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았다
“형이 경수랑 교체로 들어가면 종환이 형까지 밑으로 내리고 상대 8번한테 붙일 거야. 그럼 결국 측면의 재원이 형 빼면 골문에 제일 가까이 있어야 하는 건 형 하나뿐이야. 더 말 안 해도 이해하지?”
돌려서 말했지만 어떻게든 골을 만들어내라는 동민의 말에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저번 경기 이후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 무겁다는 것은 반대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이해했어. 꼭 넣을게.”
“그래. 지금이 형이 가장 활약할 수 있는 순간이야. 부탁해.”
그 말을 들으며 진호는 그라운드로 나왔다.
‘이걸로 골문 앞에는 김진호, 우측에는 심재원. 체격이 어느 정도 되는 두 사람이니 수비진에 심리적 부담을 줄 수 있을 테고 남은 교체 카드 한 장은…….’
동민은 주현을 바라보았다.
진호와 재원이 동시에 골문 앞으로 들어가는 이상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가 무너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 밸런스를 맞춰줄 사람이 영진 말고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역시 박주현을 교체해야 하나.’
그의 머리로 생각했을 때 오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박주현을 박병원으로 교체해서 공수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가장 좋은 생각이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마음속 무언가가 그 선택을 막았다.
그것은 아까 모두가 무너졌을 때 혼자 눈을 빛내며 노력하던 주현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에이스를 교체해서라도 조금 더 안전성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아예 밸런스를 어느 정도 포기해서라도 박주현을 두느냐.’
동민은 고민했다.
지금 한 번의 선택이 자칫하면 나중에 큰 후회를 가져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었어. 어차피 지금 절박한 건 우리야. 안정성을 추구하는 건 저쪽이 할 일이지 우리가 할 게 아니지. 밸런스고 나발이고 지금은 도박 수를 걸어야 할 때니까.’
동민은 주현을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결국 지친 영진을 대신해서 병원이 들어가는 것으로 동민이 가진 세 장의 교체 카드는 끝이 났다.
“제발 내 선택이 맞아야 할 텐데…….”
이제 동민은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 동민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스코어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신영대의 일방적인 공격은 끝이 났지만 광규 또한 저번처럼 동민의 전술 변화에 호락호락하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진호와 재원의 교체로 힘이 실린 KFC의 공격에 수비 라인을 뒤로 빼며 맞섰고, 시원에 대한 견제가 늘자 공을 아예 측면으로 돌리면서 역습을 시도했다.
KFC가 공격을 주도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신영대의 역습도 만만치 않았다. 컨디션이 좋아진 시영과 발 빠른 영우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위험했을 상황이 만들어진 장면들이 몇 차례나 지나갔다.
두 팀의 공격 시도는 횟수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골이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5분 남짓인가.’
동민은 시계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마음은 절박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계책을 끌어냈고, 상대의 틈을 노리려는 시도를 해냈지만 상대는 그것을 계속해서 막아내고 있었다.
병원의 긴 패스가 수비수를 맞고 코너킥으로 이어지자 아쉬움과 안도의 탄성이 경기장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제발…….’
동민은 초조한 눈으로 주현이 코너킥을 차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주현은 코너킥을 차기 위해 뒷걸음질 치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은 스스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 이 게임을 뒤집긴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제발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기도했다. 자신의 왼발이, 팀이 기적을 만들 수 있길 기도했다.
그의 염원을 담은 공이 골문 앞으로 날아가고, 진호의 머리를 맞는 것을 보며 그라운드는 희망과 절망의 소리가 뒤섞였다. 그러나 진호의 헤딩이 상대 골키퍼의 손을 맞고 옆으로 빠지며 다시 코너킥이 되면서 희망과 절망의 고함은 서로 자리를 바꿨다.
환호성을 지르려 숨을 들이켜던 주현은 한숨을 내뱉고 다시 한 번 공 앞에 섰다.
그리고 아까보다 조금 더 안쪽으로 날아든 공은, 이번에야말로 진호의 머리를 맞고 튕기며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골키퍼가 손을 쓰기도 전에 이미 골문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강한 헤딩이었다.
조금 전의 함성과는 반대되는 환희의 함성이 그라운드를 가득 메웠다.
“잘했어! 얼른 공 가지고 와서 준비해! 아직 3분 남았어! 빨리!”
동민은 골에 대한 칭찬과 환희보다는 이제야 기울어져 있던 경기의 평행을 맞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대로 비겨서 연장전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남은 시간 내에 승리로 경기를 마치는 결과를 바라고 있었고, 그것은 동민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박주현을 포함한 몇 명은 이미 체력이 바닥이야.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뛰고 있지만 연장전에 들어가면 얼마나 버틸지…….’
주현이나 종환의 다리는 반쯤 풀려, 휘청거리는 것이 그라운드 가장자리에 서 있는 동민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연장까지 가지 말고 끝내자! 남은 시간 3분 정신 똑바로 차려! 아직 시간 남아 있어!”
동민의 고함에 진호는 재빠르게 골 망을 뒤흔든 공을 들고 센터 서클로 뛰어갔다.
‘반드시 정규 시간 내에 끝낸다!’
동민은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이거 당했네. 마지막까지 저런 집중력이라니.’
광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공을 들고 뛰어가는 진호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실수하거나 못해서 마지막에 흔들렸다면 분노했겠지만, 이번 골은 말 그대로 KFC의 정신력에서 나온 골이었다.
