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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의 무게 (31/270)

벤치의 무게

‘지금 방법은 이거 하나뿐인가.’

현준의 패스에 이은 규현의 슈팅을 호재가 몸을 날려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것을 보고는 결국 동민은 마음을 굳혔다.

“지승이, 요한이랑 그리고 진호 형 지금 당장 빠르게 몸 풀어. 곧바로 교체할 거야.”

“어?”

“뭐?”

“이대로 계속 뒀다간 동점 골만 먹히는 게 아니라 남은 시간 내내 계속 끌려가다가 지게 생겼어. 교체 카드 세 장 한꺼번에 다 쓸 거야. 후딱 몸 풀어. 세 명 다 같이 교체할 거니까.”

동민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방금 말한 대로 측면에서 현준이 계속 날뛰게 두었다가는 동점 골만 먹히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 자체가 계속 이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든 이 한 골 차를 지키는 쪽으로 가자. 서현준한테 신경을 쏟다가는 중앙에서의 패스에 당하고, 중앙을 지금처럼 압박 수비로 틀어막자니 서현준이 있는 측면이 완전히 비어버릴 거야. 지금은 역습보다도 이 한 골 차를 지키는 수밖에 없어.’

동민은 상대가 뚫지 못하도록 더욱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 쪽으로 결정하고 머릿속으로 전술을 정리했다.

“요한이 넌 영진이랑 교체, 밀고 들어오는 상대 우측 윙은 병원이가 막게 하고 너는 수비 블록 같이 세워줘. 지승이 넌 주현이랑 교체해서 좌측 풀백. 측면에서 일대일로 막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해. 혼자서 일대일로 막아낸다는 마음가짐 버리고 무조건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만 막아낸다고 생각해. 병원이나 요한이, 진규 형이랑 같이 협력 수비로 막는 게 아니면 그대로 뚫릴 거야. 시영이 형은 조금 더 앞으로 나가서 계속 달라붙으면서 1차 방어선 만들라고 전해줘. 1차로 달라붙는 사람 없으면 서로 볼 여유도 없어져서 수비진에서 우리끼리 동선 다 꼬이고 엉망이 될지도 몰라. 그리고 진호 형은…….”

쉴 새 없이 말하던 동민은 잠깐 숨을 고르고 김진호를 보았다. 김진호의 포지션은 공격수였지만 연습 게임을 통틀어서도 선발로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포지션 경쟁자인 이종환한테 완전히 밀렸으니까. 그 인간 입이 좀 험한 거 외엔 연계도 많이 좋아졌고, 공간 찾아 들어가는 움직임도 김진호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니, 같은 원톱 자리에선 김진호가 밀릴 수밖에.’

원톱으로서 가져야 할 움직임이나 패스가 이종환에 비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제공권이나 속도 같은 신체적인 조건은 김진호가 조금 더 나았지만, 그것이 이종환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이유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이 녀석이 이종환보다 더 알맞을 수도 있어.’

주현과 영진을 빼고 전술을 아예 걸어 잠그는 쪽으로 바꾸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잘 나오지 않았던 제대로 된 기회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수비에 더 치중하는 이상, 아마 첫 골 장면이나 전반전에 만들었던 찬스처럼 그나마 마지막에라도 만들어가는 공격은 거의 나오기 힘들겠지. 공을 뿌려줄 사람도 더 적어지고, 무엇보다 혼자서 수비진을 흔들어줄 박주현이 없으니까. 해봐야 박스 근처로 갖다 붙이는 롱패스 정도나 나오려나. 그렇다면 차라리 든든한 신체 조건이나 믿고 상대 페널티박스 근처에 김진호를 박아 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움직임이 떨어진다지만 지금은 굳이 이종환처럼 움직이고 공간을 만들 필요도 없으니까.’

동민은 진호를 보면서 말했다.

