들진 않고?”

    “나야 뭐, 내가 좋아하는 일 하는 거니까.”

    동민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사회인 축구 대회 이후로 병렬의 도움을 받아 한창 지도자 자격증에 매달리고 있었다. 우승의 기쁨에 취하는 것도 잠시, 그의 우승을 보고 자극을 받은 것인지 본격적으로 스파르타식인 병렬의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도 C급 자격증까지는 합격했고, C급 합격할 때 성적도 좋았으니 곧 B급 자격시험도 볼 수 있을 거야.”

    “응? 뭐야? 이미 합격했었어? 왜 그런 걸 말도 안 하고 있던 거야!”

    동민의 말에 경태는 놀라 술잔을 쥔 손을 흔들었다.

    동민이 이미 합격을 해놓고 따로 이야기를 안 했던 것이 서운한 그였다.

    “C급까지야 그렇게 어렵지 않고 B급부터가 중요하니까. B급 이상부터는 지도 경력까지 필요하니까 단순히 공부하는 걸로 끝이 아니거든. 그때부터는 지도할 팀도 필요하긴 한데… 일단 B급 합격하고 나서 생각해야지 뭐. 감독님도 지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시고.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원래 그런 양반이 아닌데 그 부분에서만 무진장 여유롭단 말이야.”

    동민은 유난히 자신 있어 보이는 표정이던 병렬을 떠올리고는 술잔을 입으로 옮기며 빠르게 말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본인 스스로 페이스가 빨라지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정도로 조금 취한 상태였다.

    “뭐야, 그럼 얼마 후면 진짜 애들 가르치고 그러는 거야?”

    “B급 합격하면 중, 고등학생까진 지도할 수 있어. 뭐, 그것도 팀이 자리가 나야지 말이지만. 갓 B급 라이센스를 딴, 어린 녀석한테 그런 자리가 나기가 쉽지 않으니까. 나한테 인맥이라고 해봐야 감독님 정도에… 아, 하 감독님도 있나.”

    동민은 그 대회 이후로 종종 연락하곤 하는 광규를 떠올렸다. 결승전에서 진 이후, 광규는 어떻게 알았는지 가끔 동민에게 전화해서는 자격증 시험에 관한 충고를 해주고 있었다.

    “응? 그 사람은 누구야?”

    “그때 결승에서 만났던 신영대 감독 있잖아. 그 사람이랑 가끔 연락하거든. 전화해서 자격증 관련해서 조언해 주고 그래.”

    부드러운 말투와는 반대로 가감 없이 찔러 들어오는 광규와의 대화는 충고라는 입장에서는 유익하긴 했지만 동시에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감독님하고는 완전히 반대 스타일이니까. 두 사람이 어떻게 선수 때 친해졌는지 모르겠네. 나이 차도 꽤나 나는데.’

    냉탕을 빙자한 열탕과 온탕을 빙자한 냉탕에 번갈아 가며 시달리는 평소 생활을 떠올리며 동민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하고 연락도 해? 아, 그러고 보니 너 그때 그 여자는?”

    “응? 무슨 여자?”

    뜬금없는 이야기에 동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태를 보았다. 요즘 그의 생활은 논문 찾으랴, 병렬에게 혼나랴, 광규의 속 긁는 이야기에 억지스러운 웃음 지으랴 여자하고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그 이야기에 동민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그때 BU 매니저였나 하는 여자랑 연락하고 그랬잖아?”

    “아니, 그 이야기를 언제까지 해대는 거야, 이 인간은.”

    경태의 말에 동민은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하도 예전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던 이야기를 갑자기 듣게 되자 머리가 아파온 것이다.

    “애초에 그때 이후론 본 적도 없고, 연락처도 몰랐는데 뭘 뭔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게 말하는 건데. 아이고, 이 화상아.”

    오랜만에 봐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에 웃음이 나와야 할 상황이지만 생각도 못 한 엉뚱한 말에 동민은 웃을 수가 없었다.

    “내버려 둬라. 저 늙은이 곧 서른까지 멀지도 않았는데 아직도 애인 없으셔서 남들 엮기 좋아하는 거니까.”

    앞에서 종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조금 전에 경태의 이야기에 눈을 빛내며 시선을 돌렸지만 별 소득도 없는 옛날이야기인 것에 적지 않게 실망한 모습이었다.

    “너 말이 너무 심하잖냐! 그리고 그때 동민이 말하는 표정이나 그런 게 그냥 축구 때문에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니까! 딱 봐도…….”

    “그렇게 딱 봐도 알 정도로 여자를 잘 아셔서 예전에 후배한테 꽃다발 들고 가서 차이셨나?”

    경태의 항의이 종환의 빈정대는 말에 그대로 잘려나갔다.

    “경태 형이 여자 이야기 하는 건 역시 좀… 그렇지.”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런 걸로 엮기는 좀 심하지…….”

    “경태 선배는 항상 남자 후배한테만 인기 많은 부류였으니까요.”

    그리고 종환의 말에 이은 다른 이들의 추가타가 들어오자 경태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자리에 엎드려 버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다 모이니까 확실히 아쉽네요.”

    “뭐가? 아…….”

    영진의 한마디에 수환은 물어보려다가 이해한 듯 입을 다물었다.

    “주현이 걔야 지금 바쁠 테니까 어쩔 수 없지. 또 아냐, 걔가 K리그 유명 스타가 될지?”

    진규는 술잔을 기울이며 아쉬움을 삼키듯 말했다.

    주현은 그때 대회 이후, K2리그 부천 유나이티드의 2군 선수로 들어가 있었다. 체육 전공이 아닌 주현이었기에 매우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우연히 사회인 축구 대회에 있던 스카우터가 보고 입단 테스트 제의를 했다고 한다.

    “그때 우리도 잘했으면 그런 기회가 생겼을까?”

    “아서라. 그때부터 걔는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었잖아. 그리고 거기서 입단 테스트 제의를 한 것도 신기한 일인데.”

    시영의 말에 진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좋은 일이었지만 함께 뛰던 주현이 어딘가 먼 곳으로 가버린 듯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 시간이 되면 또 보겠지. 동민이 이대로 너는 잘하면 볼 수도 있지 않겠어? 니가 A급 자격증까지 땄을 때의 일이겠지만.”

    기운을 차린 듯 엎드려 있던 경태가 말했다.

    “그런가…….”

    동민은 잠시 자신이 주현을 지도하는 것을 생각했다. 자신이 본 사람들 중 가장 큰 성장 가능성 수치를 가졌던 주현이기에 얼마나 더 성장시킬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지만, 곧 생각을 그만두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일단 지금 준비하는 B급 자격증부터 생각해야지. 나중일은 나중 일이니까. B급 합격해도 팀이 있어야 지도 경력도 쌓을 수 있으니까. 지금은 코앞의 일에나 집중하자고. 나도, 그리고 전부.”

    동민은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말에 다들 쓴웃음을 지으며 함께 잔을 들었다. 꿈을 꾸는 것도, 과거의 추억에 흐뭇한 것도 좋지만 그들의 앞에 있는 현실을 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전(前) 감독으로서 한마디 하자면, 다들 성공하고 또 봅시다!”

    동민의 말과 함께 소주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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