‘그래도 아직 유리한 쪽은 우리야. 우리 쪽에는 아직 두 장의 교체 카드가 남아 있고, 무리한 전진으로 저쪽의 체력은 거의 한계야. 연장전이 된다면 분명히 체력이 떨어져 퍼질 거다. 그러면 경기 끝이지.’
광규의 눈에도 KFC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잘 보였다. 뒤처져 있는 게임을 뒤집기 위해서 무리하게 페이스를 끌어올린 결과였다. 그에 반해 역습을 위해서 뒤로 물러나 자리를 지키는 경기를 하던 신영대의 선수들은 그렇게까지 지치지 않았다.
‘연장전에 체력이 팔팔한 애들로 교체하면서 상대 체력이 한계가 온 시점에 그대로 밀어붙인다.’
광규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경태 형이랑 시영이 형 빼고 다 앞으로 나가! 막아도 상대방 진영 안에서 막고 바로 역습해! 뒤로 공이 갈 상황을 만들지 마!”
“다들 박스 앞에서 블록 제대로 만들어! 버티면 이길 수 있어!”
동점 골로 분위기를 잡은 KFC의 공격과 이대로 연장전을 바라는 신영대의 수비는 두 감독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떻게든 남은 3분 안에 한 골을 더 추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KFC에게는 원망스럽게도, 신영대의 필사적인 수비를 제대로 뚫어내지 못한 채로 시간은 점점 더 흐르고 있었다.
‘이런 망할!’
남은 시간은 거의 1분여, 신영대의 수비수가 멀리 차낸 공이 사이드라인을 넘자 동민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빠르게 처리해!”
동민의 말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시영은 재빠르게 경태에게 공을 연결했고, 경태는 공을 잡고 줄 곳을 찾고 있었다. 신영대의 수비는 촘촘해서 전방으로 곧바로 띄우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런 그의 눈에 자신의 쪽으로 뛰어오는 수환이 들어왔다.
시계를 흘긋거리는 심판을 곁눈으로 바라보면서 수환의 마음은 더 급해졌다. 힐끔거리며 손목시계를 보고 있는 모습은 지금 당장에라도 경기를 끝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진짜 마지막 공격이다.’
경태의 공을 전달받은 수환은 그대로 공을 몰고 중앙을 달려갔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드리블이었지만, 급박한 상황이 그에게 드문 일을 만들어냈다.
‘제발 닿아라!’
공을 몰고 달리던 수환은 2선으로 빠져 내려오는 종환에게 공을 내주었다.
‘안 돼. 너무 좁아!’
동민은 종환이 공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공을 받은 종환의 주위에는 벌써 두 명의 수비가 달라붙어 있었다. 종환은 두 명의 수비 사이에 끼여 금방이라도 공을 잃고 넘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비틀거리던 종환은 넘어지면서도 우측의 빈 공간으로 공을 밀어주었다.
본래 수비가 있어야 했을 그 공간은 종환이 아래로 내려오고, 진호가 좌측면을 향하면서 텅 비어 있었다.
대부분 상대 팀을 짓누르는 경기력을 뽐내던 그들이었기에 생겨 버린 작은 공백, 그곳을 주현이 달리고 있었다.
측면에 있던 주현은 진호가 수비를 옆으로 끌어내는 것과 동시에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움직이는 동료를 보자 자연스럽게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달리는 주현의 발 앞으로 종환의 패스가 전해지고.
‘할 수 있어.’
급박한 상황과는 반대로 오히려 주현의 마음은 평온했다. 언제나 부담이었던 기대가 어느덧 자신의 등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느낌이었다.
주현은 달려드는 수비수를 한 번 더 제치고 오른발로 공을 차냈다.
주현의 발 앞을 떠난 공은 골키퍼의 손을 스치고 그대로 골 망을 흔들었다.
공이 골 망을 흔드는 것을 본 순간 주현을 웃통을 벗고 포효하며 그라운드를 달렸고, 동민은 앉아 있던 벤치 멤버를 얼싸안았다.
스코어 3 대 2.
영화 같은 KFC의 역전 우승이었다.
K3팀 성남 페가수스 팀의 단장인 정광호는 멍하니 운동장을 보고 있었다.
“감독직 거절하셔 놓고 갑자기 주말에 이런 곳에서 만나자길래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만…….”
다음 시즌이면 계약이 끝나는 현 감독의 대체자로 병렬을 생각했지만 단번에 거절했던 그가, 만나서 보여줄 것이 있다고 전화했을 땐 의아해했던 광호였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그런 의아함 따위는 없었다.
“내가 늙어서 그쪽 감독직을 수락하진 못해도, 대신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야 있으니까요.”
그 말을 하는 병렬 또한 선수들과 껴안고 기쁨을 나누고 있는 동민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의 성장을 지켜보기 위해 온 경기였지만 병렬 또한 내심 광규의 승리를 예상했다. 코치로서 제대로 된 공부와는 아직 거리가 멀었던 동민이었기에 저번에 이겼다곤 해도 광규와 신영대를 이기고 우승을 하긴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경기를 지켜본 병렬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에서 경기를 펼친 사람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기대를 거는 제자가 아니었다.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상대방의 지략에 지략으로 대응하는 한 명의 감독이었다.
“저쪽 감독 맡은 젊은이, 누굽니까?”
병렬은 광호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대답했다.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재능 있는 사람이지요. 내 제자한테 이런 말을 하긴 좀 낯간지
럽지만.”
그 말에 광호의 눈빛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