“진호 형은 종환이 형이랑 바꿔줘. 종환이 형처럼 패스 받으려고 좌우로 뛰면서 공간 만들어낼 필요 없어. 형의 가장 큰 장점은 제공권이랑 스피드니까 박스 근처에서 상대 수비가 더 못 올라오도록 압박 좀 주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그대로 머리로 한 골 박아버려.”

동민은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들기며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미소 지었다.

“난 형한테 종환이 형 역할을 바라는 게 아니야. 형은 형이 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 이해했지?”

“알고 있어.”

동민의 말에 진호는 짧게 대답하고는 그라운드를 노려보았다.

“세 명을 한꺼번에 교체한다고? 저놈이 지금 그렇게 마음이 급한가? 하여간 경험 부족은 어떻게 할 수가 없구먼. 아니, 이건 경험 부족이라고 하기도 뭐한데. 전부터 느꼈지만 저놈은 심리적으로 압박이 심해지면 실수가 나오더니. 하여간 아직은 덜 여문 놈이야.”

병렬은 KFC 측에서 동시에 세 명을 교체하는 것을 보며 혀를 찼다. 후반전 교체 이후에 SFC의 16번에게 몇 번의 위기를 맞는 것을 보면서 동민의 판단력이 흐려질까 걱정을 하던 그였지만, 동민의 이런 행동을 보면 그 걱정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체 카드를 한 번에 세 장 전부 써가면서 전술을 교체하면 곧바로 선수들이 거기에 맞출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런 기본적인 것도 까먹고 있을 정도로 긴장했나.’

어떤 선수든 교체로 그라운드에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감독에게 전술 지시를 들었어도 그 경기의 팀원들의 움직임이나 경기의 분위기나 여러 가지를 알아야 하고, 반대로 원래 있던 선수들도 새로 들어온 선수에게 맞춰줄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세 명을 한꺼번에 교체한다는 것은 그만큼 선수들이 선수 교체에 적응할 시간에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물며 프로 선수도 아닌 아마추어 대학생들에게 11명 중 3명이 위험 요소라는 것은 교체 직후의 그 어수선한 시간 동안 완벽하게 무너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긴 셈이다.

‘거기다가 경기 중에 부상자라도 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건지. 저놈 긴장하면 생각이 짧아지는 버릇을 고치는 게 급선무야. 대회가 끝나면 한바탕 이야기를 해서라도 고쳐야겠어.’

병렬은 혀를 차며 열심히 지시를 내리고 있는 동민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병렬이 보기에 지금 동민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바꾼 멤버도 아예 틀어막아 버리겠다는 식이니 정말 신기하기도 하지. 동민이 그놈이 이렇게 수비적인 축구를 하는 것도 참 안 어울리는데.”

전반전에 하던 선수비 후 역습 전술을 넘어, 역습 인원조차 최소한도로 줄이고 상대 공격을 막아내려는 동민의 전술을 보고 병렬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전술을 짜는 건가, 아니면 오늘이 특이한 케이스인가. 이전 경기도 봤으면 좋으련만, 저놈이 장소며 시간이며 이야기를 안 해줬으니. 하여간 배은망덕한 놈이라니까.”

병렬은 투덜거리면서도 경기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거 아까보다 어려워졌구먼.’

현준은 수비의 숫자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후반전 초반만 해도 몇 번이나 수비들을 헤집고 다니며 슈팅 찬스를 만들거나 위협적인 패스를 넣었지만, 상대가 세 명 동시 교체, 그것도 전부 수비적인 교체라는 강수를 두고 난 뒤에는 그것이 힘들어졌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뚫어내야 할 수비의 숫자가 달리진 것이다.

‘아까는 두세 명만 뚫으면 바로 골문이었는데 이건 아예 끝이 없어. 대체 얼마나 달라붙는 거야.’

