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도 못 막는 상대를 막아라(2)
‘일단 상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생각을 좀 해보자. 아무리 포인트로 컨디션을 올리는 방법으로 맞선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방에 들어와 멍하니 앉아 있던 동민은 정신을 차리고 수첩을 꺼냈다.
‘신영대에서 가장 무서웠던 건 두 사람, 측면 공격수랑 수비형 미드필더였지.’
동민은 수첩에 그때 보았던 두 명의 스테이터스를 그대로 적고는 노려보았다.
[정윤석]
23세
잘 쓰는 발 : 오른발
성장 가능성 8.2/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7.6/20
선호하는 플레이 : 수비의 틈 사이로 침투, 측면에서 볼을 끌고 들어옴
특성 :
장점 - 드리블러, 스프린터
단점 - 종잇장 체력
현재 컨디션: 7/10
[홍시원]
22세
잘 쓰는 발 : 왼발
성장 가능성 8.1/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7.7/20
선호하는 플레이 : 패스 루트를 차단, 아래쪽에서부터 공을 끌고 올라옴
특성 :
장점 - 천리안, 두 개의 심장
단점 - 느린 발
현재 컨디션: 8/10
‘그때야 그런 타입의 에이스를 상대하는 게 처음이었지만, 그나마 지금은 본선에서 이미 비슷한 타입을 봐서 대응이야 더 익숙해. 가장 불안한 건 그 감독이 어떻게 움직이느냐니까.’
중앙에서 패스를 뿌리고 측면에서 그것은 파고들어 수비를 흔든다, 낮에 있었던 SFC의 공격 방식과 같았다.
‘결국 아까 후반전에 했던 것처럼 수비진을 뒤로 쭉 빼고서 김진호로 카운터를 노리거나, 박주현의 개인 능력을 앞세워 똑같이 측면에서 흔드는 게 유용할지도 몰라.’
중앙에서 측면으로 넘긴다고 해도 골문 앞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몇 겹의 수비를 쌓아둔다면 오늘처럼 막아낼 수 있다. 그러나 동민은 그 생각을 머리를 흔들어 쫓아 보냈다.
‘아냐, 오늘 끝까지 막아낸 건 운이 따라준 데다가 상대 공격진이 서현준과 조규현 말고는 꽤 급이 떨어졌으니까 할 수 있던 거지. 그 전술 그대로 신영대 공격진을 막으려다간 분명히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틈새를 찔려서 당할 거야. SFC랑 신영대는 아예 평균 능력치 자체가 다르니까 같은 방법을 써봐야 소용이 없어. 대체 어떻게 대비를 할까…….’
결국 동민은 쓰고 있던 수첩을 그대로 찢어 구기고는 옆으로 던졌다.
“아니면 아예 정면 대결로 밀어붙이는 방법인가… 아니, 그랬다간 박주현의 의존도가 높은 우리 팀이 더 막아내기 쉬울 수도 있는데. 하아, 어째야 할까.”
“얘, 오늘 일찍 안 자도 되겠니? 내일 경기 있으니까 일찍 자둬야지.”
한참을 고민하던 동민이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내뱉을 쯤 어머니의 목소리가 방 밖에서 들려왔다.
“응? 지금 시간… 어, 벌써? 알았어요. 조금만 더 있다가 알아서 잘게요.”
어머니의 말에 시계를 보자 어느새 작은 바늘이 12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민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수첩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결국, 동민은 그날 밤 늦도록 몇 장의 수첩에 글을 끼적거리고 찢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그 모양인 거야?”
“뭐, 그렇지.”
다음 날, 동민은 자신의 눈 밑에 거뭇한 그림자가 생긴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 생각해 오긴 한 거야, 아니면 그냥 시간만 낭비한 거야? 후자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 그러면 감독이란 자리가 진짜 쓸모없는 건데 말이야.”
