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알고도 못 막는 상대를 막아라(1) (33/270)
  • 알고도 못 막는 상대를 막아라(1)

    “감독님.”

    “니가 팀을 이끄는 동안은 너도 감독이야, 이놈아.”

    고개를 들어보니 병렬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민은 반가움에 미소를 지으려다가 조금 전 게임을 스승에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자 괜히 창피해져서 억지로 말을 돌렸다.

    “지금은 선수들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니까 괜찮을 거예요.”

    “얼씨구, 아주 이게 궤변만 늘어가지고.”

    병렬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보고 있다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그, 감독님 보시기에 부족한 건 많았겠지만 앞으로 더 공부해서…….”

    “그런 뻔한 말은 말고. 너는 어떤 축구를 하고 싶은 거냐?”

    머리를 긁으며 말을 돌리려던 동민은 병렬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축구요?”

    “그래, 니놈이 감독을 목표로 했으면 선수들로 하여금 어떤 방식의 축구를 하게 만들 거냐, 이 말이다. 전술적으로 수비나 공격에 집중하겠다, 그런 말도 좋고, 아니면 정신적으로 파이팅 넘치는 축구를 목표로 하겠다, 그런 말이라도 상관없다. 아니면 죽어라 선수들을 굴려서 체력적으로 우위에 서는 축구를 원한다거나, 뭐든 뭔가 생각해 두고 있는 게 있을 거 아니냐? 네 철학이나 그런 게 있으면 이야기해 보란 말이다. 아니면 아직 생각 안 해본 거냐?”

    동민은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기는 축구를 목표로 하고 싶어요. 상대에 맞춰서 상대의 장점을 막고 단점을 파고드는, 상대가 가장 껄끄러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런 팀을 만들고 싶어요. 상황에 맞춰서 어떤 전술이든 소화해낼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팀이요.”

    동민의 말에 이번엔 병렬이 얼굴을 찌푸릴 차례였다.

    “…이기는 축구는 당연한 소리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걸 이야기해야 할 것 아니냐, 이 멍청한 녀석아. 생각을 안 해봤으면 이제부터라도 꼭 생각을 해보라는 이야기지 적당한 말로 넘어가라는 소리가 아니야. 어떤 전술이든 소화해 내는 팀이라니 무슨 게임이라도 하는 줄 알아?”

    동민의 말은 병렬에게는 그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말로만 들렸다. 어떤 팀이든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색깔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줄이려는 노력을 한다. 그러나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색을 함께 가지는 팀은 없다. 점유율과 공격을 중시하는 팀이면서 동시에 수비 라인을 내리고 다이렉트 패스로 역습하는 방식이 익숙한 팀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저는 진심인데요.”

    “뭐?”

    병렬의 얼굴은 찌푸려지는 것을 넘어 거의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동민은 그런 병렬을 똑바로 보면서 이야기했다.

    “저는 정말로 그런 팀을 만들고 싶어요. 어떤 전술을 내세워도 해낼 수 있는 팀이요. 제가 어떤 축구를 하고 싶다고 해도 상황에 따라서 그게 안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계속 그런 축구를 고집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상황과 상대에 맞는 축구를 하는 팀, 그게 제가 감독이 되었을 때 만들고 싶은 팀이에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팀 컬러인 팀이요.”

    병렬은 날카로운 눈으로 동민을 바라보다 이윽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 니 생각이 지금 그렇다면야 당장 말리지는 않으마. 다만 공부를 할수록, 그리고 네가 실제로 팀을 이끌 때가 되면 그런 생각도 달라질 수도 있을 거다.”

    병렬은 제자의 고집을 당장 꺾고 싶지 않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 동민이기에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었다. 다만.

    ‘이 녀석이 확실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게 성장에는 좋을 텐데. 뭐,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이번 대회를 경험으로 삼아 공부하다 보면 바뀌겠지.’

    병렬은 그의 애제자를 걱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라면 이번 경기를 수비적으로 이끈 이유도 있겠지. 니가 결승엔 어떻게 신영대를 상대할지 지켜보마. 광규 그놈이 연습 경기에서 한 번 졌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느슨하게 하진 않을 텐데.”

    “어? 감독님 신영대 축구부 감독을 아세요?”

    “넌 내가 얼마나 애들을 가르쳤는지 가끔 까먹는 거냐? 이런 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알 수밖에 없어. 광규 그놈이야 사실 그 전부터 알던 놈이긴 하지만.”

    병렬의 말에 동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신영대와 했던 연습 경기 직전 하광규와 잠시 이야기할 때에도 병렬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감독님은 감독님을 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하셨… 아.”

    동민은 말을 하다가 깨달았다.

    광규와 병렬이 아는 관계라는 것을 동민이 몰랐듯 똑같이 광규도 동민이 병렬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 그래도 생각이란 건 한 모양이구나. 예전에 선수 시절 후배거든, 그놈은. 뭐, 그쪽은 어떻게 알았는지 며칠 뒤에 나한테 연락이 왔었다. 그놈이 애들 선수로만 키우는 줄 알았는데 코치도 키우냐고 묻더라.”

    병렬이 예전에 K리그에서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어도 꽤 오랫동안 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동민이 병렬의 후배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건 진짜 몰랐네요. 그러면 혹시 그 말 외에 그 감독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별 의미는 없지만 저한테 대해서 뭔가 말했다면 그걸 들어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뭔가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어 보려 동민이 말했지만 병렬은 쌀쌀맞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괜히 나한테 코딱지만 한 힌트라도 얻어 보려고 아양 부리지 마라. 어차피 너도 그쪽이랑 한 번 상대해 봤으니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고 있던 거 아니었냐? 니 능력껏 해야지, 어딜 잔머리를 쓰려고 비비적대고 있어. 정신 차려, 이것아. 어디서 요상한 배짱만 늘어가지고.”