그가 몇 번이나 개인기로 제쳐왔던 풀백이 윙으로 올라와 끊임없이 달라붙고, 나머지 수비들은 적극적으로 먼저 달려드는 대신 패스나 드리블을 할 만한 지역을 몸으로 커버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빽빽하면 영 쉽지가 않아.’

늘어난 수비 숫자 탓인지 아까부터 현준의 슈팅이나 패스도 점점 더 어긋남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 후반전 내내 해 보겠다 그건가.”

아직 후반전은 반 이상 남아 있는 상태인데 상대는 세 장의 교체 카드까지 전부 써가며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 또한 이렇게 극단적으로 수비에 집중하는 형태의 전술이 익숙할 리 만무했다.

‘한 번이라도 뚫는다면 그때부턴 완벽하게 우리 경기가 되니까 우리 승리, 못 뚫으면 그대로 끝이라. 어린 대학생들 팀이라지만 너무 도박을 좋아하는 거 아닌가. 모 아니면 도라니 도박이 지나치잖아. 하여간 어린 친구들은.’

현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경기가 도박이든 뭐든 그는 쉽게 질 생각은 없었다.

‘반드시 이 수비를 뚫고서 골을 만든다.’

그는 자신감과 결의를 담고 생각했다.

‘여기서 있다 보면 한 번은 기회가 올까?’

진호는 상대의 페널티박스 근처에 서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수비가 나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언제든 수비의 뒤 공간으로 달릴 수 있는 공격수가 있는 이상, 어느 정도 이상으로 수비 라인을 올리기 껄끄러운 것을 이용한 것이었다.

상대의 공세를 어떻게든 막아내려는 팀원들을 보았지만, 그는 뭔가 경기에서 붕 뜬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그라운드를 밟는 것이 어색한 느낌까지 들었다.

‘하긴, 교체로라도 경기를 나서보는 게 진짜 오랜만이긴 하지. 예전엔 간간히라도 나왔지만 요즘은 내내 벤치였으니까.’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스탠드에 앉아 진지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두 명의 팀원에게 시선을 멈췄다.

그 둘은 각기 다른 태도로 경기를 보고 있었다.

한 명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쥐고서 진지한 표정으로 경기를 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분한 표정을 지으며 초조한 듯 다리를 떨고 있었다.

서로 정반대인 두 사람이지만 지금의 진호에겐 비슷하게 보였다.

두 손을 모아 쥔 주현도, 초조한 듯 다리를 떠는 종환도 그에겐 결코 넘어서지 못할 벽 같은 사람들로 보였다.

‘주현이 같은 경우에는 나랑 같은 벤치 멤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네.’

동민이 오기 전까지 대부분의 경기에서 함께 벤치를 지키던 두 사람이었지만, 동민이 온 뒤로 주현은 점점 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그야말로 팀의 핵심 멤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진호 자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종환의 벽은 높았으며, 투톱을 쓸 때조차 종환의 짝이 자신이 아닌 주현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도 뭔가 보여주고 싶어.’

종환에게 밀려 벤치에서 동경만 하는 그였지만, 같은 신세에서 완전히 뒤바뀐 주현을 보고 질투하던 그였지만, 지금 뛰고 있는 것은 그 두 사람이 아닌 그였다.

‘이번 기회만은 놓치고 싶지 않아. 감독이 날 넣은 게 득점에 대해서 그리 큰 기대를 하고 넣은 게 아니란 건 알지만…….’

진호는 주먹에 힘을 주고는 간절하게 바랐다.

‘한 번이라도, 진짜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기회가 왔으면…….’

벤치에서 종환을 동경만 하고 있는 것도,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의 주현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이젠 그만두고 싶었다.

‘이번만은 절대 놓치지 않을 테니까. 분명히 후반전이 끝날 때까지 한 번은 기회가 올 거야. 그것만은 꼭 붙잡아야 해. 한 번 더 놓치면 이번엔 진짜 따라잡지 못할 거야.’

진호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 서서 단 한 번뿐일 기회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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