“일단 생각은 해뒀어. 다만 언제나 그렇듯 경기 시작 후에 바뀔 수 있으니까 혼란스러워하지 말 것. 이해했지?”
그 말에 동민은 종환이 있는 방향을 째려보고는 대답했다.
“그럼 된 거지, 저번에 기분 좋게 이겼으니까 이번에도 이기면 되는 이야기 아냐? 여기까지 올라와서 지는 건 생각만 해도 거지 같잖냐.”
“말은 언제나 그렇듯이 듣기 안 좋지만 종환이 말이 맞아, 니가 그만큼 고민하고 짜낸 전술이면 분명히 괜찮겠지.”
“…항상 말 많은 주장, 부주장이지만 오늘은 웬일로 믿음직하네. 아침에 해가 어느 방향에서 뜨는지 미리 확인해 둘 걸 그랬어.”
종환과 경태의 말에 입을 삐죽이면서도 동민은 퀭해진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금부터 설명할게. 먼저 포지션부터 설명하자면…….”
동민은 자신이 밤늦도록 생각하던 것들을 선수들을 향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리다고 가볍게 생각했다간 저번처럼 역으로 당하기 쉬워. 서로 겪어본 이상 저쪽은 어떻게 나오려나… 분명히 선수들 개개인은 우리 쪽이 우위였을 텐데.’
광규는 반대편 스탠드를 노려보면서 생각했다.
저번 연습 경기가 끝나고 상대의 감독을 맡고 있던 사람이 누군지 여기저기 물어보던 광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리다, 어리다 했지만 진짜로 스물둘짜리 애였을 줄이야. 그것도 병렬 선배가 가르치던 선수 출신이라…….’
그것을 알고는 광규는 세상 참 좁다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병렬에게 물어본 바로는 선수로 뛰던 때에도 가르치던 학생들 중에서 특별히 재능 있는 녀석이었다고 했다. 동시에 병렬은 동민이 한성고에 진학하기 전에도 꽤 주목받는 선수였지만, 희한하게 자꾸 운이 따르지 않아 국제 대회 같은 큰 대회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는 말도 함께 했다.
광규는 기쁨과 아쉬움이 공존하던 목소리로 말하던 병렬의 말을 떠올렸다.
‘그런 놈이 사고로 아예 선수까지 그만둬 버렸으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지. 몇 년 동안 아예 연락도 잘 안 하다가 얼마 전부터 축구 코치에 대해서 묻더라고. 선수로서 뛰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다시 축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니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리고 그놈,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경기를 읽는 눈도 나름 있는 것 같더라고. 거, 잘하면 코치로도 잘할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광규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전화를 하는 사람이 자신이 알던 병렬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로 들뜬 목소리에 광규는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무뚝뚝한 양반이 그렇게까지 신나서 이야기할 정도니 얼마나 기대를 하는 건지. 나 참, 나이가 들어도 평생 안 바뀔 것 같던 사람이 바뀐 건가, 아니면 저 녀석이 그만큼 대단한 재능이 있는 건가.’
광규가 기억하는 병렬은 언제나 바위처럼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선배였고 그것은 그가 감독이 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볼 때마다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무르게 된 것은 본적이 없었다.
“결국 내가 병렬 선배가 그렇게 기대하는 녀석을 시험하는 역할이란 거지. 이겨도 져도 손해 보는 입장인데 이거.”
광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번 경기에서 자신이 안일하게 대응한 것을 파고든 것은 분명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연습 경기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임한 자신의 안일함이 부른 결과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어떻게 나오느냐가 관건이구먼.”
“감독님?”
상대 스탠드에서 공책에 무언가를 쓰면서 열심히 손짓 발짓 하며 설명하는 동민을 노려보며 혼잣말을 하자 뒤에서 윤석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니다. 어제 말했던 대로 움직이는 거 다들 기억하지? 특히 진우랑 형규 너희가 제일 중요해. 너희들이 자리에서 벗어나거나 집중력 떨어지는 순간이 위기라고 생각하고 움직여라. 알았지?”