    “어느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쪽은 절 아는데 저는 모르는 건 좀…….”

    “웃기고 있네. 너에 대해서 알게 뭐가 있어, 요 녀석아.”

    병렬의 말에 동민은 과장스럽게 한숨을 쉬면서 병렬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병렬의 태도는 완고했고 결국 동민은 정보를 얻는 것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내일 이길 생각이었으니까 제 능력껏 잘 해볼게요.”

    “그게 당연한 거다. 이놈아. 잔머리 굴리지 말고 내일 어쩔 건지 집에 가서 고민이나 해둬라. 그리고 아까 한 말 잊지 마라. 니가 말했던 걸 계속 추구할지, 아니면 바꿀지 모르겠지만 니가 감독으로서의 길을 가겠다면 팀에 어떤 색을 입힐지 확실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법이야. 그게 제일 중요한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병렬은 몸을 돌렸다.

    “감독님, 들어가시게요?”

    “가야지, 그럼. 여기 죽치고 앉아서 너하고 흰소리나 더 주고받으랴? 내일 준비나 잘해둬라. 광규 그놈, 저번에 쉽게 보고 어린놈한테 졌다면서 이를 갈고 있더만.”

    “으…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쇼.”

    그 말에 동민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결승전이라고 전력을 다하는 걸 넘어서 아예 이를 갈고 나온다니, 맙소사. 이번엔 그나마 박주현이라는 카드가 있다지만 스테이터스가 전체적으로 밀리는 건 어떻게 대응을 할 수가 없는데…….’

    선수들의 개인 능력 자체가 떨어지는 것을 커버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겠지만, 한두 명의 에이스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전원이 밀린다면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내일 한 경기로 결정 나는 거니까. 한 경기라도 좋으니까 선수들의 능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아!’

    고민을 하고 있던 동민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손뼉을 쳤다.

    “그래, 포인트를 잊고 있었지! 포인트로 컨디션을 강화하면…….”

    지금껏 쌓아둔 포인트를 내일 선수들의 컨디션 강화에 전부 쏟아야 할지 고민하는 동민이었다.

    ‘지금껏 쌓은 포인트가 본선 첫 경기에서 1포인트, 오전의 부광대와의 8강 경기는 2포인트, 그리고 조금 전에 2포인트. 총 5포인트인가. 5명의 컨디션을 높여두면 확실히 신영대하고도 맞설 만한 것 같은데.’

    포인트로 컨디션을 높인 적은 저번에 이차주에게 했던 한 번뿐이었지만, 그때 이차주의 컨디션이 1에서 10으로 바뀌는 순간 게임이 얼마나 달라졌었는지 동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현성고와 한수고의 전체적인 스테이터스 차이가 거의 없었고, 상대가 전반전 내내 이차주가 구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잘 먹혔던 거지만. 그 덕에 고작 한 명의 컨디션을 올리는 걸로도 게임을 아예 뒤집을 수 있었어. 그래도 게임의 중심이 되는 녀석들 5명에게 컨디션 상승을 걸어준다면 확실히 효과는 있지 않을까…….’

    동민은 주현과 종환이 상대 수비를 붕괴시키는 모습과 경태가 마치 통곡의 벽처럼 상대 공격을 막아내는 상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면 이길 수 있겠어. 포인트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그냥 놀려두라고 있는 게 아니잖아. 모아두다가 이럴 때 안 쓰고 진다면 어디에 쓰겠어? 무슨 할인 마트 체크포인트도 아니고.”

    내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며 동민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다가 주머니에서 전해지는 진동에 핸드폰을 들었다.

    ‘일 때문에 또 곧바로 출발하셨다는 이야기네. 그 정도면 그냥 안 오셨어도 될 것을.’

    어머니의 문자를 보면서 동민은 고개를 저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부모님이 손을 흔들고 곧바로 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역시나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모양이었다.

    결국 동민이 부모님을 보게 된 것은 집에 들어가고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어서와. 축하해, 아들.”

    “축하한다. 아까 니가 감독 하는 거 잘 봤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사오셨어요?”

    집에 들어오자마자 축하를 건네는 부모님의 손에 있는 장바구니를 보면서 동민이 말했다.

    “네가 감독으로 하는 팀이 결승전에 올라갔는데 뭐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니. 그럼 설마 아들이 그렇게 고생하는 걸 보고도 빈손으로 그냥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어? 오늘 저녁은 축하 파티란다.”

    ‘이 분위기에서는 만약에 내일 지게 되면 200만 원이 홀랑 날아간다는 소리는 죽어도 못 하겠구나… 새삼 긴장되는데. 아니면 만일을 위해서 단기간에 돈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라도 어디 없나 찾아봐야 하나, 요즘 그런 아르바이트가 있던가…….’

    어머니의 말에 동민은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양심의 가책 탓에 어머니가 해주시는 맛있는 음식들도 무슨 맛인지 느낄 수가 없었다.

    식탁 대부분에 차려진 음식들을 몇 번 손대다가 동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무슨 일 있니? 벌써 그만 먹게? 아직 많이 남았는데.”

    “아, 내일 경기 때문에 신경이 좀 쓰여서요. 먼저 들어갈게요.”

    “아이고, 이거 아깝게. 알았다. 냉장고에 넣어둘게. 내일 준비 확실히 하려무나.”

    결국 그는 애매하게 웃으면서 말을 둘러대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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