“네.”
“알고 있습니다.”
광규의 말에 바짝 굳어서 대답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그는 흡족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어처구니없이 무너지지 않는다. 상대 팀의 실력은 저번에 이미 보았다. 이번엔 그때처럼 나중을 위해서 두 에이스를 빼는 일도, 상대의 변화에 가볍게 대처하는 일도 없다. 그때가 연습 경기라면 이번은 결승전이다. 광규는 그 사실을 새삼 마음속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들 말했던 것 유념하고 다들 한시도 집중 잃지 마라. 상대보다 너희들이 더 위라는 건 저번에 이미 깨달았을 걸로 안다. 저번 연습 경기에서 졌던 건 다들 연습 경기라고 가볍게 대한 탓이었다, 심지어 나까지. 그렇지만 이번엔 달라. 우승이 걸린 결승전이다. 여기서 지는 건 있을 수 없어. 다들 알아들었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됐어. 가서 우승하고 돌아오는 거다. 저번에 졌던 걸 이자까지 더해서 갚아줘. 저쪽에 두 번이나 지면 창피하지 않겠냐?”
광규의 목소리와 몸짓은 저번에 패배한 감독이 아닌, 이 대회에서 손꼽히는 강팀 감독으로서의 자신감과 결의가 넘치고 있었다.
“병렬 선배 어디 확인해 봅시다. 당신이 그렇게 기대하는 어린 녀석이 얼마나 대단할지.”
광규의 시선이 관중석에 앉아 광규와 동민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는 병렬에게 향했다.
“…이상, 설명 끝. 혹시 아직 이해 못 한 사람 있어?”
동민은 선수들을 둘러보면서 물었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너무 위험한 거 아냐? 아무리 영진이랑 경수가 움직이는 게 어느 정도는 익숙하다지만 꽤나 다른 포지션일 텐데. 차라리 두 사람 중 한 자리는 병원이가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어?”
경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지만 동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선 둘 중 누구라도 공격에 나설 수 있고 위협적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어야 해. 병원이가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지만 지금 이거엔 두 명이 더 적합할 거야. 그리고 병원이는 좌측 수비 가담에 더 익숙하니까 만약의 경우엔 시영이 형 자리를 대신하게 될 수도 있어.”
동민은 다시 한 번 선수들을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예전에 말했던 것 같지만 전술은 감독의 영역이야. 내가 짜고 내가 책임지는 일이야. 그러니까 여긴 맡겨줘. 내가 말한 걸 생각하고 움직여 줘. 혹시 못 믿겠다는 사람 있어?”
동민의 말에 모두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결승까지 올라온 것은 모두의 공이였지만 그중 동민의 몫이 가장 크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본선에 진출한 것만 해도 좋은 성과라고 생각하던 팀이 결승까지 올라왔다는 것은, 시간을 되돌려 한 달 전의 그들에게 말한다면 아마 믿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이 자리에 선 것은 그들에게겐 믿기 힘들 정도의 행운인 동시에 동민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누가 못 믿겠어. 니 말대로 해보자고. 어차피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움직이면서 올라온 거잖아. 이제 와서 못 믿을 리가 없지. 뭐야, 할배는 못 미더워?”
누구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예상외로 종환이었다.
종환은 평소처럼 툭 내뱉었지만 그 말에는 절대적인 신뢰가 담겨 있었다.
“얌마, 누가 못 믿는다고 했냐? 혹시나 하고 말한 거지. 그래, 저 삐죽이도 오케인데 내가 아닐 리가 없잖아.”
경태가 말을 받자 이내 다들 한 명씩 동의의 의사를 표현했다.
“좋아. 그러면 시작해 보자. 나가서 우승해서 돌아오자고. 저번에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기는 거야. 충분히 해볼 만한 게임이라고.”
동민이 자신 있게 맺은 말을 시작으로 그들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